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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이자성)

이자성은 왜 북경성을 점령한지 41일만에 패퇴했을까?

by 중은우시 2020. 8. 22.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1644년, 대명숭정17년(대순영창원년) 정월초하루, 이자성은 서안에서 정식으로 건국하고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하고, 연호를 영창(永昌)이라 한다. 그리고 그 자신은 자성(自晟)으로 개명하고, 서안을 서경(西京)으로 개명한다. 1644년 일월, 이자성은 동정에 나선다. 삼월 십칠일 양로의 군대가 북경성 아래에 결집하고, 십구일 북경성을 함락시킨다. 숭정제 주유검은 매산(현재의 경산)에서 스르로 목을 매어 자살한다. 이렇게 명왕조는 멸망한다.

 

이자성은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장병들에게 상을 하사했다. 명나라의 관리들에게서는 대거 재물을 긁어모안다. 그리고 우금성(牛金星)등과 등극대전을 준비하고, 신왕조의 통치질서를 건립한다. 나중에, 사월 이십이일 청군과 오삼계가 이자성의 군대를 격패시킨다. 이자성은 황급히 도망치고, 사월 삼십일 북경에서 도망친다. 이자성은 북경을 떠나기 진에, 그가 명왕조를 대신하여 천하의 정통지위를 가졌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월 이십구일 무영전에서 황급히 등극대전을 치른다. 그리고 7대의 조상을 황제로 추봉한다. 그후 황궁에 불을 지른다.

 

삼월십구일에 북경에 진입한 후, 사월 삼십일 떠날 때까지 전후로 모두 41일간 베이징에 머물렀다. 그렇다면 이자성은 왜 패퇴해야 했을까?

 

이자성은 북경에 진입한 후, 오삼계를 귀순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면 당연히 청나라와 담판을 해야 했다. 왜냐하면 청나라는 명나라를 주요 적으로 보고 있었고, 이자성은 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친구로 보았다. 숭정16년(1643년), 홍타이시는 그의 장수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다: "만일 유구(流寇, 이자성의 농민군을 가리킴)를 만나면, 마땅히 이렇게 말하라. 너희는 명나라의 조정이 문란한 것을 보고 격분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냐. 우리가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도 역시 그것때문이다. 좋은 말로 그들을 대해주고, 병사들에게 절대로 한두명을 잘못 죽여서 서로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일 그들이 사신을 보내 짐을 만나고 싶어하면, 그 사신을 데리고 오라!" 이때 농민군은 이미 중원의 강대한 정치역량으로 성장해서 더 이상 경시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자성이 서안에 진입한 후, 숭정17년(1644년) 정월, 청나라에서는 사람을 보내 국서를 가지고 섬서로 농민군을 찾아가게 한다. 그리고 예의를 차려서 말한다: "짐은 공등과 산과 물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성을 함락시켰다는 명성을 들었다. 칭호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겠다. 이 점으로 개의치 말기를 바란다. 이렇게 글을 보내는 것은 그대와 힘을 찹쳐서 중원을 취한 후, 함께 천하를 얻고 부귀를 함께 하자는 것이다.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사신에게 글을 써서 빨리 보내주기를 바란다."(<치서거명지제수서고(致西據明地諸帥書稿)>). 여기서 명확히 농민군과 같이 협력하여 명왕조를 무너뜨리고, '부귀를 함께 하자'고 하였다. 이는 천하를 양부하자는 것이다. 혹은 농민군은 중원을 차지하고, 청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자는 것이다. 도르곤이 오삼계의 서신을 받았을 때도 이런 말을 했다: "지금까지 명나라와 우호적으로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번 글을 보냈다. 명나라의 황제와 신하들은 나라가 어지럽고, 군민이 사망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회신한 적이 없다. 우리가 세번 병력을 보내 진공한 것은 명나라의 관리, 군민들에게 알게 하고 싶었다. 명나라의 황제가 우리와 우호인 관계로 통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는 설명한다. 청나라는 항상 중원조정과 우호관계를 맺고 싶어했었다.

 

그래서, 이자성이 북경으로 진입한 후, 그들과 의화(議和)했어야 했다. 이를 통해 청군이 남하하여 그들과 쟁탈전을 벌이게 되는 일을 막아야 했다. 이렇게 하면 시간을 벌 수 있고, 자신들이 응전준비를 할 수도 있었다. 이자성은 북경에 진입한 후, 그저 재물을 긁어모으고 등극대전을 진행하는데만 열중했다. 근본적으로 이 문제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래서 산해관에 도착한 후, 오삼계와 청군에게 협공을 당했을 때 어쩔 줄을 몰랐고, 대패한 후에 도망쳐와야 했던 것이다.

