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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당고종의 진정한 사인(死因)은?

by 중은우시 2008. 9. 17.

글: 예방육(倪方六)

 

당나라는 중국고대의 가장 휘황한 시기중 하나이다. 당태종 이세민은 중국역사상 보기드문 능력있는 황제였다. 당태종 이세민이 없었더라면 당나라의 휘황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걸출한 제왕이 만성중독으로 죽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당서. 태종본기3>>(권3)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정관23년(649년) 사월, "황상께서 함풍전(含風殿)에서 붕어하시다. 나이 52세였다". 기록이 아주 간단하다. 이세민의 구체적인 사인에 대하여 전통적인 견해는 이질(痢疾)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자치통감. 당태종정관십구년>>(권198)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645년, 이세민은 친히 고구려를 정벌하러 갔다. 십이월초칠일, 몸에 종기가 나서, 말도 탈 수 없을 정도였다. 할 수 없이 사람들이 가마에 태워서 들고 옮겼다. 1주일후에 병세가 악화되어, 그를 따르던 태자인 이치(이후 당고종)가 친히 종기의 고름을 입으로 빨았다. 그러자 조금 좋아졌다.

 

일반적으로 단약(丹藥)을 복용하면, 몸에 종기가 잘 난다. 도가(道家)에서는 이것이 바로 단약이 독을 배출하는 효능을 보여주는 표시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독증상이다. 나중에 중독사한 당선종 이침(李)도 같은 증상을 나타냈다.

 

이번 정관19년의 고구려정벌로 이세민의 몸은 정차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후 궁중에서 몸조리를 하였는데, 병세는 좋아지다가 다시 나빠지곤 했다. 이전에 이세민은 단약에 대한 미신이 있었다. 일찌기 몇몇 도사들을 불러서 그에게 불사약을 제조해주도록 하였다. 병이 위급하면 아무 의사나 찾는 법이다. 건강이 악화된 이세민은 더더욱 단약에 의지하게 된다.

 

정관22년(648년), 서쪽정벌에 나섰던 당나라군대는 천축에서 온 방사(方士)를 하나 붙잡았는데, 그의 이름은 나이사파매(那邇娑婆寐)였는데, 스스로 이미 200살을 살았다고 주장했고, 장생불로의 술법을 익혔다고 했다. 이세민은 아주 기뻐했다. 그는 융숭한 예의를 갖추어 궁궐안에 모셔놓고 불로장생약을 제조하게 해주었다. 이를 통하여 "양선단(洋仙丹)", 일명 "호승약(胡僧藥)"을 얻고자 하였다.

 

이세민은 병부상서 최돈례에게 그가 '불사약'을 만드는 것을 감시하게 시켰다. 그리고 천하에 명을 내려 기이한 약재나 돌을 모으게 했는데, 그 숫자가 부지기수였다. 1년의 시간을 들여서 드디어 '양선단'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세민이 몇 알을 먹었는데도 전혀 효험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할 수없이 나이사파매를 풀어줘서 인도로 되돌아 가도록 놓아주었다. 그런데, 죽기전까지 이세민은 중국 도사들이 만든 '토선단'을 먹고 있었다. 결국 52살만에 만성중독으로 죽은 것이다.

 

당나라(618-907)는 중국역사상 가장 중요한 왕조의 하나이다. 그리고 중국봉건시대의 전성기로 공인된 시대이기도 하다. 다른 왕조의 제왕과 비교하자면, 당나라황제들은 불로장생에 대한 욕망이 가장 강렬했다. 그런데, 이런 '불로'의 욕망은 결국 '속사(速死)'의 결과를 낳게 되니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이세민이 죽은 후, 태자인 이치가 즉위한다. 그가 바로 중국역사상의 당고종이며, 유명한 무측천의 남편이다.

 

이치는 34년간 재위했다. 그러나 그는 몸이 계속 좋지 않았다. <<구당서. 고종본기>>(권6)에는 "황제는 현경이후 풍질로 고통이 심했다. 조정백관이 올린 글을 모두 천후에게 위임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현경은 이치의 연호이다. 656년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가 황제가 된지 겨우 7년만이다. 즉, 683년 단약중독으로 사망할 때까지 당나라조정은 27년간 무측천이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무천천이 나중에 권력욕이 그렇게 강했고, 당나라를 빼앗아 주나라로 바꾸기까지 한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이시기에 실질적인 황제노릇을 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자신의 만성적인 어지럼증(풍질)을 치료하고, 불로장생을 위하여 이치는 장생술을 깊이 믿었다. 널리 방술, 도술을 지닌 무리를 불러모았고, 단약을 제련하게 하였다. 손사막(孫思邈), 섭법선(葉法善)은 이 시기에 유명한 도사이고, 이치가 궁중으로 불러서 단약에 대하여 물어보기도 하였다.

