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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공통)

중국역사상의 태상황(太上皇) (2)

by 중은우시 2023. 5. 1.

글: 장명양(張明揚)

 

당나라는 '태상황'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모두 4명의 태상황이 출현한다. 만일 이전 북조의 '태상황'은 모두 난세에 나타난 괴이한 산물이라면, 당나라의 몇명 '태상황'은 모두 성세지군이고, '정관지치'와 '개원성세'라는 두 번의 태평성대에 걸쳐 있다. 그리고 안사의 난을 평정한 중흥시대도 있다. 그러나 황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의 잔혹함은 도검이 난무하던 난세에 전혀 못지 않았다. 단지 태평성세시대의 권력쟁탈모델은 더욱 음성적이고 더욱 미묘하며 더욱 힘겨루기식이었다는 것뿐이다. 황권은 곡중구(曲中求)해야지 직중취(直中取)해서는 안된다.

 

이연(李淵) vs 이세민(李世民)

 

수양제를 '태상황'으로 만들었던 이연은 아마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9년후인 626년, 그도 핍박받아 '태상황'이 될 줄은. 가장 통상적인 정의로 보면, 이연은 아마도 중국역사상 최초의 '태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태상황들은 전란시대에 할거정권의 군주들이었거나,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태상황으로 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대당 무덕9년(626년) 육월, 현무문사변이 발생한다. 대권은 이세민의 수중에 떨어진다. 이연은 조서에서 그저 "오늘부터 군국사무는 대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태자에게 위임하여 처결한다. 사후에 보고하라." 단순히 2달후에, 이 새로운 권력구조는 법통적으로 확인받는다. 이세민이 등극하고, 이연은 '태상황'이 된다. 교체과정에 대하여 <구당서>와 <신당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단지 <자치통감>에는 애매모호하지만 거짓임이 분명한 내용으로  써놓았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태자에게 황위를 전하고자 했으나, 태자가 고사했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논리로 확인할 수 있다. 이세민은 암시 혹은 근신을 시켜 말하게 하거나, 심지어 모종의 암중위협을 통하여 이 '태상황'계획을 완성했다고. 부황의 체면과 자신의 효도를 유지하는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낸 것이다.

 

다만, 이연이라는 아직 실력이 남아 있는 대당의 개국황제는 어쨌든 대당의 중신 배적(裴寂)과 소우(蕭瑀)등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이씨종실과 관농귀족(關隴貴族)의 사람들 중에서 '사나이가 한명도 없을 리'는 없다. 이연의 양위는 어떤 의미에서는 시세에 순응하고, 시무를 통찰한 것이다. 승산이 없는데 굳이 흐름을 거스를 필요가 있을가. 다시 말해서, 이연은 현무문사변에서 이미 이건성(李建成)과 이원길(李元吉)이라는 두 아들을 잃었다. 그런데 왜 셋째 아들을 잃거나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전도가 어두운 궁중투쟁 내지 천하대란을 도모한단 말인가.

 

당태종은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연 재위기간의 대정방침에 대하여 대거 '발란반정(撥亂反正)'을 진행한다. 이연은 이씨종실을 중시했고, 재위기간 대거 왕에 봉하고, 심지어 고조부대의 먼친척까지도 왕위를 주었다. 그리하여 "비록 어린아이라 할 지라도 왕이 되었다. 왕이 된 자가 수십명에 이르렀다." 이세민이 집권한지 3개월만에, 몇몇 전공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이미 군왕(郡王)에 봉해진 종실들을 모조리 현공(縣公)으로 강등시켜 버린다. 그 사이의 살벌한 결단에서 황제의 태상황에 대한 존중이나 고려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이연에 있어서, 황위와 황권은 모조리 빼앗겼고, 자신이 재위할 때의 대정방침도 차례로 폐지된다. 이런 처지하에서, 다시 이 개국황제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담담하게 지내라고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연은 권력에 연연하지 않는 선을 지킨다. 거의 철저하게 대당의 정치생활에서 사라진다. 당연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시세가 그러한 것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고. 다만 중국역사상 대세를 거스른 자들이 어디 한둘이었는가.

