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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35

설회의(薛懷義): 무측천의 수석남총 글: 나걸(羅杰) 어떤 사람은 무측천이 남총(男寵)을 둔 것은 심리적인 필요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생리적인 필요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두 가지 모두라고 말한다. 역사연표로 보자면, 당고종 이치(李治)는 홍도원년(683년)에 사망했다. 이해에 무측천은 61세이다. .. 2010. 9. 21.
당고종의 진정한 사인(死因)은? 글: 예방육(倪方六) 당나라는 중국고대의 가장 휘황한 시기중 하나이다. 당태종 이세민은 중국역사상 보기드문 능력있는 황제였다. 당태종 이세민이 없었더라면 당나라의 휘황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걸출한 제왕이 만성중독으로 죽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당서. 태종본기3>&.. 2008. 9. 17.
당태종의 아들들 당태종은 아주 능력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자식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당태종 이세민에게는 14명의 아들이 있다. 관례에 따르면, 장남은 태자로 삼고, 나머지 아들들은 왕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세민 자신이 적장자가 아니었고, 이로 인하여 아들들은 모두 황제의 지위를 탐하게 되었다... 2007. 6. 22.
당태종의 후계자 선정 배경 만년의 당태종에게 가장 골치아픈 문제는 태자문제였다. 정관17년 4월, 이승건(李承乾)이 태자위에서 폐위되었다. 이후 태자가 될 자격을 지닌 사람은 장손황후의 또 다른 두 아들이었다. 바로 위왕(魏王) 이태(李泰)와 진왕(晋王) 이치(李治)였다. 두 사람을 비교하자면, 이태의 조건이 훨씬 뛰어났다. .. 2007. 5. 23.
건릉(乾陵, 측천무후, 당고종의 합장묘)에 얽힌 이야기 (2) 건릉은 도굴된 적이 있는가? 1960년, 몇몇 농민이 폭약으로 돌을 깨다가, 부주의로 무척천의 묘도입구를 깬 적이 있다. 이 묘도입구는 참으로 국가의 절대기밀사항이었다. 도굴군들이 천여년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고, 황소(黃巢)가 40만대군을 시켜 수년을 팠지만 파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 2006.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