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원수장대강당(中原收藏大講堂)
섬서에 위치한 건릉은 당고종 이치와 여황 무측천이 묻혀 있다. 그래서 중국역대제왕릉중 유일하게 두 황제가 합장된 묘이다. 능원내성 주작문밖의 사마도 서쪽에 당고종 이치의 문치무공을 칭송하는 공덕비인 "술성기비(述聖記碑)"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동쪽에 나란히 서 있는 비는 바로 그 유명한 "무자비"이다.
"무자비"는 완전한 거석을 조각해서 만들었다. 높이는 7.53미터, 너비는 2.1미터, 두께는 1.49미터, 총중량은 98.84톤에 달한다. 비의 윗쪽에는 8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비신(碑身)의 양측에는 '승룡도(昇龍圖)'가 새겨져 있다. 용의 몸은 튼튼하고, 자태는 신선처럼 표일하다. 전체적으로 비는 웅혼하고 조각도 정교하여 황실의 위엄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지금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비의 양면(陽面)과 음면(陰面)에 모두 문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들 문자는 송나라때 시작해서 명나라때까지 새겨졌다. 당나라때 새긴 것은 드물다. 예를 들어, 사료기재에 따르면, 이 비에는 처음에 아무런 글자도 없었다. 송,금,원시기에 이르러 비에 필력이 험준하고 여러 체가 구비된 글자가 새겨진다. 최초의 문자는 비의 음면에 새겨진 송휘종 숭년2년(1103)의 제각(題刻)이다. 가장 늦은 것은 명나라 숭정6년(1633)이다. 글자를 새긴 사람은 대부분 당시 요직에 있던 조정고관이다. 이들 비각문자는 전후로 530년에 걸쳐 있다. 대부분은 기록물인데 사건을 기록한 것, 소회를 쓴 것과 여행을 기록한 것의 3가지 유형이다. 그중 가장 가치있는 것은 비의 양면 정중앙에 있는 <대금황제도경략랑군행기(大金皇弟都經略郎君行記)>의 거란문자이다.
무측천은 중국역사상 유례없은 일대 기인이다. 그녀에 대한 전설과 이야기는 정사이건 야사이건 모두 많이 전해진다. 그런데 왜 유독 그녀 자신의 능앞에 있는 이 원래 '공덕을 기록해야 하는' 석비에 '글자 한자를 남기지 않았을까'
현재까지 이 무자비가 나타난 원인에 대하여 여러가지 추측이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공이 너무 커서 글로 나타낼 수 없어서"라는 설, "죄악이 너무 중해서"라는 설, "아들이 보복했다"는 설의 세가지가 있다. 이 세가지 견해는 모두 후인들의 주관적인 억측이다. 사실적 근거는 없다. 그렇다면 사실은 도대체 어떠했을까?
무측천의 일관된 크게 일을 벌이기 좋아하는 스타일로 보았을 때, "공이 너무 커서 글로 나타낼 수 없어서"라는 설은 가장 설득력있어 보이긴 한다. 중국역사상 최초의 유일한 여황제이고, 봉건시대의 걸출한 여성정치가로 무측천은 등극후 궁전, 불사를 수리하면서 자신을 돋보이게 했다. 장수3년(694년) 이미 70의 고령이 된 그녀는 스스로를 표창하기 위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신도(神都, 낙양)성내의 정정문(定鼎門)에 토목공사를 크게 벌인다. 백억을 들여 덕을 칭송하는 '천추(天樞)'를 만든 것이다. "천추가 완공된다. 높이는 일백오척, 지름는 십이척이며, 팔면에 각각 지름이 오척이다. 아래는 철산으로 주위가 백칠십척이다. 구리로 용과 기린이 휘감았다. 위에는 등운승로반이 있는데 직경이 3장이다. 4마리의 용이 화주를 받들고 있는데 높이가 1장이다." 그리고 친필로 "대주만국술덕천추(大周萬國述德天樞)"라고 썼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것을 위하여 27,000관의 유통되는 돈을 녹였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국가재력의 1/4이 넘는다. 695년, 그녀는 다시 구주동정(九州銅鼎)과 십이생초(十二生肖)를 주조하게 하여 통천궁에 놓았다. 어떤 학자에 따르면, 무측천이 불사를 크게 지어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고, 이로 인하여 "당나라의 전성기의 도래를 양한, 명, 청에 비ㅏ여 3,5십년 늦게 오도록 하였다" 무측천이 국력, 재력, 민력을 낭비하면서까지 개인숭배의 '이미지공사'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면, 그녀는 절대 자신이사후에 자신의 공덕을 알릴 비에 글을 남기는 일을 그냥 허술하게 했을 리가 없다. 하물며 683년 당고종의 붕어에서 705년 무측천의 사망시까지 건릉은 무측천이 친히 기획하고 지휘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22년에 달한다. 그녀는 이 일을 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무측천이 자신의 비에 글자를 새길 생각이 있었다면, 왜 현존하는 비에는 글자 하나가 없을까? 이는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무자비"는 무측천 본인과 무관하다. 글자를 새길지 말지, 어떤 내용으로 새길지는 이미 중병을 앓으며 죽기만을 기다리는 그녀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점을 설명하려면, 당시의 정치형세와 후계자의 상황을 분석해야 할 것이다.
