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숭정제)

숭정제 최후의 삼일.

중은우시 2020. 2. 27. 15:54

글: 문재봉(文裁縫)


숭정17년(1644년) 삼월 십칠일


숭정제가 자신이 제안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자성(李自成)은 공성을 명령한다.

일시에, 이자성의 대군이 북경성을 맹공하기 시작한다. 명군과 생사를 건 결전이 시작된 것이다.

한바탕 전투가 끝난 후, 숭정제가 가장 신임하는 대태감(大太監) 조화순(曹化淳)은 겁을 먹고 창의문(彰義門, 지금의 북경성 광안문)을 열고 이자성에 투항한다. 이렇게 하여 이자성의 대군은 순조롭게 북경성의 외성(外城)에 진입할 수 있었고, 북경성의 내성(內城)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설명이 필요할 것같다. 명나라때 경성(京城)은 모두 3중의 성벽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즉 자금성을 호위하는 황성(皇城), 북경성을 호위하는 내성, 내성의 남쪽에 절반만 수리하고 나머지는 수리를 마치지 못한 외성.


외성과 내성의 규모는 지금의 북경성 이환로(二環路)이다. 가정(嘉靖)연간, 몽골인을 막기 위하여, 황제는 명을 내려 외성을 건축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남쪽의 외성이다. 그 결과 성벽을 절반 정도 지었을 때, 경비가 없어서 공사가 중단되고 만다. 그리하여 북경성의 외성은 성벽이 절반밖에 없었다.


당시, 이자성의 대군이 광안문으로 북경에 진입했는데, 그들은 이때 외성을 함락시켰을 뿐이다. 여전히 내성과 황성도 함락시켜야 했다. 그래야 숭정제의 면전에 다다를 수 있다.


당연히, 적군이 자신의 눈앞에 다가오기 전에, 숭정제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삼월 십팔일


적군의 포화 속에서 불면의 밤을 보낸 후 숭정제는 마지막 조회(朝會)를 소집한다. 회의에서, 숭정제는 실의에 빠져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모두 함께 봉선전(奉先殿)으로 가서 끝내자(죽자)"


봉선전은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조상들의 면전에서 자살한다는 것은 비록 조상들에게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존엄은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신하들의 침묵 속에 숭정제는 그 생각을 포기한다. 그는 여전히 살 길을 찾으려 했다.


그날, 숭정제는 자신의 마지막 "죄기조(罪己詔, 황제가 스스로에게 죄가 있다고 반성하는 내용의 조서)"를 반포한다. 그는 자신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는데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불합리한 향은(饗銀) 예를 들어, 요향(遼饗), 초향(剿饗), 연향(練饗)등의 징수를 중지할 것을 선언한다.


동시에 숭정제는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려, 이자성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사면한다. 그리고 모두 이자성을 죽이고, 조정의 풍성한 하사를 받으라고 독려한다(관민중 이자성을 생포하는 사람에게는 대대로 제후를 봉하겠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런 말로는 스스로의 심리를 위안하는 외에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이날 이자성은 북경의 내성을 맹공한다. 선무문, 정양문, 조양문의 수비군은 싸우지도 않고 궤멸한다. 모조리 깃발을 내걸고 투항한다. 그날 저녁, 이자성의 대군은 순조롭게 북경의 내성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황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웅위무비한 자금성이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숭정제에게 남겨진 시간은 이미 얼마 남지 않았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이 최후의 순간에, 숭정제는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번 버텨보려고 한다. 그는 자살순국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적군에 투항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경성을 돌파하여 남쪽으로 도망칠 것을 생각한다.


당시 숭정제는 한 무리의 태감을 이끌고 자금성을 빠져나갔고, 전후로 제화문과 안정문까지 간다. 포위망을 돌파할 기회가 있을지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포위망을 돌파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숭정제는 실망하여 자금성으로 되돌아온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이제 후사를 정리할 시간이 된 것이다.


숭정제는 후궁으로 돌아간 후, 모든 처첩과 자식들을 불러모은다. 그리고 함께 마지막 저녁식사를 즐긴다.


