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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성74

이자성은 왜 북경성을 점령한지 41일만에 패퇴했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1644년, 대명숭정17년(대순영창원년) 정월초하루, 이자성은 서안에서 정식으로 건국하고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하고, 연호를 영창(永昌)이라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은 자성(自晟)으로 개명하고, 서안을 서경(西京)으로 개명한다. 1644년 일월, 이자성은 동정에 나선다. 삼월 십칠일 양로의 군대가 북경성 아래에 결집하고, 십구일 북경성을 함락시킨다. 숭정제 주유검은 매산(현재의 경산)에서 스르로 목을 매어 자살한다. 이렇게 명왕조는 멸망한다. 이자성은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장병들에게 상을 하사했다. 명나라의 관리들에게서는 대거 재물을 긁어모안다. 그리고 우금성(牛金星)등과 등극대전을 준비하고, 신왕조의 통치질서를 건립한다. 나중에, 사월 이십이일 청군과 오삼계가 이자성의 .. 2020. 8. 22.
청초(淸初)의 체발역복(剃髮易服)과 메이지(明治)의 산발탈도(散髮脫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글: 범인모사(凡人摸史) 어떤 친구가 인터넷에 이런 의문을 올린 바 있다: "왜 청나라초기의 체발역복 얘기를 꺼내면 네티즌들은 의분강개하면서, 현재 서방사회의 헤어스타일은 왜 아무 말없이 받아들이는가?" 이것을 설명하자면 우선 두 마디 말이 필요하다: 새조차도 푸른 하늘을 그리워하고, 새장에 갇혀 있기를 원치 않는다. 자유는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의 결론을 이끌어내자면 우리는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말은 이것이다: "유두불유발(留頭不留髮), 유발불유두(留髮不留頭)" 머리를 남기면 머리카락을 없애야 하고, 머리카락을 남기려면 머리가 잘려야 한다. 실제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다. 현재 청나라 궁정드라마에 나오는 머리.. 2020. 7. 13.
장안(長安)은 왜 서안(西安)으로 개명했는가? 글: 장금(張嶔) 중국고대도시발달사에서 하나의 큰 사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장안개명(長安改名)'이다. 명나라 홍무2년(1369년), 명나라의 북벌군이 관중평원을 점령한다. 그해 삼월 명태조 주원장은 정식으로 조서를 내려, 천년이상의 수도역사를 지닌 고도 장안에 지금까지 사용되는 새 이름을 부여한다: 서안. 비록 이번 '개명'에 대하여 후세에는 여러 논쟁이 있고, 심지어 어떤 아마추어역사가는 불평불만을 쏟아내며 '고도장안'의 격을 떨어뜨리게 된 것이 이번 개명으로 인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상, 반대로 이 고도가 다시 한번 화려한 변신을 이룬 것이 바로 이 개명으로 인해서이다: 파괴된 '구도(舊都)'에서 서북의 '중진(重鎭)'으로 변신한 것이다. 후세인들이 그리워하는 당나라의 장엄한 장안성은 당나라말기부터.. 2020. 7. 2.
남명(南明)에 기회는 없었을까? 글: 구어정(九魚亭) 주체(朱棣, 영락제)는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예비방안을 마련해 두었다. 북방은 어쨌든 리스크가 큰 곳이다. 그래서 남경에 온전한 행정조직을 보류해둔 것이다. 육부육과(六部六科)를 모두 갖추었다. 남명에 괜찮은 지도자만 있었더라면, 그 효율은 북경에 못지 않았을 것이다. 남명이 판세를 뒤집을 기회도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회는 항상 스쳐지나가 버렸다. 송고종이 건염남도(建炎南渡)할 때, 그는 1인황제라 할 수 있었다. 병사도 없고 장수도 없다. 그리고 금나라군대에 이리저리 쫓겨다녔다. 그에게서 제왕의 존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조구(趙構)는 결국 안정적인 정권을 수립한다. 그리고 점차 역량을 모아서 금나라와 대치한다. 조구는 비교적 능력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가 .. 2020. 6. 26.
이성동(李成棟): "항명(降明) - 항청(降淸) - 재항명(再降明)", 두 황제를 죽이고, 가정삼도(嘉定三屠)를 일으킨 도살자 글: 만풍모우(晩風暮雨) 명나라말기, 한 무리의 충신양장(忠臣良將)이 배출된다: 예를 들어 사가법(史可法), 소관생(蘇觀生), 이정국(李定國), 정성공(鄭成功), 진방언(陳邦彦), 왕흥(王興)등이 있다. 동시에 한 무리의 난신적자(亂臣賊子)도 배출된다. 예를 들어, 이영방(李永芳), 퉁양성(佟養性), 오삼계(吳三桂), 전겸익(錢謙益), 공유덕(孔有德)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 양자의 중간에 있다. 그들은 '이익'을 쫓았다. 하는 행위는 모두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명나라에 공도 있고 과도 있어, 간단하게 충신, 간신으로 나누어 평가하기 어렵다. 그 중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성동이다. 1. 귀순명조(歸順明朝) 이성동은 자가 정정(廷楨)이고, 호는 호자(虎子)이.. 2020. 6. 3.
숭정제 최후의 삼일. 글: 문재봉(文裁縫) 숭정17년(1644년) 삼월 십칠일 숭정제가 자신이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자성(李自成)은 공성을 명령한다. 일시에, 이자성의 대군이 북경성을 맹공하기 시작한다. 명군과 생사를 건 결전이 시작된 것이다. 한바탕 전투가 끝난 후, 숭정제가 가장 신임하는 대태.. 2020. 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