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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이성동(李成棟): "항명(降明) - 항청(降淸) - 재항명(再降明)", 두 황제를 죽이고, 가정삼도(嘉定三屠)를 일으킨 도살자

by 중은우시 2020. 6. 3.

글: 만풍모우(晩風暮雨)

 

명나라말기, 한 무리의 충신양장(忠臣良將)이 배출된다: 예를 들어 사가법(史可法), 소관생(蘇觀生), 이정국(李定國), 정성공(鄭成功), 진방언(陳邦彦), 왕흥(王興)등이 있다. 동시에 한 무리의 난신적자(亂臣賊子)도 배출된다. 예를 들어, 이영방(李永芳), 퉁양성(佟養性), 오삼계(吳三桂), 전겸익(錢謙益), 공유덕(孔有德)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 양자의 중간에 있다. 그들은 '이익'을 쫓았다. 하는 행위는 모두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명나라에 공도 있고 과도 있어, 간단하게 충신, 간신으로 나누어 평가하기 어렵다. 그 중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성동이다.

 

1. 귀순명조(歸順明朝)

 

이성동은 자가 정정(廷楨)이고, 호는 호자(虎子)이다. 섬서성 영하(寧夏) 사람이며, 명나라말기 농민군 장수이며 처음에는 '틈왕(闖王)' 이자성(李自成)의 부하장수 고걸(高傑)의 부하였다.

 

고걸은 이자성의 부인 형씨(邢氏)와 간통한 후, 그 사실이 발각나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형씨를 데리고 함께 명나라에 투항한다. 이성동도 고걸을 따라 명나라에 투항하여 명나라 정부군이 된다.

 

청군이 산해관을 들어온 후, 이성동은 고걸을 따라 남하하여, 홍광정권(弘光政權)에 투신하여, 명을 받아 서주(徐州)일대에 주둔한다.

 

고걸은 몰래 청나라에 투항한 하남총병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후 이성동은 홍광정권에서 시기와 배척을 받는다. 분노한 그는 병력을 이끌고 청나라에 투항한다.

 

2. 가정삼도(嘉定三屠)

 

이성동은 여러 해동안 군대에 있었지만, 뛰어난 전적을 보여주지 못했었다. 그러나 청나라에 투항한 후, 그는 남명으로 진격하는 선봉장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그는 순식간에 명군에서 청군으로 투항한 장수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장수가 된다.

 

청군이 남경을 점령하여 홍광정권을 멸망시킨 후, 기세를 타고 절강으로 쳐들어간다. 섭정왕 도르곤은 다시 한번 '체발령(剃髮令)을 내려, 점령지역내에서 머리카락을 체두변발하고, 의복을 청나라의복으로 바꾸도록 명한다. '문무관리와 백성들에게 체발을 명하고 만일 따르지 않으면 군법으로 처벌했다.' '머리카락을 남기면 목을 남기지 못하고, 목을 남기려면 머리카락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留頭不留髮, 留髮不留頭)

 

이러한 조치는 명나라의 군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친다. 이미 청나라에 투항했던 많은 주현에서 체발에 반대하여 반란이 일어난다. 에를 들어, 강음(江陰)의 군민은 염응원(閻應元)등의 지휘하에 반란을 일으켜 81일간이나 성을 걸어잠그고 버티며, 청군을 많이 사살하여, 청나라조정을 뒤흔들었다.

 

절강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체발을 거부했다. 그들은 후동증(侯峒曾)등이 주도하여 의군을 조직하여 반항한다. 청나라조정이 임명한 지현을 쫓아내고, 성을 굳게 지킨다.

 

당시 오송(吳淞)에 주둔하고 있던 이성동은 그 소식을 듣고, 청나라조정에 충성을 표현할 좋은 기회라 여긴다. 그는 즉시 병마를 이끌고 가정으로 간다. 10여일간의 전투를 거쳐, 가정성을 함락시키고, 그후 성안이 군민들에 대하여 참혹한 살륙을 벌인다.

 

사서 기록에 따르면, "(청군)은 집집마다 쳐들어가고, 좁은 골목이나 외딴 거리까지도 모조리 수색한다. 풀숲도 반드시 장창으로 마구 쑤셨다." "시민들 가운데 목을 맨 자, 우물에 투신한 자, 강물에 투신한 자, 얼굴에 피칠을 한 자, 사지가 잘린 자, 칼에 베었어나 아직 죽지 않아 손발이 움직이는 자들이 있어, 골육이 낭자했다." "칼소리가 원근에서 가득 들리고, 목숨을 구걸하는 소리가 시장에서처럼 많이 들렸다."

 

하룻동안의 도살로 가정성은 개략 3만여명이 도살된다. 피해자의 시신이 강물의 흐름을 막을 정도였다.

