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림지청(靑林知靑)
당나라때의 황제들 중에서 이현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인물이다. 범문란(范文瀾) 선생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했다: 당중종은 당고종보다 더욱 유약하다. 이 말을 보면 범문란 선생은 이현도 무시했지만, 이치(李治, 당고종)도 멸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현은 후세인들이 "육미지황환(六味地黃丸)"으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황제일 뿐아니라, 부친, 동생, 아들, 조카가 모두 황제이다. 더더욱 불가사의하게도 그의 모친 또한 황제이다. 바로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이다. 아마도 이런 인물은 역사상 유일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의 부친과 동생 이단(李旦)도 역시 '육미지황환'이라고 말한다. 다만 만일 당나라 황제세계표를 본다면, 그가 이런 칭호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소위 "육위제황완(六位帝皇玩, 여섯명의 제황들이 가지고 놀다. 육미지황환과 중국발음이 같음)"이라는 명칭은 수양제의 황후 소씨에게 적합하다고 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현은 일생동안 무슨 두드러진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는 아주 울적한 인물이다. 평생동안 여자들의 손아귀에 쥐어 살았다. 아마도 그는 부친의 연약한 유전인자를 비교적 많이 물려받은 것같다. 게다가 그에게는 아주 강인하고 무정한 모친이 있다. 일생동안 두번 황태자가 되었다가 두번이나 쫓겨났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황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황제에 오른 후에는 자신의 포부와 재능을 펼쳐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권력을 갖고 놀기 좋아하는 처도 있었고, '원대한 이상'을 품은 딸까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결국은 독살당한다. 당연히 독살여부에 대하여는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그는 당나라의 네번째 황제이고, 당고종 이치와 무측천간의 셋째아들이다. 당나라때는 여전히 적장자계승제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의 자리는 원래 그와 관계가 없었다. 다만 그의 두 형은 모친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그리하여 그는 대당황조의 새로운 황태자에 오른다. 이어서 황제의 보좌에 오른다.
원래 황태자가 아니었던 그는 기실 아주 편안하게 살아갔다. 왜냐하면 그는 모친과 권력다툼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최소한 두 형처럼 매일 불안하게 살아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가 황제에 오른 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갑자기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으니, 그러나 한 마디 광망한 말은 그를 순식간에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가 처음 황제가 되었을 때, 실권은 모친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심복을 조직하여 무측천에 대항하려 했고, 처가의 인물들을 기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장인을 일개 참군(參軍)에서 자사(刺史)로 발탁하고, 시중(侍中, 재상)으로 승진시키려 했다.
이처럼 황당한 조치는 조정신하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유조를 받아 보정하던 대신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이 새 황제는 분노하여 소리친다. 시중 자리 하나가 뭐라고. 내가 천하를 장인에게 주더라도 안될게 뭐란 말인가!
이런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이현이 정치에 아주 유치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성격이 즉흥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광오불기(狂傲不羈)한 도련님의 입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정치가의 지혜와는 전혀 걸맞지 않는다.
이처럼 이치를 모르면 그 결과는 당연히 엄중하다. 무측천은 즉시 황제위에 오른지 2달된 그를 쫓아낸다. 신농가(神農架)로 보내 야인으로 지내게 만든다. 그는 온갖 고생을 겪을 뿐아니라, 항상 모친으로부터 그의 목숨을 거둔다는 명령이 내려올까 전전긍긍해야 했다. 예전의 그의 형 이현(李賢)의 선례도 있으니까.
그의 동생 이단(李旦)은 새로 황제에 올랐지만, 마찬가지로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모친은 동생까지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새로 황제에 올라. 무조(武朝)를 연다. 그래서 잠시동안 아무도 이현을 신경쓰지 않게 된다.
무측츤이 황제에 오른 후, 후계자가 없다는 점이 그녀의 큰 골치거리였다. 최종적으로 그녀는 다시 이당(李唐)에 돌려주기로 결정하여,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이현을 데려와 다시 황태자에 앉힌다.
15년간 '야인'으로 지내온 이현은 조정으로 돌아간 후 예전보다는 많이 고분고분해졌다. 그는 형세를 파악했고, 무씨가족들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했다. 자신의 두 딸을 무씨집안으로 시집보낸다. 그는 알고 있었다. 무씨집안과의 혼사는 그의 지위를 공고히 해줄 것이라는 것을 자신이 나중에 황제에 오르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5년후 여황의 병이 위중해진다. 장간지를 위시한 다섯 대신들이 신룡정변을 일으키고, 이현은 마침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당중종이다. 모든 것은 옛날의 당황조시대로 되돌리고, 무측천시대의 종말을 선언한다.
앞에는 두달간 황제로 있었지만, 나머지 시간은 아무런 언급할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 그는 두번째 황제위에 오른 후, 사망할 때까지의 몇년동안 제대로 된 일은 한 것이 없고, 그저 사치의 극을 달리면서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국고를 낭비했다. 개혁을 통해 큰 뜻을 펼치려는 것도 없었고, 그저 평범하게 몇년의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다.
