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당태종)

당태종의 후계자 선정 배경

중은우시 2007. 5. 23. 20:12

만년의 당태종에게 가장 골치아픈 문제는 태자문제였다. 정관17년 4월, 이승건(李承乾)이 태자위에서 폐위되었다. 이후 태자가 될 자격을 지닌 사람은 장손황후의 또 다른 두 아들이었다. 바로 위왕(魏王) 이태(李泰)와 진왕(晋王) 이치(李治)였다. 두 사람을 비교하자면, 이태의 조건이 훨씬 뛰어났다. 먼저 그는 장손황후의 둘째 아들이다. 이치보다 9살이나 많았다. 당태종은 그를 매우 총애했으며, 그를 위하여 왕부에 문학관을 두고 여러 현인학사를 초빙했었으며, 하사품도 심지어 태자였던 이승건보다 많이 내렸다. 그리고 종종 이태를 태자로 세우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이승건을 태자위에서 폐한 후에도 이태를 세우겠다는 뜻을 여러번 밝힌 바 있다. 이치는 장손황후의 셋째 아들이고, 당태종의 아홉째 아들이다. 나이로 보나 부자간의 정으로 보나, 모두 열세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외삼촌인 장손무기(長孫无忌)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다.  장손무기는 진왕 이치를 태자로 올리도록 강력히 건의한다. 이태와 이치는 모두 장손무기의 외조카들인데, 장손무기는 왜 태종이 총애하는 이태를 버리고, 이치를 태자로 세우려 한 것일까? 여기에는 개인적 감정만이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인 배경도 있다.

 

당태종의 통치후기에 장손무기는 조정에서 권력이 가장 컸다. 태종의 사후에 이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장손무기는 미래의 황제 즉 오늘의 태자를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말을 잘 듣는 외조카로 세우고 싶어했다. 이렇게 하여야 자기도 존중받고 권세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왕 이치는 성격이 유약하여 그가 극력 지지할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위왕 이태는 달랐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기 그지없고, 시문도 잘 지었으며 어른이 된 후에는 경전을 좋아하고 지리학에도 뛰어났다. 정관 11년부터 문학관에서 선비들을 받아들였고, 문무관리들이 속속 문하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이태는 재주를 믿고 공손하지 않았으며, 상급관리들도 눈에 두지 않았다. 문제는 외삼촌인 자기의 지지를 받으려고 전혀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장손무기는 이태가 황제가 되면, 중용되는 것은 그 자신의 동료들이지, 절대로 자신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태가 태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두 아들이 싸우는데, 한쪽은 재주가 뛰어난 이태이고, 다른 한쪽은 유약하고 능력이 모자라는 이치이다. 이치대로라면, 이태를 태자로 세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당태종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태집단의 주요 구성원은 공신의 자제였다. 그들은 조상의 음덕을 입어 고위관직에 있고, 방탕하고 사치했다. 그리고 이태를 황제로 올리면서 스스로 원로를 쫓아내고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치의 지지자들은 장손무기를 위시한 원로중신들이었다. 그 중에는 이적(李績), 저수량(楮遂良)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장손무기는 당나라의 개국공신이면서 당태종의 좌명대신이다. 정관정치의 충실한 집행자이다. 당태종은 자기가 죽은 후에 정관정치가 그대로 계속되기를 바랐다. 이렇게 하려면 장손무기등 원로대신의 보좌가 필요했고, 절대로 이태의 수하에 있는 고관자제들이 아니었다. 이때문에 그는 할 수 없이 이치를 태자로 삼은 것이다. 이치가 유약했고, 자기와 같지 않았으므로, 당태종은 이치를 태자로 삼은 후에도 생각이 자주 흔들렸다. 한번은 장손무기에게 태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밝히기도 하였다. 이때 대상은 오왕(吳王) 이각(李恪)이었다. 그러나 장손무기의 반대에 부딛친다: "진왕은 인자하고 후덕합니다. 치세를 유지할 좋은 왕입니다. 바둑돌을 들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결국 지게 됩니다. 하물며 태자의 일에서야 더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태종은 어쩔 수 없이 태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다시 접게 된다. 임종전에 이치를 보좌하는 중임을 장손무기와 저수량에게 맡긴다.

 

장손무기는 있는 힘을 다하여 이치로 하여금 황위를 계승하게 하였으니, 이치가 바로 당고종이다. 고종의 즉위후, 즉시 장손무기를 태위로 삼고, 검교중서령, 지상서, 문하이성사를 겸하게 한다. 장손부기는 지상서성사를 사직하지만, 여전히 태위와 중서문하삼품을 맡게 된다. 당고종의 즉위초기에, 실제로 정사를 돌본 사람은 장손무기였다. 장손무기는 당태종의 유훈을 충실히 따르고, 계속하여 정관정치를 집행한다. 균전령을 관철하여 사회경제는 더욱 발전하였다. 시부로 선비를 뽑아 진사과의 인선을 늘였고, 통치기반을 확대했다. 친히 <<당률소의>>를 편찬하여 전국에 반포한여, 정관법제를 완비한다. 그리고 서돌궐의 반란을 진압하여, 당왕조의 통일을 공고히 한다. 특히 당태종이 만년에 중단시킨 휴양생식정책을 집행하여, 장기간 고려와의 전쟁을 끝낸다. 이리하여 민심을 얻게 된다. 고종통치조기 즉 영휘원년에 당나라는 정치, 문화, 법률, 군사의 각방면에서 정관시기보다 더욱 발전하게 된다. 이리하여 역사가들에 의하여 영휘지치(永徽之治)라는 칭송도 받는다. 이러한 성과는 장손무기의 충심어린 보좌에 힘입었고, 고굉대신들의 합심협력이 낳은 결과이다. 특별히 고명대신인 장손무기와 저수량의 두 사람의 노력이 컸다. 당고종은 두 사람을 아주 존중하였다. 특히 장손무기에 대하여는 그가 한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