 

전혀 과장없이 말하자면, 이연의 '태상황'생활은 심지어 황제에 하루도 올라보지 못했던 유태공보다도 못했다. 같이 권력도 세력도 없지만, 유태공은 최소한 유방의 친정(親情)을 가지고 있었다. 설사 부친이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철저하게 박탈하였지만, 그건 뭐라고 할 것은 아닌 것이다. 이세민은 이연에 대하여 그다지 효도를 다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는 정관3년의 이사에서도 그 단서를 엿볼 수 있다. 이연은 퇴위한 후, 앞의 몇년간 자신의 황궁인 태극궁(太極宮)에 머문다. 그리고 이세민은 계속 이건성이 동궁(東宮)으로 사용하던 곳에서 조정업무를 처리했다. 그러나 정관3년, 이연이 돌연 태극궁을 내놓고, 자신은 이세민이 친왕으로 있을 때의 궁전으로 옮겨간다. 

 

이에 대하여, <신당서>의 기록은 매우 간략하다. "정관3년, 태상황이 대안궁(大安宮)으로 옮겨서 거주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번 이사의 진상은 <자치통감>에 밝혀놓았다. 정관6년, 어사(御史) 마주(馬周)는 돌연 당태종에게 상소를 올린다. 대안궁은 황궁과 비교하면 '비소(卑小, 격이 낮고 작다)'하니, 반드시 대거 공사를 벌여 '중외지망(中外之望)'에 부합되게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이미 국내외에서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으로 당태종에게 태상황의 문제가 많은 거주상황을 중시해달라고 청한 것이다. 마주는 심지어 이때 바깥에 피서를 가 있는 당태종을 직접 공격하기도 한다: "태상황은 아직 더위 속에 있는데 폐하는 혼자 시원한 곳에 거처하십니까." 당태종에게 하루빨리 회궁하여 '사람들의 의혹을 해명하라'고 요구한다. 천하에 어디 아들은 시원하게 지내면서, 아버지는 더운 곳에 살게할 수 있단 말이냐. 네가 황제라도 그건 안된다.

 

당태종이 간언을 잘 받아들이는 흉금을 가졌다고 감탄하는 동시에, 엿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정치생활에서 철저히 배제되었을 뿐아니라, 이연은 가장 기본적인 '거주생활'마저도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이고, 대당의 사대부들도 이에 대하여 이세민에게 원망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궁을 옮긴 정관3년, 이연을 우울하게 만드는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이연은 퇴위한 후 당시의 옛신하들과 만나서 술을 마시고 얘기하는 것으로 정신적위안을 삼았다. 그중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배적이다. 배적은 이연이 퇴위한 후에 기본적으로 허수아비가 되었지만, 정관3년, 당태종은 돌연 요승(妖僧)과 내왕했다는 모호한 이유를 내세워 그를 파직하고 고향집으로 내려가게 했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당태종은 배적의 장안에 남게 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면서 '태상황'까지도 비판한다. 그 내용은 아주 각박하다: 배적 너같은 이런 수준으로, 오늘날의 관직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니, '태상황'이 집권할 때의 여러가지 정치적 난상은 모두 너 배적의 책임이었다. 내가 너를 처분하지 않고, 너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만 해도 괜찮은 대우이다."

 

너무 심하다. 여기까지 봤다면 아마도 책상을 치면서 일어났을 것이다. 호삼성(胡三省,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사람)이 수백년전에 일찌감치 분기탱천한 바 있다. "태상황이 황상의 이 말을 들었다면, 그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이세민이 배적을 빌어 '태상황'을 비판한 이 몇 마디 말은 바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부

황이 예전에 대당을 통치할 때 엉망진창이었다. 내가 그것을 따지지 않고 그저 궁전만 옮기게 하고 말년을 보낼 수 있도록 해는 것만 해도 상당히 잘 해주는 것이다.

 

태상황의 이때 마음이 어떠했을까? 사서에는 아무런 단서를 남겨놓지 않았다. 아마도 이연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배적도 없고, 옛황궁도 없고, 앞으로 누구와 얘기해야 한단 말인가.

 

정관4년, 역사상의 대사건이 한 건 벌어져서, 이연으로 하여금 전년의 우울함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태상황'과 황제의 얼음장같은 관계에도 전기가 생긴다. 이 해에 대당은 여러 해동안 싸워왔던 숙적 돌궐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다. 강력한 돌궐이 당군의 공격하에 와해되어 버린 것이다. 마지막에는 힐리칸(頡利可汗)까지도 포로로 잡아 장안으로 끌고 온다. 이 일을 들은 이연은 확실히 옛날 진양에서 거병한 초기에 돌궐에 칭신해야했던 굴욕적인 옛일을 떠올렸을 것이다. 기뻐하면서 이렇게 개탄했을 것이다: 옛날 유방이 흉노에게 백등산에 포위되었던 일을 시종 설욕하지 못했는데, 오늘 내 아들이 돌궐을 멸망시키다니 옛날의 치욕을 크게 갚았구나. <자치통감>은 이연의 아주 관건적인 한 마디를 기록하고 있다: "내가 제대로 일을 맡길 사람을 찾은 것이구나. 앞으로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가국천하의 대국면하에서 이연은 마침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옛날에 퇴위당한 원한은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겠다. 아들이 나라의 원수를 갚아주었구나.

