이현 30

중국역사상의 태상황(太上皇) (2)

글: 장명양(張明揚) 당나라는 '태상황'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모두 4명의 태상황이 출현한다. 만일 이전 북조의 '태상황'은 모두 난세에 나타난 괴이한 산물이라면, 당나라의 몇명 '태상황'은 모두 성세지군이고, '정관지치'와 '개원성세'라는 두 번의 태평성대에 걸쳐 있다. 그리고 안사의 난을 평정한 중흥시대도 있다. 그러나 황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잔혹함은 도검이 난무하던 난세에 전혀 못지 않았다. 단지 태평성세시대의 권력쟁탈모델은 더욱 음성적이고 더욱 미묘하며 더욱 힘겨루기식이었다는 것뿐이다. 황권은 곡중구(曲中求)해야지 직중취(直中取)해서는 안된다. 이연(李淵) vs 이세민(李世民) 수양제를 '태상황'으로 만들었던 이연은 아마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9년후인 626년, 그도 핍박받아 '태상황'이..

영태공주릉(永泰公主陵): 무측천 손녀의 묘에 얽힌 이야기...

글: 야독문사(夜讀文史) 1958년, 섬서(陝西) 함양(咸陽)부근의 양산(梁山)에서 채석노동자들이 산을 깎아 돌을 캐고 있었다. '쿠궁'하는 큰 소리와 함께, 열린 깨트린 돌의 아래에 크기가 균일하고, 배열이 나란한 돌로 쌓은 석벽이 발견된다. 이는 분명 능묘(陵墓)이다. 공사팀은 즉각 공사를 중단하고, 현지의 문화재당국에 연락한다. 문물국은 소식을 들은 후, 즉시 고고인원을 파견하여 현장조사를 진행한다. 사료기재를 종합하여, 연구자들은 이곳은 당고종(唐高宗) 이치(李治)와 여황 무측천(武則天)의 합장능인 '건릉(乾陵)'이라고 판단한다. 그후 몇년간 고고학자들은 건릉주변을 탐사했고, 차례로 여러개의 배장묘(陪葬墓)를 발견한다. 그중 1킬로미터 바깥의 배장묘는 전문가들의 주의를 끌었다. 이 묘는 총면적이 ..

당고종(唐高宗) 이치(李治)의 여덟 아들: 2명은 황제가 되고, 5명은 비명에 죽다.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당고종 이치(628년 7월 21일 - 683년 12월 27일). 자는 위선(爲善), 당나라의 제3대 황제. 당태종 이세민의 아홉째 아들이다. 정관23년(649년), 당태종이 사망한 후 태자 이치가 즉위하니 바로 당고종이다. 당고종은 즉위후 "영휘지치(永徽之治)"를 열어 당나라의 국력을 전성기로 끌어올린다. 다만, 현경5년(660년)이후, 당고종은 자주 머리가 어지러워, 조정의 정무를 처리하는데 영향을 주어, 무측천이 점차 대권을 장악하게 된다. 홍도원년 십이월 정사일(683년 12월 27일), 당고종은 정관전(貞觀殿)에서 사망하니, 향년 56세였다. 그의 아들들은 당나라조정 내부투쟁의 원인으로 이치의 8명의 아들은 대부분 선종(善終)하지 못했다. 1. 이충(李忠) 이충은 당고종 ..

당중종(唐中宗) 이현(李顯): 4명의 여자들 손아귀에 쥐어지낸 황제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당나라때의 황제들 중에서 이현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인물이다. 범문란(范文瀾) 선생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했다: 당중종은 당고종보다 더욱 유약하다. 이 말을 보면 범문란 선생은 이현도 무시했지만, 이치(李治, 당고종)도 멸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현은 후세인들이 "육미지황환(六味地黃丸)"으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황제일 뿐아니라, 부친, 동생, 아들, 조카가 모두 황제이다. 더더욱 불가사의하게도 그의 모친 또한 황제이다. 바로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이다. 아마도 이런 인물은 역사상 유일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의 부친과 동생 이단(李旦)도 역시 '육미지황환'이라고 말한다. 다만 만일 당나라 황제세계표를 본다면, 그가 이런 칭호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

해독이 어려운 건릉(乾陵)의 무자비(無字碑)

글: 중원수장대강당(中原收藏大講堂) 섬서에 위치한 건릉은 당고종 이치와 여황 무측천이 묻혀 있다. 그래서 중국역대제왕릉중 유일하게 두 황제가 합장된 묘이다. 능원내성 주작문밖의 사마도 서쪽에 당고종 이치의 문치무공을 칭송하는 공덕비인 "술성기비(述聖記碑)"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동쪽에 나란히 서 있는 비는 바로 그 유명한 "무자비"이다. "무자비"는 완전한 거석을 조각해서 만들었다. 높이는 7.53미터, 너비는 2.1미터, 두께는 1.49미터, 총중량은 98.84톤에 달한다. 비의 윗쪽에는 8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비신(碑身)의 양측에는 '승룡도(昇龍圖)'가 새겨져 있다. 용의 몸은 튼튼하고, 자태는 신선처럼 표일하다. 전체적으로 비는 웅혼하고 조각도 정교하여 황실의 위엄을..

태평공주(太平公主): 지나친 사랑은 사람을 망친다.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공주당년욕점춘(公主當年欲占春) 예전에 태평공주는 봄날까지도 독차지하고 싶어했지. 고장대사압성갑(故將臺榭壓城閘) 그래서 넓은 땅을 차지해서 온갖 건물을 지었고, 장안성을 압도했다. 욕지전면화다소(欲知前面花多少) 지금까지도 꽃을 보면서 왔는데, 앞으로 얼마나 먼데까지 꽃으로 뒤덥혀 있을까 직도남산불속인(直到南山不屬人) 종남산에 이를 때까지 이 땅은 다른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모두 태평공주의 땅이다 태평공주를 묘사한 시 중에서 한유(韓愈)의 이 시는 가장 유명한 것일 것이다. 시가 비록 짧지만, 이 여인이 점유한 땅이 얼마나 넓은지, 그녀가 지은 정자 누각이 얼마나 장관인지, '욕점춘'이라는 세 글자로 다 표시했다. 그녀의 광망한 심리상태와 사치와 허영을 엿볼 수 있다. 단순한 몇 마..

당나라때 사람들은 "무측천시대"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보았는가?

글: 독사품생활(讀史品生活) 모두 아는 바와 같이, 무측천의 인생궤적은 여러 중요한 시간들이 있었다. 638년 입궁하고, 649년 감업사로 출가하였으며, 655년 황후에 오르고, 674년 천후(天后)에 올랐으며, 다시 683년 임조칭제(臨朝稱制)하고, 690년에는 처음으로 황제를 칭한다....이렇게 말할 ..

무자비(無字碑): 무측천 이외의 황제들도 있었다.

글: 마랄역사강당(麻辣歷史講堂) 무측천의 무자비는 유명하다. 기실 무측천의 비문은 처음부너 무자비는 아니었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이 무자비의 면에는 많은 방격자(方格子)가 있는데, 이들 글자가 없는 빈 격자는 분명히 거기에 글자를 새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