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금(張嶔)
중국고대도시발달사에서 하나의 큰 사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장안개명(長安改名)'이다. 명나라 홍무2년(1369년), 명나라의 북벌군이 관중평원을 점령한다. 그해 삼월 명태조 주원장은 정식으로 조서를 내려, 천년이상의 수도역사를 지닌 고도 장안에 지금까지 사용되는 새 이름을 부여한다: 서안.
비록 이번 '개명'에 대하여 후세에는 여러 논쟁이 있고, 심지어 어떤 아마추어역사가는 불평불만을 쏟아내며 '고도장안'의 격을 떨어뜨리게 된 것이 이번 개명으로 인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상, 반대로 이 고도가 다시 한번 화려한 변신을 이룬 것이 바로 이 개명으로 인해서이다: 파괴된 '구도(舊都)'에서 서북의 '중진(重鎭)'으로 변신한 것이다.
후세인들이 그리워하는 당나라의 장엄한 장안성은 당나라말기부터는 '장안고도(長安古都)'가 되고, 기실 오랫동안 쓸쓸한 상태였다; 당나라 천우원년(904년) 효웅 주온(朱溫)이 당소종(唐昭宗)을 핍박하여 '낙양'으로 옮겨가게 한 후, 전체 장안성은 사상유례없은 겁난을 맞이한다. 옛날의 번화했던 '당나라도성'은 거의 평지로 바뀐다. 나중의 '장안성'은 당나라말기의 절도사 한건(韓建)이 당나라황성을 기초로 재건한 것이다. 총면적은 당나라 장안성의 겨우 16분의 1에 불과하다.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송, 원때 이 축소판 장안성은 오랫동안 냉대를 받았다. 송나라의 가장 번화했던 시기에 이 '장안성'의 인구는 겨우 5만명이었다. 너무나 쇠락해서, 당나라때 장안에 남겨 놓았던 각종 석경(石經)은 한때 들판에 버려져서 세월의 침식을 받게 된다. 송철종때에 이르러 북송정부는 비로소 대량의 인력, 물력을 들여서, 이 진귀한 비각을 수습하여 장안부학(長安府學)의 북쪽(지금의 섬서성 비림박물관 소재지)에 보존한다. 원나라때 '장안성'은 '봉원성(奉元城)'으로 개명한다. 도시배치도 변화가 있었지만, 규모는 여전히 자그마했다.
원나라말기의 농민전쟁으로 '봉원성'은 다시 한번 파괴된다. '마을 사람들은 모조리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집은 모조리 불태워졌다' 그러나 이 이미 버려진지 오래된 낡고 파괴된 '장안고도'가 신생국인 명나라에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단순히 군사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축소판' 장안이라고 하더라도 서북을 안정시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가 건국된 후, 명태조 주원장은 아들 진왕 주상(朱樉)을 이곳에 봉한다. 그리고 대도독부에 예속된 서안도위(西安都尉)를 설치하며,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이름을 고치고, 새로 성을 쌓는다.
그리하여, '개명'한 후, 서안성의 도시건설이 이루어진다. 홍무4년부터 시작하여, 명왕조는 대거 공사를 벌인다. 옛날의 원나라 '봉원성'의 성벽을 동, 북 양측에서 확장한다. 이는 송, 원시기의 쓸쓸했던 모습을 바꿀 뿐아니라, 서안 고성벽의 기본윤곽이 확정된다. 둘레길이 13,962미터. 서안성의 면적도 11.5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이는 당나라 장안성 면적의 10분의 1에 해당한다.
비록 당나라때의 장안성에 비하면 서안성의 규모는 여전히 볼품없지만, 그래도 남다른 기세는 지녔다. 재건후의 서안성벽은 높이가 10미터 이상이고 너비가 12미터이상이며, 하부의 너비는 15미터이상이다. 이런 몇가지 '새로운 면모'는 수,당시대의 규모를 뛰어넘는다. 서안성벽이 방어수준은 급격히 상승한다. 성벽의 외벽에는 98개의 '2층누각식의 적대'를 건설한다. 성벽은 10걸음마다 '전붕'을 두고, 그 외에 5984개의 화살구멍을 만든다. 성벽의 네개 문에는 옹성을 두어 견고한 입체적 방어체계를 갖춘다. 당나라때의 축소판이면서 중국건축사상의 하나의 걸작이다.
서안으로 개명된 후에 도시배치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장락(長樂)' '안정(安定)', "영녕(永寧)', '안원(安遠)'의 네개 성문을 두고, 송,원시기 장안성의 시내는 혼란한 모양이었지만, 4개 문에서 큰길을 두어 네개부분으로 나누어 과학적으로 배치한다. 홍무초기에 서대가에 종루를 건설한다. 만력10년에는 사문대가가 만나는 곳으로 옮긴다. 이때부터 종루를 중심으로 한 도시배치가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날 볼 수있는 서안고성이다.