 

이어지는 장면은 이전에 부자간에 서로 마음이 떠나있던 묘사와 크게 달라진다. <자치통감>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태상황이 황상과 귀족신하 십여명 및 여러 왕과 비를 불러서 능연각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술이 거나하게 되었을 때, 태상황이 스스로 비파를 타고, 황상은 일어나 춤을 춘다. 공경들은 연이어 장수무강을 기원하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난다." 부자간에 함께 즐겁게 마신 것이다. 태상황은 비파를 타고 황제는 춤을 춘다. 두 사람 사이의 마음의 앙금이 모두 사라진 것같다.

 

황제와 태상황의 관계는 신속히 회복된다. 사서에는 돌연 황제가 여러번 사냥을 한 후에 사냥물을 태상황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정관6년 십월, 부자관계는 다시 한 단계 올라간다. <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 출순(出巡)에서 돌아온 당태종과 장손황후는 이연의 침궁으로 많은 예물을 보낸다. 그후 집안연회를 베푸는데, "밤이 깊어서야 끝났다." 마지막에는 당태종이 직접 이연의 수레를 끌겠다고 말한다. 이연이 그건 적절하지 않다고 보아. 태자에게 대신하도록 시켰다.

 

대당의 국운이 창성하면서, 황실의 단합도 최고조에 이른다. 아들과의 관계도 점점 좋아지면서, 이연은 정치생활로도 일부 돌아왔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정관8년 삼월, 이연은 서돌궐사신에게 연회를 베풀 때 돌연 감개무량해하면서 말한다: "지금 만이(蠻夷)가 복속하는데 옛날에 없던 일이로다." 당태종은 그 말을 듣고 울면서 부황에게 술을 바친다. 그리고 공로를 이연에게 돌린다. 그리하여 이연의 자존심을 크게 만족시켜준다. <책부원귀>에는 이 장면을 아주 느끼하게 기록했다. 장손황후가 당시 직접 이연의 머리를 빗기고 모자를 씌웠으며, 이연이 백발인 것을 보고는 탄식하며 '지존께서 나이가 드셔서 머리카락이 모두 하얘지셨구나'라고 말하고 당태종은 다시 그녀와 함께 통곡을 한다. 이런 따스한 장면은 마치 민간에서 몇대가 함께 사는 모습같다. 연회에 참가했던 대신들은 '모두가 속으로 기뻐했다.'

 

그리고 역시 정관8년, 이연은 다시 그에게 익숙한 열병장으로 돌아온다. 옛날 금과철마(金戈鐵馬)의 세월을 다시 느낀 것이다. "고조가 직접 시찰하며, 장병의 노고를 치하하고 돌아왔다." 이연은 열병에 참석한 후 크게 기분이 좋아져서 궁중에서 모든 3품이상의 관리들이 참가하는 성대한 연회를 베푼다. 그 자리에서, "고조(이연)은 돌궐 힐리칸에게 춤을 추라고 명하고, 다시 남월 추장 풍지대(馮智戴)에게는 시를 읊으라고 했다." 그 장면은 아주 성대했다. 이연은 이때 아주 유명한 말을 남긴다: "호월일가(胡越一家), 자고미지유야(自古未之有也)"(오랑캐와 남월과 일가를 이룬 것은 자고이래로 없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태상황의 스타일에 익숙한 당태종은 즉시 그 말을 받아서 자신은 어려서부터 태상황으로부터 교육을 받아 오늘날이 있게 되었다고 하면서, 천하를 평정한 공로를 "이는 어찌 신의 지혜와 능력때문이겠습니까. 모두 태상황의 가르침때문입니다." 이 주연도 한밤중까지 계속된다.