 

산해관전투때 이자성은 오삼계가 청병을 불러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대패하고 황급히 북경으로 도망쳐와야 했던 것이다. 북경은 명나라의 수도이다. 농민반란군이 여러 해동안 힘들게 싸운 것은 바로 명나라의 수도를 점령하고,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새 왕조를 건립하기 위해서였다. 수도는 국가 사직의 상징이다. 천하정치의 중심이다. 정치적으로 보건 군사적으로 보건, 마땅히 지켜야 했다. 명군은 북경을 굳게 지켰고, 청군은 겨우 주변을 노략질하고 돌아가야 했다. 청군은 야전에는 능하지만, 공성전에는 약했다. 이번에 이자성이 만일 북경성을 굳게 지켰더라면, 청군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혹은 이자성군에 패배하여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순은 북경의 국면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왜냐하면 청군의 이번 출동은 원래 탐색전의 성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승리하면 좀더 얻어내고, 실패하면 돌아가서 실력을 보존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이자성의 대순왕조는 중원의 주인이 이미 되어 있었다. 이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투항한 명나라관리와 북경백성은 모두 새주인이 새로운 치국방략을 내놓아 인심을 안정시켜주길 바랐다. 그러나 이자성은 그런 정책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급속히 북경에서 빼앗은 재물을 거두어서 서안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렇게 북경을 청군에 던져주었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자성이 명군의 수중에서 북경을 빼앗은 후, 청군에 넘겨준 것이다. 청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삼계의 잘못이아니라, 이자성이 스스로 북경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이자성이 십여년간 분투해서 얻어낸 것이 이번의 실수로 모조리 잃어버리게 된다.

 

이번에 청나라는 원래 명나라를 정벌하려 했는데, 중간에 오삼계의 요청을 받고, 병졸 한명 다치지 않고 산해관을 차지한다. 이는 중원으로 진입하는 통로를 얻은 것이다.  

 

산해관전투이후, 이자성은 북경성에서 황급히 도망친다. 청병은 병졸한명 다치지 않고 북경을 점거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청병에게 의외의 승리였다. 모두 이자상의 잘못된 정책으로 청병이 이득을 얻은 것이다. 청병이 이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청나라의 총사령관 도르곤이 임기응변으로 그 기회를 잡은 탓도 있다. 그는 용감하게 진격하는 정책을 취했다. 당시 이자성의 모사인 이암(李巖), 우금성, 송헌책(宋獻策)은 모두 이자성이 산해관으로 가는 것을 말렸다. 마땅히 북경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삼계에 대하여는 여전히 정치적인 이익을 주면서 유인하고, 그의 부자를 제후에 봉하는 방식으로 투항하게 하면 되고, 무력으로 정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혹은 일부 병사만 보내면 되지, 이자성이 직접 나설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송헌책은 더욱 직접적으로 말했다. "황야가 가면 황야가 불리하고, 삼계가 오면 삼계가 불리하다." 이자성이 만일 그들의 정확한 의견을 들어 북경을 지키고 있었더라면, 아마도 형세의 필요에 따라 농민군의 과격한 정책을 수정할 수 있었고, 결과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이는 당시의 역사는 여러가지 선택이 있었는데, 선택의 실수로 결국 불리한 결과를 맞이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명왕조, 이자성, 청의 3자간 투쟁의 역사 속에서 '이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철칙은 없다. 관건은 삼자간에 각자 어떻게 기회를 잡고, 정확한 전략을선택하느냐에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고, 향후 중원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숭정제같은 경우 강퍅자용, 자작총명하며 신하의 말을 듣지 않고, 체면만 중시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져야할 책임을 지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말을 여러번 뒤집어 여러번의 유리한 기회를 놓쳤다. 이자성은 북경을 점령한 승리에 도취해서, 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시기를 놓친다. 그저 하루빨리 황제에 오르고 싶었다. 그리고 황제에 오르기만 하면 천하가 귀순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산해관전투후에는 다시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북경을 도망쳤다. 손에 들어왔던 승리를 스스로 버린 것이다. 서안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만사대길이라 여겼는데, 그것은 황당한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