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림지청(靑林知靑)
공주당년욕점춘(公主當年欲占春) 예전에 태평공주는 봄날까지도 독차지하고 싶어했지.
고장대사압성갑(故將臺榭壓城閘) 그래서 넓은 땅을 차지해서 온갖 건물을 지었고, 장안성을 압도했다.
욕지전면화다소(欲知前面花多少) 지금까지도 꽃을 보면서 왔는데, 앞으로 얼마나 먼데까지 꽃으로 뒤덥혀 있을까
직도남산불속인(直到南山不屬人) 종남산에 이를 때까지 이 땅은 다른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모두 태평공주의 땅이다
태평공주를 묘사한 시 중에서 한유(韓愈)의 이 시는 가장 유명한 것일 것이다. 시가 비록 짧지만, 이 여인이 점유한 땅이 얼마나 넓은지, 그녀가 지은 정자 누각이 얼마나 장관인지, '욕점춘'이라는 세 글자로 다 표시했다. 그녀의 광망한 심리상태와 사치와 허영을 엿볼 수 있다. 단순한 몇 마디의 문구로 더 이상 적절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묘사했다.
봉건사회의 역사에서 부녀자는 계속 부속적인 지위였다. 그러나 당나라때 특히 초당, 무주(武周), 그리고 당현종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에는 대당의 정치무대에서 여성들이 주인공이었다.
그중 한 명은 당연히 무측천이다. 나중의 상관완아, 위후, 이과아(李裹兒)등등 모두가 그 안에서 톡톡히 역할을 했다. 당연히 상관완아를 제외한 나머지 몇명은 모두 무측천을 본받아 여황제가 되고자 했다. 그중 가장 그 꿈에 가까웠던 사람은 마땅히 태평공주라 할 것이다.
<대명궁사>라는 드라마에서 얘기하는 것이 바로 그녀이다. 필자는 보질 못했다. 왜냐하면 필자의 생각에 이런 류의 드라마는 모두 터무니없이 만들기 때문이다. 다만 듣기로 이 드라마는 아주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시청률도 상당히 높았다고도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태평공주는 당고종 이치와 무측천의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이다. 당중종과 당예종의 여동생이다. 평생 부모, 오빠, 특히 무측천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권력이 한때 천하를 좌지우지했다. 나중에 모반에 연루되어, 당현종에게 체포되고 집안에서 사사당한다. 나이는 약 48세때였다.
위의 간력한 소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태평공주는 이름이 없었던 것같다. 어떤 사람은 <전당문(全唐文)>에 근거하여 그녀의 이름을 이영월(李令月)이라고 추측했지만, 어쨌든 고증(孤證)이다. 역사를 읽을 때의 불문율에 따라 그저 참고할 뿐이고, 믿기는 어렵다.
기실, 이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거의 모든 풍운을 질타했던 여인들은 상관완아를 제외하고 이름이 없다. 여황제 무측천을 포함하여. 그녀도 당지 이름이 무(武)라는 것만 안다. 측천은 그녀의 존호이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조(瞾)"라고 짓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리고 무슨 '미낭(媚娘)'같은 건 애칭이거나 소설가의 말이니 근거는 없다.
이름이 없을 뿐아니라, 그녀들의 생년월일도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행히 죽은 해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래서 그녀들의 연령은 모두 사망일로부터 역산하여 추정할 뿐이다. 그러다보니 부정확한 요소가 있다. 여황제조차도 그러하니, 태평공주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무측천은 평생 6명의 자식을 낳았다. 공주 한명은 요절했다. 어떤 사람은 황후를 무너뜨리기 위해 무측천이 목졸라 죽였다고 하지만, 그건 황당무계한 말이니 토론할 가치도 없다. 그외에 4남 1녀를 두었다. 즉, 전태자(前太子) 이홍(李弘),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당중종 이현(李顯), 당예종 이단(李旦), 그리고 태평공주이다.
