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엄20

제갈량 vs 이엄 (3): 촉국 인재고갈의 원인이었을까? 글: 의사리(衣賜履) 230년, 이엄은 제갈량에 의해 한중으로 옮겨가고, 중도호의 신분으로 승상부를 관리한다. 231년, 봄에 제갈량은 다시 기산을 나선다(제4차북벌). 이엄은 양초의 운송을 책임진다. 이번 북벌은 제갈량과 사마의가 처음으로 맞붙은 전투였다. 구체적인 전황은 여기에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여름,가을이 교체하는 시기에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고, 양식운송이 되지 않았다. 이엄은 참군 마충, 독군 성번을 보내 제갈량에게 철군하도록 말을 전한다. 제갈량은 그리하여 철군한다. [의사리] 이엄이 제갈량에게 철군을 통지하였다는 내용의 원문은 이러하다: "평견참군호충(平遣參軍狐忠) 독군성번유지(督軍成藩喩指), 호량내환(呼亮來還)" 여기의 유지(喩指)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이엄이 후주 유선의 뜻이라고 .. 2022. 3. 9.
제갈량 vs 이엄 (2): 양자간의 싸움 글: 의사리(衣賜履) 이엄은 원래 유장(劉璋)의 사람이었는데, 유비가 익주를 쳐들어왔을 때, 이엄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했다. 그리하여 유장에게 큰 타격을 준다. 유비는 이엄을 크게 환영했다고 할 수 있다. 그후, 유비는 이엄을 보내 유봉(劉封), 맹달(孟達)을 따라 상용군(上庸郡, 호북성 죽산현 서남의 전가패)을 공격하게 했다. 그후 이엄은 건위군(사천성 팽산현) 태수에 부임하고, 이어서 두 건의 반란을 평정한다. 이는 그가 상당한 군사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에 따르면, 이엄과 제갈량, 법정, 유파, 이적(伊籍)의 다섯 명은 공동으로 촉한정권의 법령을 정비했다. 이는 이엄이 법률전문가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법정은 220년에 사망한다. 그렇다면 이엄은 개략 건위군태수의 직위에서, 겸직으로.. 2022. 3. 8.
제갈량 vs 이엄 (1): 이엄축출사건의 수수께끼 글: 의사리(衣賜履) [의사리]: 제갈량의 제4차북벌은 의 기재에 따르면, 위나라병사 3천여명을 참살하고, 거기장군(車騎將軍) 장합(張郃)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군량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철군하게 된다. 비록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한중(漢中)으로 돌아온 후, 제갈량이 한 첫번째 조치는 논공행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논공행상을 전혀 하지 않았고, 당초 그와 함께 유비에게 백제성에서 탁고(託孤)를 받았던 2인자 이엄(李嚴)을 관직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아주 이상하다. 이엄이 축출된 이유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역사가들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를 몰랐다. 예를 들어, 전여경(田餘慶) 선생은 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엄의 거동은 어쨌든 지나치게 괴류(乖謬)하여 상정(常情)에 부합하.. 2022. 3. 7.
유비(劉備)가 놓친 4명의 맹장(猛將) 작자: 미상 동한말기, 유비는 무장으로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마초, 위연등 맹장이 있었고, 문관으로 제갈량, 방통, 법정등 모사가 있었다. 이들은 촉한을 건립하는데 중요한 역량이었다. 그리하여, 조조, 손권등 두 제후와 마찬가지로, 유비의 휘하에도 인재들이 많았다. 그러나, 유비의 일생에서 적지 않은 인재들을 놓쳤다. 필자가 오늘 얘기할 것은 4명의 맹장이다. 이들은 모두 촉한을 위해 일하지 않았으니, 후세인들로서는 안타까울 뿐이다. 1. 전예(田豫) 전예(171년-252년), 자는 국양(國讓), 어양(漁陽) 옹노(雍奴)사람(지금의 천진시 무청구). 출생지로 보면 전예와 유비는 모두 유주(幽州) 출신이다. 그러므로, 동한 말기, 전예는 처음에 유비의 곁을 따랐다. 그러나, 모친이 나이가 많아 항상.. 2022. 1. 4.
칠종칠금(七縱七擒)(I): 제갈량은 왜 직접 남정에 나서야 했을까? 글: 의사리(衣賜履) (제갈량의 "칠종칠금"은 삼척동자도 아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제갈량은 일곱번이나 소수민족의 우두머리인 맹획을 붙잡은 후, 잘 먹이고 대접한 다음 보내주고 다시 싸운다. 맹획은 결국 제갈량에게 완전히 굴복한다. 그때부터 촉의 남쪽에 있는 소수민족은 더 이상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제갈량과 맹획은 마치 민족융합을 상징하는 천고의 아름다운 한쌍인 것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럼 실제 상황이 그러할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유비가 사망하기를 전후하여, 익주의 남부지역에서는 여러번 반란이 일어난다. 유비의 후사를 처리한 후, 관료들을 정돈하여 조정의 상하관계를 바로잡은 후 제갈공명은 남부지역에 손을 쓰기로 한다. 다만 그 전에 반드시 해야할 일이 하나 있었다. 동오와의 연합 유비가 .. 2021. 10. 23.
유표(劉表) 수하의 팔대맹장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유표(142-208), 자는 경승(景升), 산양군 고평현(지금의 산동성 미산) 사람이다. 동한말기의 종실, 명사이고 한말 군웅중 한 명이다. 서한 노공왕(魯恭王) 유여(劉餘)의 후손이다. 동한말기, 유표는 진남장군, 형주목, 가절에 임명되고, 성무후(成武侯)에 봉해진다. 형.. 2019. 1. 13.
유파(劉巴): 유비가 전중국을 쫓아다녀 가장 힘들게 얻은 인재 글: 모운서(慕雲舒) 사람들은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하여 "삼고초려"한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유비의 수하에 있는 인재중에서 얻을 때의 난도로 따지자면 제갈량의 삼고초려는 첫째가 아니다. 첫째는 당연히 유비가 중국의 거의 절반을 돌아다녀서야 겨우 얻은 유파라고 해야할 .. 2018. 5. 10.
제갈량은 자신에 황제에 오르려고 생각한 적이 있을까? 글: 뇌정직(賴正直) 제갈량은 역대이래로 충신의 대표인물로 받들어져 왔고, 천고에 모범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다른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제갈량은 간신이고, 야심가이고, 음모가이며, 왕망, 조조 내지 나중의 사마소, 유유(劉裕)와 일구지학(一丘之ญ.. 2017. 12. 1.
삼국시대 가장 용맹했던 5개의 정예부대 글: 복녕객(福寧客) 난세삼국에 각지의 세력은 아주 복잡했고, 군대도 아주 많았다. 이름을 날리고 후세에 이름이 전해지는 부대도 적지 않다. 오늘 얘기할 이 다섯 개의 정예부대는 대부분 유비와 관계가 있어서, 아마도 한켠으로 치우친 것같다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 그러나 생각.. 2015. 5. 3.
"칠종칠금(七縱七擒)"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글: 호각조(胡覺照) 2년을 준비한 후, 원래 이엄(李嚴)이나 다른 장수가 맡으려던 남정(南征)업무를 제갈량은 "여러 장수들의 재능이 나만 못하다"는 것을 이유로, 친히 나서기로 결정한다. 이에 대하여, 심복인 왕련(王連) 마저도 상소를 올려 제지한다: "이곳은 불모의 땅이고, 전염병이 .. 2015.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