 

이연과 이세민이 화해하는 과정을 보면, 대당성세가 화해의 가장 큰 요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부자간에 4차례에 걸친 성대한 연회중 3번은 '사방의 오랑캐가 복속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연의 각도에서 보자면, 아들이 그가 돌궐에 칭신했던 굴욕을 갚아주었고, 대당성세는 개국황제인 그에게는 영광이 되고, 신하들과 당태종은 공로를 자신에게 양보한다. 이는 이연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민감한 급소이다. 이세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당성세는 자신감을 극도로 강화시켰고, 부친을 만났을 때도 옛날 현무문사변때처럼 난감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더욱 관건적인 것은 황위가 공고해져서 이미 아무도 무너뜨릴 수없게 되었고, 더 이상 부친을 위협으로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이는 그로 하여금 갈수록 부친에게 더욱 완화된 정치생활공간을 부여한 이유일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부자관계를 돈독하게 만들어주게 된 것이다. 태평성대의 앞에서, 많은 정치적인 갈등은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최소한 깊이 묻혀버렸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만일 당태종의 재위기간동안 사방에서 변란이 일어나고, 내정이 불안하였다면, 태상황과의 관계에서 어떤 미묘한 변화가 발생했을까? 조정의 정치세력은 또 어떻게 변화했을까? 태상황의 옛신하들은 복벽을 도모하지 않았을까? 황제는 선제공격이 낫다고 생각하여 후환을 제거하려고는 하지 않았을까?

 

나는 정말 아주 밝은 이야기로 이들 부자간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끝맺고 싶다. 그러나, 사료는 나의 이런 선량한 계획을 파괴시켜 버린다.

 

정관9년 오월, 이연은 70의 고령으로 붕어한다. 그의 9년에 걸친 태상황으로서의 생활을 끝낸 것이다. 처음에, 당태종은 유방의 장릉(長陵)의 규격으로 부친의 '헌릉(獻陵)'을 조성하려 했다. 그러나 공기가 촉박하여, 방현령(房玄齡)의 건의하에 한나라 광무제 원릉(原陵)의 규격으로 바꾸게 된다. 즉, 봉토를 9장에서 6장으로 낮춘 것이다. 이는 원래 별 게 아니다. 그러나 위징(魏徵)은 이 황제집안의 그저 알아차리기만 할 뿐 말로 꺼낼 수는 없는 집안일을 들춰내 버린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이연이 붕어한 다음 해(정관10년), 장손황후도 사망한다. 그녀의 소릉(昭陵)의 규모는 헌릉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슬픔에 잠긴 당태종은 궁안에 2개의 높은 대를 세워서 멀리서 볼 수 있도록 한다. 한번은 당태종이 위징을 불러 함께 높은 대에 올라가서 소릉을 바라본다. 그러나 위징은 고의로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당태종은 소릉의 방향을 가리키면서 위징에게 말한다. 그때 위징은 대담하게 한 마디 꺼낸다. "신은 폐하께서 헌릉을 보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단(李旦) vs 이융기(李隆基)

 

당예종(唐睿宗) 이단은 아주 특별한 '태상황'이다. 중국 태상황계의 '다면수(多面手)'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영역에 걸쳐 있다. 이단은 당고종 이치와 무측천의 아들이다. 무측천시대에 괴뢰황제경력(684-690)이 있다. 나중에 먼저 핍박을 받아 모친에게 '양위'했고, 모친이 죽은 후에 다시 형인 당중종(唐中宗) 이현(李顯)이 즉위(705)한다. 이단이 이 기간동안에 취한 태도는 한 글자 "양(讓, 양보)"이었다. 모친에게 양보하고, 형에게 양보하고, 그런 '양보'로 여러번의 정치적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 있었다. <자치통감>의 말로 하자면, '상왕(相王, 이단을 가리킴)은 관후공근(寬厚恭謹)하며, 안념호양(安恬好讓)했다. 그리하여 무(武, 무측천), 위(韋, 위후)의 시대에도 난을 피할 수 있었다."

 

당중종이 붕어한 후, 이단은 아들 이융기의 지지하에 병력을 이끌고 위후의 난을 진압한다. 그리고 710년 육월 두번째로 황제에 오른다. 정치적인 보답으로 이융기도 원하는 바에 따라 대당의 황태자가 된다. 더욱 큰 정치적 문제가 이어서 발생한다. 이단의 여동생인 태평공주와 태자 이융기간에 격렬한 권력투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단은 심지어 여동생의 도발하게 한때 태자를 폐위시킬 생각까지 하였다.