태평공주는 무측천의 막내딸이다. 그래서 아주 총애한다. 그녀는 분명 예쁘게 생겼을 것이다. 필자가 본 어떤 글에서는 그녀를 '대당제일미녀"라고 불렀다. 야사에서는 그녀가 안락공주(安樂公主) 이과아보다도 예쁘다고 했다. 이과아는 정사에 용모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녀는 "광염동천하(光艶動天下)" 미모가 천하를 뒤흔들 정도였다. 만일 정말 이과아보다도 예뻤다면, 태평공주는 정말 엄청난 미인이었을 것이다. 대당제일미녀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다만 정사에서는 그녀에 대하여 "공주는 방액광이(方額廣頥)하며, 음모(陰謀)가 뛰어났다. 무측천은 항상 '나를 닮았다'고 하였다." 음모가 뛰어났다는 것은 좋은 말이 아니다. 이를 보면 그녀가 잔머리를 잘 굴리고, 계모가 뛰어나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방액' 네모난 이마. '광이' 넓은 턱, 이것이 예쁘다는 것인지 아니면 결함이라는 것인지 알지는 못하겠다. 다만 내용으로 봐서 찬미하는 말은 아닌 것같다. 그러나 그녀가 무측천을 닮았다면 분명히 아름다웠을 것이다. 단지 무측천이 말한 '나를 닮았다'는 말이 태평공주가 음모가 뛰어난 것을 가지고 말했는지, 아니면 '방액광이'를 가지고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이 문구를 가지고, 야사는 앞뒤를 따지지 않고 모두 모아서 얘기한다. 즉, 무측천의 여러 자녀들 중에서, 태평공주가 가장 모친을 많이 닮았다. 용모가 비슷할 뿐아니라, 성격도 비슷했고, 총명하며 일처리에 뛰어났다. 이것으로 보면 무측천이 태평공주를 총애하는 것도 말이 된다.
중국은 인류가 모계사회를 벗어난 후, 모두 남자위주의 사회였다. 진시황이래, 한초에 여후가 권력을 잡았고, 북위의 풍태후가 조정을 주재했지만, 황제의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오직 무측천만이 예외이다. 그녀는 무주왕조를 건립했고, 보기 드문 여권시대를 개창한다. 그 영항을 받아서, 무측천이 죽은 후 이당으로 되돌아갔지만, 이들 몇몇 여성들은 그녀를 본받아 여황제가 되려는 꿈을 꾸게 된다.
'암탉이 운다'고 조롱당하는 여황제는 실로 다시 나타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후세에도 여성이 권력을 잡았던 시기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황제가 되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설사 국정을 반세기동안 장악했던 서태후조차도 애신각라씨의 좋은 며느리로 남으려 했고, 조상에 부끄럽지 앟으려 하고, 조상의 묘에 들어가려 했다. 다른 것은 그녀가 생각지 않았다.
중국황위의 계승제도는 아주 명확한 규칙이 있었다. 중간에 얼마나 변동하든, 아들에게 전하는 것이 메인스트림이다. 그리고 이는 아주 강한 전통이 된다. 일단 여자가 황제에 오르면, 이어진 전승이 문제된다. 누구에게 시집갔는지에 따라 조전손리 그 누구든 황제에 오를 수 있다. 심지어 옆집의 왕씨아저씨도 한다리 걸칠 수 있다.
태평공주가 무측천이 살아있을 때 한 행위는 총애를 믿고 교만했다. 사치의 극을 달렸고, 하고싶은 대로 했다. 이는 모두 최고권력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반성은 하지 않았다. 이런게 뭐 이상하지도 않다고 볼 수 있다.
