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구어정(九魚亭)
주체(朱棣, 영락제)는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예비방안을 마련해 두었다. 북방은 어쨌든 리스크가 큰 곳이다. 그래서 남경에 온전한 행정조직을 보류해둔 것이다. 육부육과(六部六科)를 모두 갖추었다. 남명에 괜찮은 지도자만 있었더라면, 그 효율은 북경에 못지 않았을 것이다. 남명이 판세를 뒤집을 기회도 상당히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회는 항상 스쳐지나가 버렸다.
송고종이 건염남도(建炎南渡)할 때, 그는 1인황제라 할 수 있었다. 병사도 없고 장수도 없다. 그리고 금나라군대에 이리저리 쫓겨다녔다. 그에게서 제왕의 존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조구(趙構)는 결국 안정적인 정권을 수립한다. 그리고 점차 역량을 모아서 금나라와 대치한다. 조구는 비교적 능력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가 없었더라면 남송도 없었을 것이다.
남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의 통일된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모두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만일 숭정(崇禎)의 남도가 성공했더라면, 아마도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사람에게 머리가 없으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새에게 머리가 없으면 날지 못한다. 안정적이고 힘있는 지도자는 아주 중요하다. 남명은 바로 이 문제에서 패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기회: 청군이 안정되지 못했을 때, 실지를 수복했어야 했다.
이자성이 서쪽으로 도망친 후, 청군은 북경지구만 점령하고 있었다. 남방의 대부분 지역은 남명의 손에 있었다. 산동, 하북등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의 관료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청나라는 원래 전국을 통일할 야심이 없었다. 그들은 산해관을 넘어 들어와 북경을 점령한 것만으로도 하늘에서 떡이 굴러떨어진 셈이었다.
만일 오삼계가 직접 산해관을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도르곤이 북경을 점령하는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청군에서 일부 고위층은 심지어 요동으로 되돌아가서 편안하게 지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도르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거대한 이익이 눈앞에 있고, 숭정제는 이미 죽었다. 남명은 군룡무수(群龍無首)이다. 이자성은 '일격도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요소를 감안하여 도르곤은 전국을 통일해야겠다는 야심을 품게 되었다.
당시, 산동, 하북등지에는 도적이 있었다. 청군이 막 산해관을 넘어들어왔을 때, 체발령을 강행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체두변발을 강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민원이 비등하고, 각지에서 반청의 깃발을 꺼내들었다. 청군은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황제의 바로 아래에서 도적이 여기저기 일어났다. 붙잡으면 노소를 불문하고 법에 따라 처리했다.
그후 비록 도르곤은 체발령을 취소하고, 다독이는 정책을 내놓았지만, 이렇게 큰 땅을 앞에 두고 청군은 많은 시간을 들여야 소화시킬 수 있었다. 대순군은 잠시 철군했지만, 그래도 실력은 남아 있었고, 산서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때 청군은 남명조정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산동, 하남등 지역에서는 권력진공상태가 나타난다. 만일 남명이 적시에 병력을 파견하여 이들 지역을 점령했더라면,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남명의 홍광조정은 건립초기에 지도층인 마사영(馬士英)이 근본적으로 북방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남쪽에만 편안히 안주하려고 했다.
홍광정권은 기회를 잡아 산동, 하북등지를 장악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회를 놓쳤고, 그저 청군과 의화(議和)할 생각만 했다. 그러면서 몇달의 시간을 허비한다.
둘째 기회: 청군이 대순군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북벌할 수 있었다.
1644년 십월, 청군은 북경지역을 모조리 점거한다. 그리고 산동, 산서의 대부분지역을 접수한다. 청군은 전방위적으로 확장하기 시작한다. 금방 도르곤이 명을 내린다. 아지거, 오삼계, 상가희를 산서북부에서 대순군을 공격하게 한다. 목적은 대순의 중심 서안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또 다른 일로는 도도, 공유덕, 경중명이 이끌고 남명을 공격한다.