 

712년 칠월, "혜성이 서방에 출현한다." 태평공주는 술사를 파견하여 이단에게 이런 말을 전하게 한다: "천상에 변화가 있습니다. 이는 옛것을 없애고 새것이 펼쳐진다는 것을 예견하는 것입니다. 황태자가 아마도 황제가 되려할 것입니다." 태평공주의 원래 뜻은 오빠를 도발하여 태자를 경계하거나 폐위시키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농교성졸(弄巧成拙)이라고 이단은 돌연 "전덕피재(傳德避災), 오지이결(吾志已決)"(덕을 전해 화를 피하겠다. 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이라고 하면서 퇴위하기로 결정한다. 이융기는 그 말을 듣고 급히 입궁하여 배알하며 충성심을 나타내며 황위를 거절한다. 이단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천하는 모두 네가 나를 도와서 얻어낸 것이다. 지금 하늘의 뜻이 이러하니, 너는 따로 의심할 것이 없다." 가장 수준높은 말을 바로 이 말이다: "너는 효자인데, 하필 관짝 앞에서 즉위해야겠느냐?"

 

태평공주는 이때 대국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오빠에게 만일 반드시 퇴위하겠다면, 그래도 '정무는 직접 챙겨야 한다'고 말한다. 어쨌든 이융기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이단의 원래 뜻은 모든 것을 내놓고 물러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동생이 그렇게 권하자 그는 마음을 바꾸어 이융기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짐이 비록 황위를 넘겨주지만, 어찌 나라와 국가를 잊을 수 있겠느냐. 군국대사는 마땅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단이 내놓은 권력분배방안은 이러했다: 3품이하 관리의 임명은 이융기가 결정한다. 3품이상 관리의 임명은 이 '태상황'이 직접 관장한다. 그외에 매 5일마다 태극전에서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는다. <신당서>는 이에 대하여 아주 간단하지만 더욱 직접적인 말을 썼다. 황제는 "작은 일을 듣고(聽小事)", 태상황은 "큰 일을 듣는다(聽大事)"

 

첫부분에 말했던 것처럼 이단은 간단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태상황'이다. 만일 그가 권력욕이 크다고 말하려면, 그는 일생동안 황위를 처음에는 모친, 두번째는 형, 세번째는 아들에게 양보한다. 만일 그가 유약하다고 말하려면, 그는 여동생과 아들간에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때 과감한 결단력으로 퇴위함으로써 쾌도난마식으로 해결해버린다. 만일 그가 '퇴양보신(退讓保身)'의 정치적 권모술수를 잘 썼다고 말하려면, 그는 이미 '태상황이 되기로 결정해놓고 다시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나중의 궁중정변의 화근이 된다.

 

이단이 '태상황'이 된 후에도, 태평공주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융기와의 정치투쟁은 갈수록 심해졌다. 이는 아마도 '태상황'이 정치적 균형을 이루려는 의도에 맞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경우 그저 듣기만 하고 이들간의 싸움을 방치했다. 당시 조정의 7명 재상 중에서, 태평공주파에 속하는 사람이 5명(재상임명은 '태상황'의 권한이었다)이었다. 713년, 즉 이융기가 등극한 다음 해, 태평공주와 이융기는 마침내 정치적 최후대결을 펼친다. 이해 칠월, 이융기는 이미 고모가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정보를 획득한다. 그리하여 하루전날 선수를 써서 상대의 세력을 일망타진한다. 마지막에는 태평공주마저도 자결하는 최후를 맞이한다.

 

태상황에 이써서, 이는 군사정변이나 다름없다. 비록 몇권의 정사에서는 이 일에 대하여 가급적 감추려 하고 있지만, 후세의 사가들이 기본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당시 이단은 분명 어느 정도 정치적 혹은 군사적 압력을 받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단의 당시 처지는 증조부 이연이 현무문사변이후의 처지와 아주 비슷한 점이 있었다. 마지막에는 스스로 모든 것을 양보하고, 기정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난다. 설득력있는 하나의 간접증거는 이러하다. 궁중정변 다음 날, 이단은 모든 정치적 실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한다. "오늘부터 군국정형(軍國政刑)은 모조리 황제가 처리한다. 짐은 무위양지(無爲養志)하며 '소심(素心)'을 추구하겠다." 그리고 그날로 황궁인 태극궁을 떠난다. 이날부터 이단은 진정 그가 원래 생각했던 완전히 물러난 '태상황'으로 지내게 된다.

 

이때부터, 태상황은 철저히 대당의 정치생활에서 사라진다. 사실상, <구당서>와 <신당서>의 <예종본기>에는 이것을 기록하는 것이 마지막인 것처럼 썼다. 태상황의 완전히 물러난 생활에서 유일하게 안심되는 점이라면, 그가 아주 '조용하고 좋은 세월을 보냈다(歲月靜好)'는 것이다. 황제도 아주 효도를 다했다. 일찌기 '태상황'을 모시고 대명궁으로 피서를 간 적도 있다. 개원4년(716년) 육월, 이단은 다시 3년의 태상황생활을 지낸 후 붕어한다.