태평공주의 정치참여는 유래가 오래 되었다. 일찌기 무측천이 아직 여황이 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다. 다만 그녀가 모친이 황제에서 물러나도록 핍박하는데 참여하고, 이장(二張)을 주살한 후, 그 공로로 '진국태평공주'에 봉해진다. 그제서야 비로소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조정에 간여하고, 정치투쟁에 참여하자, 사황은 즉시 복잡해진다. 그녀의 모친이 물러난 후, 오빠인 이현(李顯)이 즉위했고 그가 당중종이다. 이현은 황후 위씨(韋氏)를 방임하여 위씨는 온갖 전횡을 한다. 이현이 죽은 후, 위씨는 시어머니인 무측천을 본받아 여황제에 오르려 한다. 그리하여 태평공주는 조카인 이융기(李隆基)와 손을 잡고 먼저 손을 써서 병변을 일으킨다. 그렇게 위씨일당을 제거한다. 역사에스는 "당륭지변(唐隆之變)"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나중에 그녀의 또 다른 오빠, 즉 이융기의 부친인 이단이 황제에 오른다. 그가 당예종이다. 이때의 태평공주는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권력의 최고봉에 올라 있었다. 역사에서는 "재상 7명 중에서 4명이 그녀의 문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매관매직을 하고, 심복을 심었으며 일당을 조정에 망라시켜 조정을 조종한다. '재상이하 진퇴는 모두 그녀의 말 한마디로 결정되었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문앞에는 장사진을 이루게 된다. 일시에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완전히 황권을 장악할 세력과 능력을 갖추게 된다.
낙극생비(樂極生悲)인 법이다. 그녀의 권세가 전성기를 이룰 때, 조카 이융기가 정변을 일으킨다. 그녀는 사사되고, 가산은 몰수당한다. 일대의 혁혁한 여인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된다.
태평공주는 일생동안 2번 결혼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 불행을 겪은 적이 있다. 악행을 모두 저지르는 사촌오빠 하란민지(賀蘭敏之)는 그녀의 마음에 그림자를 남긴다. 그녀는 16살에 설소(薛紹)에게 시집간다. 남편은 그의 형이 모반에 참가하는 바람에 연루되어 결국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
설소는 착실한 사람이었다. 모반을 하지도 않았다. 단지 연좌되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녀의 신분을 고려하면 그렇게까지 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무측천은 그에 대하여 "곤장 백대를 때리게 하고, 감옥에서 굶어죽게 했다" 아주 참혹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태평공주와 살았을 때 두 사람의 애정은 어떠했을까? 외부인들이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느낌으로 말하자면, 이때의 태평공주는 나중에 처럼 그렇게 추문이 있거나 하지 않았다. 아마도 생활은 담백하고 행복했을 것이다. 아마도 모친 무측천은 사위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던 것같다. 그래서 그를 죽이게 된 것이라 할 것이다. 당연히 이는 태평공주 본인이 남편에게 불만이 있었을 수도 있다.
나중에 그녀는 무측츤 백부의 손자인 무유기(武攸曁)와 재혼한다. 그도 성격이 조심스럽고 겸손한 인물이다. 그녀가 만족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때부터 그녀가 방탕해지고, 음란한 생활을 보낸 거슬 보면,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같다. 모친의 명으로 결혼했으니 아마도 정략결혼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의 무측천은 이미 황제를 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당난송(贓唐亂宋)"이라는 말이 있다 더러운 당, 혼란한 송. 중국역사상 당나라때의 성관계가 가장 혼란스러웠다. 태평공주는 이 난잡한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다. 그녀가 기른 남총은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스스로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남총은 모친 무측천에게 보낸다.
대당이라는 특수한 개방된 시기에서 남녀간의 일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자도 애인을 두고, 여자도 남총을 둔다. 그건 너무나 많아서 이상하게 여길 일도 아닌 것이다. 이당은 원래 농우지방의 오랑캐출신이다. 그들의 몸에는 돌궐, 선비족의 피가 흐른다. 남녀간의 일은 스스로의 습속이 있다. 현재의 우리가 한족의 관념으로 평가할 일이 아니다.