무측천이 재위는 비록 겨우 16년이지만, 현경5년(660년)부터 정치에 참여했고, 신룡원년(705년) 정월에 퇴위당할 때까지 그녀가 실제로 천하대권을 장악한 기간은 45년간이다. 비록 풍운을 질타했고, 영웅일세하였지만 말년에 이르러, 특히 임종전에 무측천의 처지는 아주 처량했다. 신룡원년 정월, 무측천은 병을 앓는다. 재상 장간지를 우두머리로 하는 조정신하들이 정변을 일으켜, 무측천의 남총 장역지 장창종 형제를 죽여버리고, 그녀가 당중종 이현에게 양위하도록 압박한다. 그리고 국호를 "당"으로 회복하고, 무측천은 상양궁으로 옮겨서 거주한다. 같은 해 십일월, 82세의 무측천은 동도 낙양의 상양궁에 있는 선거전에서 병사한다. 죽기 전에 유조를 남겨, "황제의 칭호를 없애고, 측천대성황후로 칭하라"고 한다. 그녀는 비록 권력을 이당에 되돌려 주었지만, 어쨌든 남존여비, 부위부강, 군권신수의 봉건사회에 '참월찬위'한 것이다. 그러니 사회의 주류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당시 표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 그녀가 생사여탈권을 쥐고 압박했고, 다른 한편으로 그녀를 무씨의 딸, 이씨의 며느리로 보았기 때문이다. 무측천은 정적에 대하여 악독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전후로 친아들 태자 이홍(李弘, 시호는 효경황제)을 독살하고, 폐태자 이현(李賢)을 서인으로 폐했으며, 나중에 자살하도록 핍박한다. 당중종 이현(李顯)도 여러번 독수를 당한다. 당초 즉위한지 1년이 되지 않아 그녀에 의해 폐위되고 경사에서 축출된다. 당중종이 장남 이중윤(李重潤, 시호는 의덕태자), 딸 이선혜(李仙蕙, 중중의 일곱째 딸, 시호는 영태공주)는 모두 말을 조심하지 않다가 무측천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어찌되었건, 무측천이 황제를 칭하고 당을 주로 바꾼 것은 이당천하에 크나큰 치욕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죽은 후 당고종과 건릉에 합장할 때, 급사중 엄선사(嚴善思)등은 상소를 올려 반대한다. 그저 당중종이 동의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고종의 "술성기비"에는 8천여자의 비문이 있고 그것을 무측천이 짓고, 당중종 이현이 글씨를 썼다. 오늘날 사람들이 만일 자세히 "무자비"를 관찰한다면 양면에서 3천여자의 4.5센티미터크기의 네모난 선각 격자가 보일 것이다. 어떤 선각격자는 비록 1300여년이 흘렀지만 비교적 선명하게 보인다. 이를 보면, 당초 비문으로 준비한 글은 개략 3천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중종은 왜 비문에 그것을 새기지 않은 것일까?
무측천이 정치무대에서 물러난 후, 당중종 이현이 즉위한다. 이현의 원래 이름은 이철(李哲)이다. 무측천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본래 당고종이 붕어한 후 황위를 넘겨받았었다. 그러나 두달간 황제로 지낸 후, 모친에 의해 폐위되어 여릉왕(廬陵王)이 되어 장안에서 쫓겨난다. 전후로 균주(지금의 호북성 균현), 방주(지금의 호북성 방현)에 14년간이나 연금되어 있었다. 이 기간동안 그와 그의 비 위씨는 서로 의지하며 살았고, 인간세상의 고난을 모두 맛본다. 성력2년(699년), 무측천은 이현을 장안으로 불러 다시 태자로 세운다. '신룡정변'이 발발할 때 비로소 그는 다시 등극한다. 그렇다면 이 일찌기 풍상을 겪고 갖은 고난을 겪었던 당중종은 이미 퇴위한 모친을 어떻게 대했을까? 당시 당중종의 심정을 추정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만일 모친의 유조에 따라, '측천대성무후'라고 칭하자니, 무측천은 분명히 16년간 대주황제를 지냈다; 그러나 '대주천책금륜성신황제'라고 적자니 이당자손으로서 감정상 내키지 않는다. 그리고 무측천은 말년에 계속 황위를 무씨자손에게 물려주려고 생각했었다. 무측천은 자신과 이씨가족에 온작 악행을 저질렀다. 당중종으로서는 원한이 마음 속에 심어져 있었을 것이다. 그는 마음 속에서 '무언(無言)'으로 이미 준비해놓은 비문을 대신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추측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하에서 아예 "글자를 새기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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