바로 서안성의 개조와 더불어, 서안이 중진(중요도시)으로 전환된 서안은 비록 주원장 말기에 수도로까지 승격되지는 못했지만, 또 한번의 고속발전기에 들어간다. 명나라초기에 나라를 세울 때, 서안성에서는 '큰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즉 빈번한 기근이다. 그리하여 명나라는 부득이 '호(戶)'를 단위로 하여 구제식량을 나눠준다. 홍무3년만 하더라도 서안부는 굶주린 기민이 36,889호였다. 거의 모든 집이 굶고 있었다. 명나라정권이 안정되면서, 서안의 농업도 급속히 발전한다. 16세기에 이르러, 서안부의 경작지면적은 24만무를 돌파하고, 서북의 '양식창고'로 다시 태어난다.
수공업은 서안을 대표하게 된다. 예를 들어 유자진(柳子鎭)의 철기는 명나라 중후기에 현지 사람들이 '글공부는 하지 않고 철을 다루는 일만 한다'는 상황이 나타날 정도였다. 이 진에만 수천개의 철포가 있었다. 생산되는 철물은 명나라 관료사회에서도 오랫동안 환영받는 선물용이 된다. 발달한 철기생산과 무역으로 산서의 석탄채굴업이 발전한다. 그리하여 황하의 수로운송도 활발하게 된다.
서안의 '가죽제품'도 마찬가지로 전국에 유명하다. 특히 상품경제가 발달했던 명나라 중후기에 서안의 양피(羊皮) 옷들은 동남지역의 비단제품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기제품이었다. 명나라의 궁중에서도 서안을 부유한 광산으로 보게 된다. 그외에 자기도 있다. 경덕진이 유명하긴 했지만, 서안의 요자(耀瓷)는 송나라때부터 천하에 이름을 떨쳤고, 명나라때는 더욱 인기를 끈다. 예를 들어 동관현(同官縣)은 당시에 자기업이 발달했는데, 도자기를 굽기 위해 불이 밤새 붙어 있어, 마치 밤이 낮같았다고 한다.
바로 이렇게 발달한 공업으로 명나라 3세기간의 서북의 민생을 책임졌을 뿐아니라, 더더욱 서북의 국방을 위해서도 계속 물자가 공급되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서안'으로 개명한 것이 얼마나 이 도시에 많은 효과를 가져다 주었는지 알 수 있다.
발달한 상업은 더더욱 명나라때 서안의 특색이었다. 명나라때 학자인 장한(張瀚)의 말에 따르면, "서북의 상인은 진(秦, 지금의 섬서성)의 사람이 많다." 명나라초기에는 비용을 아끼지 않고 역로(驛路)를 건설했으며 백년간의 '개중법(開中法)'을 실시하여 서안상업의 강심제가 된다. 교통유충의 지위로, 관중지구의 식염, 차엽, 양식, 철기등의 물품이 서안을 거쳐 사방으로 팔려나갔다. '진상(秦商)'이 명나라 중기에 굴기하고 특히 식염무역에서 '진상'은 한때 진상(晋商, 산서상인)을 압도하여 서북무역의 주력이 된다. 융경연간의 '진상' 이조관(李朝觀)은 한번 북방으로 양식을 운송할 때 수천만석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기서 언급할 것은 명나라말기에 비바람에 흔들리던 숭정연간에도 서안을 축으로 하는 발달된 산업은 한때 명왕조에 수혈작용을 했다는 것이다. 명장 손전정(孫傳庭)이 섬서를 경략할 때, 서안을 축으로 촉과 관중의 무역로를 개척한다. 여러 해동안 동란을 겪은 섬서의 경제는 다시 활발해진다. 부활한 무역으로 손전정은 인력과 물력을 축적할 수 있었고, 전투력이 강대한 '진군'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한때 숭정제에게 '중흥'의 희망을 갖게 해준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명나라 역사상, 서안의 '무게'는 그다지 무겁지 않으나, 명나라의 판도와 전략배치를 보면, 이 성의 득실이 대명왕조의 흥망성쇠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왕조의 몇세기간의 번영은 바로 서안을 '고심경영'한 공로이다.
심지어, 숭정연간의 명왕조 생사존망의 순간에 서안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일 숭정제가 서안의 전략적 가치를 보았다면, 손전정이 동관으로 물러나 지키는 것을 승인했을 것이다. 동관만 안정되면 서안은 안정된다. 이자성이 백만대군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감히 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멍청한 숭정제는 손전정에게 맹목적으로 동관을 나가 싸우라고 지시한다. 그리하여 전군이 전멸하고 서안도 함락된다. 대명의 '굴묘인(掘墓人)' 이자성은 바로 서안을 발판삼아, '대순군'의 고가맹진(高歌猛進)을 완성한다.
서안이 개명된 해후에는 왕조의 전략배치와 흥망성쇠의 교훈이 있다. 전체국면을 보는 안목이 부족했던 숭정제는 이로 인하여 유감스러운 최후를 맞이한다. 명나라는 망했지만, 고성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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