당시 청군의 실력을 보면, 전선 2곳에서 작전을 전개하기에는 부족했다. 남명의 홍광조정은 내부투쟁이 심했다. 만일 도르곤이 홍광정권만 공격하라고 했다면, 홍광정권은 더욱 짧은 시간내에 멸망했을 것이다. 이때 산서, 하남서부지역을 수비하고 있던 대순군이 반격을 하고, 부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되어 청군은 부득이 남명을 진공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모든 병력을 서쪽으로 보낸다. 이자성이 대순군을 멸망시키는 것이다. 휼방상쟁(鷸蚌相爭)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는 법이다. 홍광조정은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만일 이때 남명이 병력을 북상시켜 실지를 수복했더라면, 청군은 양쪽전선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고, 둘 다 돌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막 자리를 잡아 안정되지 못한 청군이 양쪽 전선에서 전투하기는 아주 어렵다. 남명은 대순군의 힘을 이용하여, 양쪽 전선의 전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일거에 경기지구까지 수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남명은 근본적으로 그런 생각이 없었다. 홍광정권이 내놓은 방안은 '차로평구(借虜平寇)' 오랑캐의 힘을 빌어 도적을 평정한다는 것이다. 즉, 청군과 연합하여 대순군을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만일 남명이 대순군과 연합하여 일거에 청군을 공격했더라면 그것이 최선의 방안일 것이다. 대순군은 비록 반군이지만, 대다수는 민병이다. 청군은 이민족이다. 어찌 차구평로(借寇平虜)'가 정확한 방침이 아니었겠는가?
그뿐 아니라, 홍광조정은 오삼계가 투항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오삼계를 계국공(薊國公)에 봉하고, 오삼계와 협력하여 청군을 물리치려 한다.
사료기재에 따르면, "관문총병 오삼계를 계국공에 봉하고, 고권(誥券), 녹미(祿米)를 주고, 은 오만냥, 조미 십만석을 내리고 관리를 시켜 보내준다."
사실상, 오삼계는 일찌감치 철두철미한 반도였다. 이미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가장 관건적인 순간에 홍광정권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위곡구전(委曲求全), 타협퇴양(妥協退讓)했다. 이렇게 하여 청군은 남명의 본질을 꿰뚫어보게 된다.
그외에, 홍광제 주유숭(朱由崧)은 성색견마(聲色犬馬), 지취금미(紙醉金迷)하고 있었다. 국가가 이런 지경에 처해 있는데 그는 환락이나 즐기고 있었다. 실로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주유숭은 즉위한 날로부터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단 한마디만 했다. "천하의 일은 노마(老馬)가 있다."
노마는 바로 마사영을 가리킨다. 주유숭은 강남에서 대거 미녀를 끌어모았다. 환관들은 황제의 어명을 가지고 남경, 소주, 항주 등지에서 위세를 부렸다. 여자가 있는 집이면 모두 봉조(封條)를 붙였다. 돈을 내면 사람을 풀어주었다. 이렇게 하여 환관들은 큰 돈을 번다.
백성들은 화를 피하기 위해, 도처에서 남정네를 찾아서 딸을 결혼시킨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남자를 데려와서 혼인시키기도 했다.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할 상황이다. 사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도성에 딸을 가진 집은 나이가 얼마인지 묻지도 않고, 그 문을 봉했다. 돈을 내면 풀어주고, 다시 다른 집을 찾았다. 이웃에서는 곡소리가 들렸다. 오로지 이익을 얻으려 할 뿐이었다."
셋째 기회: 군대를 정비하고, 실력을 늘여서 공동으로 외적에 대항할 수 있었다.
공격은 가장 좋은 방어이다. 남명은 남송보다 훨씬 강했다. 그래서 남명이 살아가려고 했더라면 반드시 군사력을 충분히 갖추어야 했다. 그리고 실지를 수복하는데 착수해야 했다. 청군에 반격해야 했다. 그래야 살 길이 있었다. 처음에 홍광정권에는 좌량옥(左良玉)의 수만병사가 있었다. 사진총병(四鎭總兵)의 수하도 수만의 병사가 있었다. 만일 이들 병사를 제대로 쓸 수 있었다면 옛 산하를 수습하는 것도 가능할 일이었다.
그저 홍광조정은 완전히 군대를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사진총병은 공로를 내세워 발호했고, 좌량옥은 자신이 옳다고 여겨서 홍광조정의 군사력은 그릇 위의 모래알과 같았다.
대책이 무엇이건 실력이 가장 중요하다. 만일 숭정제가 성공적으로 남천했더라면, 결과는 아마 달랐을 것이다. 다만 주유숭, 마사영의 지도하에 홍광정권은 그저 잠깐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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