 

홍매(洪邁)는 <용재수필>에서 이단을 당나라때 4명의 태상황중 가장 좋았다고 평가했다. "오직 예종만이 하늘의 경고를 두려워하고, 성실한 마음을 유지했다." 이 점을 조익에게 인정받았다. 다만 이단이 퇴위할 때 잠시 권력에 연연하는 결정을 하게 된 것이 '태상황'으로서 한가지 오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익이 말했던 것처럼, "그러나 태평공주가 주살당한 다음 날, 모든 권력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이는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태평성세 군주의 부친으로서, 역사는 이연과 이단에게 원래 공평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태상황'들의 'pre-성세'의 정치적업적도 상당한 것이다. 그러나 왕왕 아들들의 정치적 업적이 워낙 휘황하다보니 그들은 거기에 가려질 수밖에 없다. 더더욱 어쩔 수 없는 것은 권력을 양위한 것이 그들에게 도덕적우위를 부여해야 하는데, 성세의 앞에서 그러한 것들은 무기력할 뿐이다.

 

이융기(李隆基) vs 이형(李亨)

 

이융기와 같은 일대웅주는 그의 부친이나 그의 후계자에게 행운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당숙종(唐肅宗) 이형에 있어서, 태자시대의 경력은 악몽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전정긍긍함면서 언제 화가 닥칠지 모른다는 위기 속에서 살아야 했다. 사실상, 이형이전의 태자 이영(李瑛)은 모함을 받은 궁중정변에서 두 동생과 동시에 피살된다. 하루에 아들을 셋이나 죽인 사람이 바로 이융기이다. 그는 황권에 도전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용서가 없었다. 이는 천고일제들의 공통된 품성이다. 한무제, 당태종, 청태조, 청성조가 모두 그러했다. 혹은 참살하거나 혹은 연금했다.

 

이형같이 공포 속에서 음울하게 성장한 태자에게 있어서 무슨 부자간의 정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건 바로 '태상황' 자신이 조성한 업보이다.

 

천보14년(755년) 십일월, '어양격고동지래(漁陽擊鼓動地來, 어양의 북소리가 땅을 뒤흔들며 다가온다)'. 안사의 난이 발발했다. 다음 해 육월, 이융기는 장안을 벗어나 마외역에 도착했을 때 유명한 '마외지변(馬嵬之變)'이 발생한다. 당현종은 절망속에서 할 수 없이 양옥환(楊玉環, 양귀비)을 사사한다. 이형이 마외지변에서 어떤 작용을 했는지는 아주 의심스럽다. 비록 사서에서 아무런 증거를 찾아낼 수는 없지만, 그가 막후조종자중의 한명으로 볼 이유는 많다. 겨우 한달만에(756년 칠월), 이전에 이미 부친과 길을 나누었던 이형은 영무(靈武)에서 스스로 등극을 선포하고, 이융기를 '태상황'으로 봉한다. 그날 사신을 사천으로 보내 신임 '태상황'에게 통보한다.

 

이융기가 그 소식을 들은 후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한 것은 지금 알 수가 없다. 정사의 기록은 마치 심의부서에서 여러번 검열을 거친 것같다.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기록은 이융기가 시류를 깨닫고 고분고분 '태상황'으로 옮겨앉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조서에 남긴 한 마디는 의미심장하다: "양경(장안과 낙양)을 수복하면, 짐은 편안하게 말년을 보내겠다" 여기에 숨은 의미는 만일 황제(당숙종)이 안록산의 손에서 장안과 낙양을 수복하지 못한다면, 그가 가만히 말년을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게 들어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의 에피소드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44년전, 중서사인(中書舍人) 가증(賈曾)이 당예종을 위해 '전위책문(傳位冊文)'을 썼는데, 44년후, 당현종의 전위책문은 가증의 아들인 가지(賈至)가 썼다는 것이다. 당현종은 이때 탄식을 금치 못하면서 가지에게 말한다: "두 황제의 성전이 경의 부자 손에서 나왔구나. 실로 보기 어려운 일이로다." 가지는 당현종의 앞에 엎드려 울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그러나, 이형의 운은 괜찮은 편이었다. 황제가 된 다음 해(757년), 망국직전까지 갔던 전쟁국면이 완전히 역전된다. 이 해 구월, 곽자의(郭子儀)는 이미 장안과 낙양을 수복한다. 이형은 이어 사람을 사천으로 보내어 '태상황'을 장안으로 모셔온다. 이때의 이형은 자신만만했다. 하루빨리 옛날 그에게는 고산앙지(高山仰止)했던 개원천자에게 부황이 잃었던 경성을 아들이 되찾아왔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해 십이월, 부자는 함양에서 다시 만난다. <자치통감>에는 이 상봉장면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융기는 아들을 보고서는 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이형은 부친이 다리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이융기는 아마도 그가 예전에 했던 약속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는 황포를 한 벌 꺼내서 직접 아들에게 입혀준다. 이형의 당시 반응은 절을 하며 사양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다시 태자로 돌아가고, 황위는 다시 당현종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평생 정치를 해오고, 또한 자신의 부친과 정치적 수완을 써온 당현종은 당연히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형에게 말한다: "천수(天數), 인심(人心)이 모두 너에게 있다. 짐은 그저 말년을 편하게 보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너는 효도를 다하는 것이 된다." 태상황의 이때 한 말은 말 속에 뼈가 있었다. 이형은 자연스럽게 그의 결심을 받아들인다.