중국의 사방에는 소수민족지역이 있다. 많은 지방은 예로부터 "증보혼(蒸報婚)"이 성행했다. 즉, 부친이 죽은 후, 자신의 모친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승계한다. 그 중에는 당연히 모든 처첩이 포함된다. 이것은 집안의 재산이 외부로 흘러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남자의 점유욕때문이다.
주변의 오랑캐가 아니라, 중원에서도 그런 일은 있었다. 조조가 죽은 후, 조비는 부친의 시첩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사람은 돌려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차지했었다. 다시 말해서 남송의 성리학이 여성의 정절을 끌어올리기 전에 역대이래로 이성간의 일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예를 들어 북송이 대시인 중에서 왕안석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좌우에 첩을 끼고있었다.
이렇게 길게 얘기한 이유는 바로 하나이다. 음란을 가지고 태평공주가 좋은 여자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애인 몇명을 곁에 두는 것은 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태평공주가 나중에 비난받게 되는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고, 그녀가 혼자서 조정을 어지럽힌 것때문이다. 혹은 황제에 오르기 위한 목적으로 나쁜 짓들을 했기 때문이다.
태평공주는권력을잡은 후, 그녀에게 필적할 인물은 태자 이융기 뿐이었다. 즉 나중의 당현종이다. 당시의 황제 이단은 아들 이융기와 여동생 태평공주의 사이에서 극력 쌍방 세력의 균형을 유지해주려 애썼다.
디민. 이제 막 권력의 쾌감을 느낀 태평공주는 이미 브레이크를 잡을 수 없게 된다. 그녀는 그 맛을 한껏 즐겼다.
태평공주가 여황제에 오르고 싶어했는지는 그녀가 말한 적이 없다. 후세는 그녀의 행위에서 추론해서 결론을 냈다. 즉 그녀는 모친 무측천과 올캐 위후가 천하를 호령하는 것을 보고, 또 한명의 여황제가 되고자 했던 여인이라 본다.
이는 확실하게 결론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적수, 즉 그녀가 여황제에 오르는데 방해가 되는 인물인 이융기이다. 그는 그녀가 쉽게 제거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최소한 '안사의 난' 이전까지 이융기는 부지런하게 일하는 사람이었다. 태자로 있을 때, 권력욕이 팽창하고 있는 여인 하나를 상대하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갈등이 격화되자, 결국은 무력대항이 벌어진다. 이융기는 고력사등의 도움을 받아, 일거에 태평공주세력을 제거한다. 그녀의 일당을 살륙하고, 태평공주는 종남산의 한 절로 도망친다. 3일후,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된 태펴공주는 자수한다. 그저 오빠인 당예종 이단이 그녀의 목숨만 살려주기를 기대하면서.
이때의 이단은 이미 이융기에게 황위를 넘겨주었다. 태상황에 있었다. 그러나 조정은 아직 장악하고 있었다. 그도 태평공주를 용서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당현종은 반대한다. 이융기는 이 고모를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보았다. 결국 태평공주는 집에서 사사당한다. 이제 당나라의 '여인정치간여'는 끝이 난다.
태평공주의 일생은 기이할 것도 없다. 그녀는 바로 '너무 사랑을 많이 받아 망쳐진 인물'이라 볼 수 있다. 모친 무측천은 그녀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가 결혼하기 전에 막후에서 정치에 참여하도록 한다. 결혼후에는 남편이 그녀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마음대로 음란한 짓도 벌일 수 있었다. 오빠인 이단도 그녀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는 권력이 조야를 뒤흐들었고, 야심이 팽창한다. 그리하여 이융기와 직접 대항하기에 이르렀고, 결국은 처참하게 자결하는 말로를 걷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후세인들에게 칭찬받는 일을 하나 했다. 그것은 바로 상관완아가 '당륭정변'이후 피살되자, 이단에게 권해서 상관완아의 시문을 수집하게 해서, 책으로 내게 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 '건괵재상'의 문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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