바로 이 기간동안 그가 한 행위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혹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가 잔인했던가라고 하면 그렇지 않다. 그가 멍청했냐고 하면 어떤 때는 그가 시세의 흐름을 너무나 잘 파악했다. 그가 무정했느냐고 하자면 그는 처와 자식들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었다. 그가 여색을 탐했느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고 잘 절제했다. 한마디로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신룡정변은 오왕정변(五王政變)이라고도 부른다. 장간지 등 5명이 무측천의 통치를 끝내고 이현을 황제로 옹립한다. 큰 공을 세운 이 다섯명에 대하여 그는 처음에 왕의 작위를 봉한다. 그러나 얼마 후 모조리 타격을 가해서 하나하나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무삼사(武三思)가 뒤에서 교사했다고 한다.
무씨일족은 이씨왕조에 있어서, 옛날 여후의 여씨일족이 한나라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현이 대권을 장악한 후, 무씨일족을 정리하지 않았고, 여전히 무삼사를 위시한 전 외척집단을 중용했다. 이는 권력을 공고히할 필요때문인지 아니면 혈연때문인지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그의 이런 행위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가 고난에 처해 있을 때도 그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았던 황후 위씨(韋氏)에 대한 총애는 정말 극진했다. 그녀를 황후로 봉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이 위후는 그녀의 시어머니(무측천)처럼 권력욕이 극히 강했던 여인이라는 것이다.
이현은 몸이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위후는 조정업무를 처리하는 역할을 한다. 그녀는 조당에서 호풍환우했고, 마치 예전의 무측천이 다시 돌아온 것같았다. 무측천을 본받아 다시 한번 개조환대할지도 알 수 없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모두 일치하여 위후가 그런 생각을 품었다고 여긴다.
위후와 무삼사의 관계가 애매했다는 점에 대하여는 근거가 없다. 그녀가 남편을 따라 궁으로 되돌아왔을 때 그녀는 일찌감치 나이가 들었고, 아무리 화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주변에 미녀가 득실거리는 무삼사가 그녀에게 마음을 주었을 것같지는 않다. 이현이 두 사람의 외도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감아 주었다고 하는 것은 이현의 무능과 멍청함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억측의 성분이 더욱 큰 것같다.
이현이 역사상 외척의 정치관여가 얼마나 혼란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것을 이해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무씨집안과도 잘 지냈고, 위씨집안도 중용했다. 그리하여 역사상 보기 드물게 양대외척집단이 형성된다. 이 두 강대한 세력이 조정을 좌우했고, 원래 성격이 유약했던 이현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 자신은 황당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지만, 위후와 딸이 황당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방관했다. 그는 상관완아(上官婉兒)를 소용(昭容)으로 삼았는데, 그녀가 궁밖에 사내를 두도록 허용했다. 이는 천고에 보기 드문 기괴한 일이다. 그리고 토번의 침입에 대하여, 그는 꾹 참는다. 오히려 총애하는 양녀 금성공주(金城公主)를 화친으로 보냈다. 그리하여 대당제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하여 <신당서>에는 위후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적혀 있다. 당연히 항간에서는 그녀가 딸인 안락공주(安樂公主)와 함께 했다고 한다.
비록 정사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필자는 그다지 믿지 않는다. 위후는 이현이 뒤를 받쳐주어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 자신의 실력으로는 조정을 조종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위후는 총명하기 그지없는 여인인데, 자신에게 해로운 짓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위후와 안락공주 이과아(李裹兒)가 피살된 후, 두 사람은 '예장(禮葬)'된다. 만일 정말 독살한 일이 있다면 절대로 그런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독살설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현은 사망할 때의 나이가 55세이다. 사후에 위황후는 더욱 황당한 일을 저질렀고, 마침내 이융기(당현종)이 태평공주와 함께 위씨일파를 주살한다. 그후 이융기는 다시 태평공주까지 제거하고 자신이 황제에 오른다. 그가 바로 역사상 이런저런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오는 당현종이다. 이어서 중국은 역사상 위대한 시기를 맞이한다. 개원성세.
앞에는 모친 무측천이 있고, 뒤에는 조카 당현종이 있다. 모두 능력있는 인물이다. 그는 두 사람의 중간에 끼어 있다보니 쓸모없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무능하고 웃기는 행동으로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외에 다른 무슨 정치적 업적이 없다. 비록 사람들이 분개할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가 황제의 재목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의 일생을 보면 계속 여자들에게 쥐어 살았다. 몇몇 여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앞으로는 강인한 모친 무측천이 있고, 패도적인 여동생 태평공주도 있다. 뒤로는 광망한 처 위후가 있고, 이상천개(異想天開)한 딸 이과아가 있었다. 그는 이 네명의 여인들의 사이에 끼어서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역사상 가장 유약한 황제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는 역사상 유일하게 두번 황태자에 오르고, 두번 황제에 오른 인물이다. 비록 그는 아주 비참했지만; 다만 필자는 그의 일생에서 멍청할 뿐아니라, 사내답지 못하다는 것까지 느낄 수 있었다. 전반기는 얘기하지 않겠다. 그의 잘못이 아니니까. 그러나 후반기는 아마도 신체적인 이유때문인지, 직접 정무를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가 한 행동을 보면 어떻게 하더라도 동정심이 생기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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