 

곧 장안에 도착했고, 그 과정에서 부자간의 정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이융기가 식사를 하면, 이형이 먼저 맛을 보고, 이융기가 수레를 타면, 이형이 직접 수레를 몰았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태상황'은 감탄했다: 내가 50년간 황제로 있었는데, 이렇게 영광스러운 적이 없었다. 지금 황제의 부친이 되고보니 영광스럽기 그지없구나. 이융기의 이 말은 절반만 들으면 된다. 안사의 난을 겪은 이융기는 이미 마음이 죽었다. 황권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고, 그저 영예를 누리면서 말년을 보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다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명백하게 과장된 말은 확실히 황제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이다. 극력 자신은 '태상황'의 자리를 기꺼이 즐겁게 받아들일 것이니, 아들은 안심해도 된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이융기는 장안으로 돌아온 후 황궁을 양보하고 자신은 엣날 태자로 있을 때 지내던 흥경궁(興慶宮)으로 들어간다. 이융기의 이때 태상황으로서의 생활은 그가 처음에 계획했던 것처럼 조정에 대하여는 관심을 두지 않고 마음편안하게 있었을 것이다. 흥경궁은 시장에 이웃해 있었기 때문에, 태상황은 자주 백성들과 같이 즐기곤 했다. 매번 그가 길거리에 붙어 있는 장경루(場慶樓)에 나타날 때면, 항상 장안의 사람들이 절을 하면서 만세를 높이 외치곤 했다. 이융기는 그리하여 자주 궁인들에게 장경루 아래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변사람들을 불러서 먹고 마시게 했다. 그뿐아니라, 태상황은 자주 옛날의 신하들과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서 연회를 베풀면서 술을 마시며 개원시대의 옛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가장 이융기를 기쁘게 하는 두 가지 일은 이러했다: 하나는 많은 믿을 수 있고, 가까운 사람들이 주변이 있다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환관 고력사(高力士), 용무대장군 진현례(陳賢禮), 딸 옥진공주(玉眞公主), 궁녀 여선원(如仙媛). 그리고, 그를 조사(祖師)로 모시는 이원제자(梨園弟子);' 또 다른 것은 천륜의 즐거움이었다. 비록 아들과의 관계는 미묘하지만, 조익의 말을 빌리면 "일당유오천자(一堂有五天子)"였다. 아들 당숙종, 손자 당대종(唐代宗), 증손 당덕종(唐德宗), 중손 당순종(唐順宗)이 모두 그의 곁에 있었다. 오세동당(五世同堂). 이는 민간이든 황실이건 모두 인간세상의 큰 즐거움이다.

 

만일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난다면, 이융기의 '태상황'생활은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년여동안의 좋은 시절을 보낸 후, 이보국(李輔國)이라는 환관이 출현하면서 모든 것이 끝난다.

 

이보국은 당숙종이 가장 신임하는 환관이었고, 권력이 조야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경력이 많은 고력사와 진현례는 그를 무시했다. 이를 원한으로 여긴 이보국은 당숙종에게 밀고한다. 태상황이 흥경궁에 거주하면서, 하루종일 외부의 대신들과 가까이 지낸다. 특히 고력사, 진현례 두 사람은 폐하를 몰아내기 위해 일을 꾸미고 있다. 지금 옛날 영무에서 거병했던 병사들이 모두 불안해 한다.