 

한번은 한꺼번에 도사를 백여명이나 불ㄹㅆ다. 2,3년내에, "화황금치단(化黃金治丹)"을 만들게 하였는데, 엄청난 돈을 들였다. <<구당서. 섭법선전>>(권191)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당시 섭법선은 이치에게 이렇게 말한다: "금단은 만들기 어렵습니다. 헛되이 재물을 낭비할 수 있고, 정치를 소홀히 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짜와 가짜를 잘 가리셔야 합니다" 이치는 섭법선의 건의를 받아들여, 섭법선으로 하여금 이들 방사를 면법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90여명의 방사가 모두 가짜라는 것이 드러나서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나중에, 이치는 당시에 유명한 연단명가인 반사정(潘師正), 유도합(劉道合)을 궁으로 불러서 연단을 만들게 한다. 반사정과 유도합은 모두 은사(隱士)였고, 유도합은 "지우술(止雨術, 비를 그치게 하는 술법)"에 능하였다. 한번은 이치가 그에게 의란전의 앞에서 솜씨를 보이도록 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얼마지나지 않아 비가 멈췄다.이치는 이를 계기로 유도합을 숭배하게 된다.

 

<<구당서. 유도합전>>(권192)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고종은 도합에게 명하여 환단을 만들게 하였고, 단약이 완성되자 황상에게 올렸다" 유도합은 함형연간(670년)에 죽었다. 나중에 유도합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유도합의 제자가 관을 열어보니, 유도합의 시신은 그저 껍데기만 남았고, 등뒤에 갈라진 틈이 있었다. 마치 매미가 껍질을 벗은 것과 비슷했다. 사람들은 모두 유도합이 신선이 된 후에 시신이 껍데기만 남았다고 말했다. 이치는 이 말을 듣고는 아주 불쾌해 했다. 유도합에게 단약을 만들라고 했더니 자기가 먹고는 신선이 되어서 가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도합이 신선이 되었으므로, 이치는 그가 바친 단약을 더욱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하여 복용량을 늘였다. 결국은 급성중독에 이르게 되고, 동도 낙양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서안으로 되돌아가서 눈을 감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때였다.

 

죽기전에 이치는 조금만 더 살기를 바랐다: "창생들이 기뻐하지만, 나의 병은 위독하구나. 천지신명이 나에게 한두달의 목숨만 더 준다면, 장안으로 돌아갈 수 있고, 죽어도 여한이 없으련만..."

 

위에서 언급한 당태종 이세민, 당고종 이치의 두 황제외에도 당헌종 이순, 당목종 이항, 당무종 이염, 당선종 이침등의 황제들이 선단을 복용하여 중독되어 목숨을 잃었다.

 

단약의 성분을 분석해보면, 당태종 이세민이 복용한 인도인이 만든 "호승약"이건, 아니면 당고종 이치가 믿은 본토 도사 유도합이 만든 "환단환(還丹丸)"이건, 모두 강장제성분이 들어 있다. 이러한 '불로약'은 실제로 체력을 바닥내는 약방문이다. 현대의 비아그라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처음에 복용할 때는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후궁비빈을 맞을 때 물만난 고기같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골치아파진다. 중독되고 정력이 고갈된다.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당나라때의 제왕들은 이른 독약을 금단(金丹)이라고 불렀고, 죽을 때까지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당나라의 황제들은 왜 그렇게 멍청했을까? 사실 멍청한 것은 아니다. 조상과 도교에 대한 이중숭배의 결과인 것이다.

 

개국황제인 이연은 혁혁한 농서귀족가문의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농서는 지금의 감숙성 동남부, 내몽고북부일대이다. 당나라황실가문의 족보를 보면 한무제때의 비장군 이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씨가족은 이광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가장 뛰어난 후손은 16대손인 이고인데, 그는 서역의 유명한 서량국(西凉國)을 세웠다.

 

당나라가 건립된 이후, 이세민등 황제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고, 역사서적을 뒤져서 이씨성을 가진 인물을 찾았다. 결국 찾아낸 이씨성의 유명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이담(李聃)이다. 이담은 그리하여 이씨의 시조가 된다.

 

이담의 자는 백양(伯陽)이고 초나라 고현 뇌향(하남성 녹읍) 사람이다. 춘추시기에 공자와 나란히 이름을 날린 대사상가로 보통 노자(老子)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노자의 사상은 "무위(無爲)"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가치관의 핵심은 "도(道)"이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자연을 본받는다"는 '도"의 이론은 나중에 도교의 지도사상이 된다. 그리하여 노자는 도교의 창시자로 숭상된다.

 

무덕3년(620년), 당고조 이연은 이담을 시조로 모신다. 그리고 그의 조상이 거주하던 곳인 녹읍에 토목공사를 벌여서 궁전과 도관을 짓는다. 오래지 않아, 당태종 이세민은 영을 내려 <<대당씨족지>>를 만드는데 여기서 정식으로 그를 조상으로 받들게 된다. "짐의 본계는 주하(柱下)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주하"는 노자를 지칭한다. 당고종 이치에 이르러, 노자를 태상현원황제로 추존한다. 당현종 이융기에 이르러서는 도교를 널리 전파하고 동경,서경과 각주에 현원황제묘를 만들게 한다. 노자는 이때부터 태상노군(太上老君)이 된다.

 

도교에는 "도술"이 있다. 방중술을 숭상하고, 양생을 중시하며, 장생불노약을 믿는다. 소위 "외단" "내단"이라고 한다. 노자는 이씨 당나라황실에서 이렇게 존중받았고, 도교는 당나라의 국교가 된다.

 

이후 도술이 유행하면서 당황실은 단약을 좋아했고, 사생활이 황음하고 방종하게 되었다. 무측천의 남편인 당고종 이치의 진정한 사인이 무엇인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