 

이런 참혹한 지옥같은 광경은 겨우 '가정삼도'중의 '제일도'였다. 그후 1달내에 이성동은 다시 병력을 이끌고 가정성에 대하여 '제이도' '제삼도'를 진행한다.

 

두 손에 명나라군민의 피를 가득 묻힌 이성동은 청나라조정의 칭찬을 받고 일약 강남순무(江南巡撫)로 승진한다.

 

3. 융무제(隆武帝) 살해

 

명나라 종실인 당왕(唐王) 주율건(朱聿健)은 정지룡(鄭芝龍, 정성공의 부친)과 소관생의 옹립으로 복건에서 황제에 오른다. 연호를 융무라 한다. 융무제는 권신 정지룡의 꼭두각시였다.

 

청군이 복건으로 쳐들어오자, 정지룡은 방어선을 풀고, 사람을 청군군영으로 보내어 투항건을 논의한다.

 

융무제는 강서로 가다가 정주(汀州)에 이르렀을 때, 이성동의 부하에게 생포된다. 그후 그는 단식으로 죽는다. 융무제의 최후에 대하여는 다른 버전도 있는데, 융무제와 황후등이 청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이성동은 융무제의 수급을 청나라조정에 바친다. 그리고 청나라조정의 상을 받는다. 그는 퉁양갑(佟養甲)과 함께 복주에 주둔한다.

 

4. 소무제(紹武帝)를 핍박하여 죽이다.

 

융무제의 동생인 주율오(朱聿鐭)는 광주에서 대신들의 옹립으로 황제에 오른다. 연호를 소무라 한다. 소무정권은 동시에 존재했던 영력(永曆)정권과 정통성을 다투며 각자 주력을 보내어 서로 싸운다.

 

이성동은 헛점이 있다고 여기고 즉시 부대를 이끌고 광주로 쳐들어간다. 연도의 조주(潮州) 혜주(惠州)등지를 함락시킨 후, 현지관리를 시켜 광주로 인사를 보낸다. 그리하여 소무제는 청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청군은 내부에서 호응하는 사상정(謝尙政)의 도움을 받아 광주성을 함락시키고, 소무제를 포로로 잡는다.

 

그러나, 소무제는 이성동이 보내주는 음식을 먹기 거부하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만일 너의 물한모금이라도 마신다면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조상님을 뵐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목을 매어 자결한다.

 

5. 영남삼충(嶺南三忠)을 살해하다.

 

소무제가 죽은 후, 진방언, 진자장(陳子壯), 장가옥(張家玉)등은 청나라에 투항하기를 원치 않아서, 전후로 의군으르 조직하여 청나라에 항거한다. 한때 광동의 청군은 사면초가의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3명은 이성동의 미친듯한 진압으로 하나하나 죽임을 당한다.

 

진방언은 책형(磔刑)을 당한다. 사형집행때 <옥중오일불식임명가(獄中五日不食臨命歌)>를 짓는다: "천조혜다난(天造兮多難), 신지강야호(臣之江也滸), 서생만담병(書生漫談兵), 시재불아여(時哉不我與), 아후혜하지(我後兮何之), 아궁혜독고(我躬兮獨苦), 애산다충혼(崖山多忠魂), 선후조천고(先后照千古)!"

 

진자강은 거사(鋸死)당하고, 장자옥은 호수에 몸을 던쳐 죽는다.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의 항청영웅을 기려 '영남삼충'이라 불렀다.

 

6. 분장불균(分贓不均)

 

이성동은 스스로 청나라조정에 큰 공을 세웠다고 자부한다. 양광총독(兩廣總督)의 자리는 자신이 맡아야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청나라조정은 양광총독에 퉁양갑을 임명했다.

 

퉁양갑은 덕도 없고, 재주도 없는 편이다. 계속 이성동을 뒤쫒으며 공을 거저 주워먹었다. 그래서 이성동은 그를 멸시했었다.

 

퉁양갑과 퉁양성은 같은 집안이고, 이들 퉁씨집안은 아주 흥성했다. 청나라에 투항도 빨랐다. 만력제, 천계제때 아직 후금이라 불리던 청나라에 투항했던것이다.

 

퉁양성은 심지어 누르하치의 손녀를 처로 맞이한다. 그리하여 부마가 되었다. 지위는 모두 투항한 한인들중 3위내에 들게 된다.

 

이 가족들 중 청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청나라군대에 정보를 제공했다. 그리하여 명나라의 타격을 받았고, 그들은 개명하거나 성을 바꾼 다음 사방으로 숨어다녔다.

 

퉁양갑도 성을 바꾸고 좌량옥(左良玉)의 휘하에 들어갔다. 청군이 산해관을 들어온 후, 좌량옥의 부하들 대부분은 청나라에 투항한다. 퉁양갑은 원래의 성씨를 회복했고, 즉시 청나라조정에서 중용된다.