 

<자치통감>의 견해에 따르면, 당숙종은 그 말을 듣고 크게 통곡한다. 그리고 '태상황'이 다른 마음을 품을 것이라고는 절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보국은 이때 역사상 또 한번의 대표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그는 당숙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태상황은 분명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곁에 있는 소인배들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폐하는 천하의 주인으로 사직을 생각해서 분란은 미연에 방지해야 합니다. 어찌 일개 필부의 효도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필자가 보기에 이는 홍콩영화에서 나오는 대사처럼 웃기는 말이다: "나는 비록 너를 죽이고 싶지 않지만, 내 총이 불을 뿜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해줄 수는 없다."

 

이어서 이보국은 당숙종이 분명하게 반대하지 않자, 직접 병간(兵諫)한다. 760년 칠월, 이보국은 당숙종의 명의로 "교조(矯詔)" 즉 조서를 위조하여 태상황에게 황궁으로 와서 구경하도록 청한다. 그후 500명의 칼과 도끼를 든 병사를 보내 중도에 당현종 일행을 포위한다. 그리고 황제께서는 흥경궁이 너무 습기가 많아도 여겨 그에게 태상황의 이사를 도와주도록 분부했다. 태상황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한다.

 

비록 암중으로 싸우는 일은 많았지만, 이처럼 적나라하게 병간한 일은 태상황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자치통감>은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그래도 이융기의 체면을 어느 정도 살려준다. 오백명의 칼과 도끼를 든 병사들이 황제위 위엄에 억눌려서 병기를 거두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으며, 이보국의 기세도 크게 꺾였다는 말을 추가한 것이다. 다만 필자는 단지 결과를 강조하고자 한다. 이융기는 결국 이사를 했고, 떠나기 전에 이런 멋진 말도 남긴다: "이곳은 나의 용흥지지(龍興之地)이다. 나는 일찌감치 떠나려 했다. 다만 황제가 계속 원치 않아서 그러지 못했는데, 이제야 내 뜻을 이루게 되었구나."

 

<자치통감>은 이형의 체면을 더욱 크게 살려준다. 하나는 이형은 이번 병간을 몰랐다고 적은 것이다. 이보국이 '교조'했다고 한다(이는 항상 써먹는 이유이다). 나쁜 짓은 모두 딴 사람이 했다. 둘은 당숙종이 나중에 소위 영무거병에 참여했던 여러 장병들의 압력때문에 할 수 없이 '태상황'의 이사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너는 이 말을 믿는가? 나는 믿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이융기가 고력사에게 한 말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내 아들이 보국에게 속아넘어가서, 끝까지 효도를 다하진 못하는구나." 잘 보았지 않은가. 그건 '속은 것'이고 조서는 '위조'한 것이다.

 

이융기에 대하여 가장 큰 타격은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한 후에 그의 말년에는 가장 가까웠던 몇몇 사람들 고력사, 진현례와 옥진공주등이 모조리 그의 곁에 없었다는 것이다. 고력사는 가장 비참하여 유배를 간다. 이번에는 '교조'라는 이유조차 대지 않았다. 그후, 이형은 다시 100여명의 궁인을 봅아 '태상황'의 곁에 둔다. '태상황'은 이미 외톨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태상황의 마지막 2년간의 생활에 대하여 이형은 아마도 마음 속으로 미안했던 것같다. "사방에서 바치는 진귀한 것은 모조리 먼저 태상황에게 드렸다." 그후 이융기는 이때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먼저 고기를 끊는다. 그저 채식만 한다. 나중에는 아예 "벽곡(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선언한다. 그러다보니 신체상황이 갈수록 나빠진다.

 

<명황잡록>을 보면, 이융기의 마지막 세월동안 자주 이백의 <괴뢰(傀儡)>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각목견사작노옹(刻木牽絲作老翁) 나무를 깍고 실을 매어서 노인인형을 만들었다.

계피학발여진동(鷄皮鶴髮如眞同) 주름진 피부와 하얀 머리카락은 진짜같구나.

수유농파적무사(須臾弄罷寂無事) 잠깐 가지고 놀고나니 조용하니 아무 일도 없다

환사인생일몽중(還似人生一夢中) 마치 인생은 꿈과 같아라.

 

<장한가>의 묘사에 따르면 양귀비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762년 사월, 태상황은 고독하게 죽는다. 향년 78세였다.

 

그리고 십삼일이 지나서 당숙종 이형도 붕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