이 마지막 만찬때, 숭정제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3명의 아들을 보고는 눈물이 비처럼 흐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세 아들에게 낡은 옷을 입혀주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늘, 너희는 아직 황자(皇子)이다. 내일, 너희는 평민백성이다. 날이 밝은 후, 너희는 자신의 신분을 잊어라. 난세에 이름을 숨기고, 행적을 들키지 말라. 노인을 만나면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젊은이를 만나면 '백부숙부'라고 불러라. 다른 사람들 문인, 군인, 관ㄹ드을 만나면 각자의 칭호를 불러라. 조심해서 잘 구별해서 불러야 하며, 잘못 부르면 안된다. 만일 살아남는다면, 부모의 복수를 해달라. 짐이 오늘 한 말을 잊지 말라."


숭정제 부자의 이 장면에 대하여 어떤 사학자는 시를 한 수 지어서 이별의 고통을 읊었다.


영익명매기막고(影匿名埋氣莫高)

금종소한타봉호(今從霄漢墮蓬蒿)

전면의대심동계(纏綿衣帶心同繫)

진중몽진일포포(珍重蒙塵一布袍)


이 장면은 정말 탄식이 절로 난다.


숭정제가 그 말을 마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눈물을 비오듯 흘린다. 말을 마치고, 숭정제는 사람을 시켜 3명의 황자를 궁밖으로 내보내 그들의 외조부의 집으로 가게 한다. 성밖에 있는 성국공(成國公) 주순신(朱純臣)이 그들을 돌봐 난을 피하게 하도록 한 것이다.


동시에 숭정제는 마지막 성지를 내린다; 문무백관들은 태자행재(太子行在, 즉 주순신의 집)에 집합하여, 주순신의 지휘를 받으라. 이는 임종 탁고(託孤)라 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대신들이 이미 다 도망쳐서, 이미 이 성지를 집행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세 황자를 내보낸 후, 숭정제는 술을 마시고 남은 처자식들에게 말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가야 한다" 너희도 이제 죽을 때가 되었다는 말이다.


숭정제는 먼저 주황후에게 말한다: "대사가 끝났으니, 그대는 천하의 어미로서 음독하는 것이 좋겠다!"


숭정의 부인 주황후는 명문출신이고, 사서에는 그녀를 본 사람은 모두 "어지러워 스스로를 가누지 못했다(瞑眩不自持)"라고 했으니, 그녀는 아주 예쁜 여인이었던 것같다.


주황후는 숭정제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낳았고, 부부간의 애정은 아주 좋았다.


황제로부터 은총을 많이 받은 것은 물론이고, 주황후는 일대현후(一代賢后)라 할 만했다. 그녀는 숭정제를 보좌하는 동안, 한번도 조정에 간여한 적이 없고, 친정사람을 위하여 사적인 이익을 추구한 적도 없다. 오히려 숭정제에게 여러번 합리적인 건의를 내놓았다.


예를 들어, 국가가 위난에 빠졌을 때, 주황후는 완곡하게 황제에게 말한다. 우리는 남경에도 집이 있다. 시간을 내서 한번 가보면 어떻겠는가? 이것은 바로 황제에게 하나의 핑계거리를 주는 셈이다. 그에게 남경으로 천도하기를 권유한 것이다. 당연히 이 건의를 황제는 전혀 듣지 않는다. 오히려 주황후를 욕했다. 그녀에게 다시는 조정에 간여하지 말라고. 주황후는 놀라서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주제로 돌아와서, 황제로부터 자신의 생사에 대한 결정을 들은 후, 주황후는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숭정제에게 울면서 말한다: "나는 시집온지 18년이 되었고, 원망도 후회도 없다. 만일 내가 전에 말했던 것을 들었더라면, 오늘날 사직이 함께 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죽으라면 죽겠다. 나는 아무런 유감도 없다."


아들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부친치고, 남편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부인이다....그렇다.


이 말을 마치고, 주황후는 조용히 자신의 침궁인 곤녕궁으로 가서, 3척의 백릉(白綾, 흰색비단)을 대들보에 매어 자결한다.