 

이번에, 청나라조정이 양광총독을 누구로 할지를 정할 때, 아무런 망설임없이 공이 큰 이성동을 고르지 않고, 퉁양갑을 선택하였다.

 

이성동에게는 제독광동총병관(提督廣東總兵官)이라는 직위만 내린다. 이성동은 청나라조정의 임명에 불만이 컸다. 마침 이때 남창의 청군장수 김성환(金聲桓), 왕득인(王得仁)이 명나라에 귀순한다고 선언하고, 청나라에 항거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이성동도 반기를 들 생각을 갖게 된다.

 

7. 광동반정(廣東反正)

 

당시 광동 경내에는 항청무장세력이 여럿 있었다. 김성환, 왕득인도 대군을 이끌고 광동으로 남하할 생각이 있었다. 광주성내의 여러 호족들도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성동 부하들중 원래 명나라에서 청에 투항했던 장수들도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품고 있었다. 심지어 양자인 이원윤(李元胤)까지도 계속 이성동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만일 이들 세력이 동시에 손을 쓴다면, 광동의 청군은 인원이 많지 않아 버틸 수 없을 터였다. 그리고 청군의 팔기주력은 이때 멀리 북방에 있었다. 복건 각지에서도 반란이 일어났고, 노감국(魯監國)은 명군부대를 지휘하여 실지를 수복하고 있었다. 복건의 청군은 스스로를 지키는 것도 어려울 지경이었고, 광동을 지원할 여력은 없었다.

 

이성동은 이것저것 따져본 후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결정한다. 그리하여 광동에서 반란을 선언하고, 남명 영력제에게 충성할 것을 나타낸다.

 

이성동은 광동 조경(肇慶)에 궁전을 짓고, 관청을 지으며 성벽을 복원했다. 그리고 영력제를 맞이하려 준비한다. 다만 영력제의 곁에 있던 여러 대신들은 이성동이 유승윤(劉承胤)이 황제를 끼고 권력을 독점하던 것이 재연될까 우려하여, 극력 만류했다.

 

여러번 논쟁한 끝에 결국 영력제는 조경으로 간다.

 

사람을 수도없이 죽였던 이 맹장은 영력제를 보자 말을 하지 못한다. 이성동은 스스로 부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무장출신이고, 목소리가 크다. 만일 억제를 한다고 하더라도 큰소리를 내면 황상이 놀랄까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신하로서의 예절에 어긋날 수 있기 때문에."

 

8. 병패신사(兵敗身死)

 

다시 남명에 투항한 후, 이성동은 정지룡등을 본받아 조정대권을 장악하려 한다. 그리하여 영력제 신변의 대신들과 힘겨루기를 벌인다.

 

강서에서 반란을 일으킨 김성환, 왕득인등은 공격을 시작했으나 실패하고 남창으로 물러나 지키고 있었고, 청군의 맹공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동은 장기적인 안목이 없었고, 눈앞의 이익에 골몰했다. 그리하여 그들을 지원할 호기를 놓치게 된다.

 

남창이 함락된 후, 청군은 대거 남하한다. 이성동은 그제서야 급히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감주(贑州)등지를 공격한다. 신풍(信豊)을 점령한 후, 바로 청군주력의 공격을 받는다.

 

쌍방은 하룻동안 격전을 벌이고, 이성동의 부하장수들은 사상자가 많이 생긴다. 식량도 떨어졌다. 누군가 이성량에게 물러나서 다시 기회를 잡아 북상하자고 권한다.

 

이성동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천리 먼 곳에서 황제를 맞이하여 충성을 보였고, 황제께서는 단을 쌓아 대장으로 나를 대해주었다. 지금 병력이 출동했는데 아무런 공이 없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자를 뵙겠는가" 말을 마치자, 호위도 거느리지 않고, 말을 타고 활을 집어들고 강물을 건너 바로 청군의 군영으로 돌진한다. 그러다가 물에 빠져 죽는다.

 

이성동의 부하들은 앞다투어 도망쳤다. 대유령(大庾嶺)에서 인원점검을 해보니 총사령관이 보이지 않았다. 조사해보고서야 이성동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된다. 난세를 종횡하던 효웅이 이렇게 형편없는 방식으로 죽어버린 것이다.

 

영력제는 이성동에게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그리고 태부(太傅)에 추존하고, 영하왕(寧夏王)에 추봉한다.

 

이성동의 일생은 '명에 투항', '청에 투항' '다시 명에 투항'으로 아무런 도덕적 기준도 없었다. 그저 눈앞의 이익만 쫓았다. 이런 인물이 마지막에 '충렬'이라는 시호를 얻다니 정말 엄청난 풍자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