황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후, 숭정제는 비빈들을 압박하여 그녀들로 하여금 자살순국하도록 명한다. 그의 말을 듣는 비빈들은 모두 자결한다; 순국을 원치 않는 비빈들은 숭정제가 칼을 들어 저 세상으로 보내버린다. 일시에 후궁에는 핏물이 곳곳에 흘렀고, 인간지옥으로 변한다. 처첩들을 죽인 후, 숭정제는 자신의 두 딸을 핍박한다. 그는 소인공주(昭仁公主), 장평공주(長平公主)가 자살하지 않는 것을 보자, 울면서 그녀들에게 말한다: "누가 너희를 불행하게 제왕의 집안에 태어나도록 했단 말인가" 말을 마치고 자신의 두 딸을 칼로 벤다.


소인공주는 그 자리에서 죽었지만, 장평공주는 팔로 칼을 막아서, 팔 하나가 잘리고 혼절한다.


숭정제는 두 딸이 핏물 속에 쓰러져 있고, 처첩들이 모두 대들보에 목을 맨 것을 보자 만족하여 떠난다. 그는 자신의 심복 태감 왕승은(王承恩)을 데리고, 마지막 장소로 간다.


숭정제의 최후는 조금 있다가 얘기하기로 하고, 먼저 장평공주에 대하여 얘기하기로 하자.


이자성이 경성에 진입한 후, 장평공주가 아직 살아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그녀를 구해준다. 5일간 치료한 후, 장평공주는 다시 살아난다. 살아난 후 이자성은 그녀를 주규(周奎)의 집에 머물도록 안배한다.


청군이 중원에 진입한 후, 장평공주는 순치제에게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도록 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순치제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숭정제가 직접 정한 부마 주현(周顯)과 혼인하도록 명한다. 이렇게 하여 자신이 '전왕조의 후손을 잘 대해주었다'는 이미지를 남기려 한다. 그 결과 결혼후 다음 해에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장평공주는 우울하게 세상을 떠난다. 죽었을 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18세였다.


요즘 드라마 영화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은 장평공주가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녀는 '독비신니(獨譬神尼)'로 불리며 위소보(韋小寶)를 제자로 거두었다고 여긴다.


기실 소설은 소설이고, 역사는 역사이다. 이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역사상의 장평공주는 무공은 전혀 할 줄도 몰랐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주제로 되돌아가서, 후사를 안배하고, 죽일 사람은 모두 죽인 후, 숭정제는 자신의 마지막 장소로 간다. 그는 왕승은을 데리고 자금성 뒤의 매산(煤山)으로 간다. 지금의 경산(景山)이다. 이곳에서 그는 마지막을 보낸다.


경산은 고대 북경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북경성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숭정제는 만감이 교차했고, 눈물이 비오듯 흘렀다.


십칠년전, 그는 항성으로 들어왔다. 소년득지(少年得志), 의기풍발(意氣風發)했었다. 그는 17년간 재위했고, 여정도치(勵精圖治), 근정절검(勤政節儉)했다. 스스로 대명을 중흥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결과는 각종 천재, 인재로 대명왕조는 중흥을 맞이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의 손에 망국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그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삼월 십구일 


새벽, 숭정제는 경산 위의 수황정(壽皇亭)에 도착한다. 그는 손가락을 깨물어, 자신의 의삼(衣衫)에 최후의 유조(遺詔)를 남긴다:


"짐이 등극한지 17년, 세번이나 하늘의 벌을 받아 오랑캐에게 세번이나 함락당하고, 역적이 경사로 쳐들어오게 되었다. 여러 신하들이 짐을 망친 탓이다. 짐은 선황을 지하에서 뵐 면목이 없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다. 적이 짐의 시신을 마음대로 처리하라. 문관은 모조리 죽일 수 있지만, 능침을 파괴하지 말고, 나의 백성은 한 사람도 상하지 말아달라."


이는 존엄있는 군주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 이는 또한 책임을 미루는 군주가 남긴 마지막 탄식이다. 글 쓰기를 마친 후, 숭정제는 왕승은과 함께, 그 구부러진 나무로 걸어가서 자신의 최후를 맞이한다. 모든 것은 끝나는 법이다...


숭정17년 삼월 십구일 즉 1644년 4월 25일, 숭정제는 사망한다. 매산의 나무에 목을 맨다. 향년33세이다. 그의 자결과 함께, 대명왕조는 276년이 끝나고, 역사가 된다. 사람들이 탄식하여 마지않는 기억으로 남는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은 대순국의 개국황제 이자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