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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 vs 이엄 (3): 촉국 인재고갈의 원인이었을까?

by 중은우시 2022. 3. 9.

글: 의사리(衣賜履)

 

230년, 이엄은 제갈량에 의해 한중으로 옮겨가고, 중도호의 신분으로 승상부를 관리한다.

231년, 봄에 제갈량은 다시 기산을 나선다(제4차북벌). 이엄은 양초의 운송을 책임진다.

이번 북벌은 제갈량과 사마의가 처음으로 맞붙은 전투였다. 구체적인 전황은 여기에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여름,가을이 교체하는 시기에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고, 양식운송이 되지 않았다. 이엄은 참군 마충, 독군 성번을 보내 제갈량에게 철군하도록 말을 전한다.

제갈량은 그리하여 철군한다.

 

[의사리] 이엄이 제갈량에게 철군을 통지하였다는 내용의 원문은 이러하다: "평견참군호충(平遣參軍狐忠) 독군성번유지(督軍成藩喩指), 호량내환(呼亮來還)" 여기의 유지(喩指)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이엄이 후주 유선의 뜻이라고 하면서 제갈량에게 철군하라고 했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하면 우리는 분명히 해야할 것이 있다. 호충 즉 마충과 성번은 어떤 사람인가?

 

성번은 사서에 그의 사적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마충은 따로 전이 있다.

<삼국지.마충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마충은 자가 덕신(德信)이고 파서 낭중(지금의 사천성 낭중시) 사람이다. 어렸을 때 외가집에서 자라면서 성은 호(狐) 이름은 독(篤)이었다. 나중에 마씨성을 회복하면서 마충으로 개명한다. 마충은 젊었을 때, 군에서 관료를 지내고, 건안말기에 효렴으로 추천받아 한창현(지금의 사천성 파중시) 현장을 지낸다. 유비가 동오를 칠 때, 효정(猇亭)에서 패전한다. 파서군태수 염지(閻芝)가 오천명을 징집한 후, 마충으로 하여금 이끌고 전선에 가게 한다. 마충은 영안(중경시 봉절현 동쪽, 즉 백제성)에서 대패하고 돌아오는 유비를 만난다. 유비는 그와 얘기를 나눈 후 크게 기뻐하며 상서령 유파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록 황권(黃權)을 잃었지만, 다시 호독(狐篤)을 얻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다.(이릉지전에서 패배한 후, 촉의 진북장군 황권은 동오에 길이 막혀 촉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부하를 이끌고 위나라에 투항한다.)

223년, 제갈량이 개부하면서 마충을 문하독(門下督)으로 임명한다.

225년, 제갈량이 남중을 평정할 때 마충을 장가군(牂牁郡, 지금의 귀주성 복천현) 태수로 임명된다.

230년, 제갈량은 마충을 불러 승상참군에 임명하여 장사(長史) 장완과 함께 성도에 남아 업무를 처리하게 한다. 또한 임주치중종사를 겸임하게 한다.

231년, 제갈량이 기산에서 출격할 때 마충은 한중으로 가서 제갈량을 만나고, 남아서 군사업무를 돕는다.

 

[의사리] 사서기록으로 보면, 유비가 마충을 아주 높이 평가했을 뿐아니라, 제갈량도 그를 아주 좋게 보았다. 개부한 후, 마충을 승상부로 불러서 일을 시켰고, 그후에 다시 지방으로 보내 5년간 단련시킨다. 그리고는 다시 성도로 불러서 승상부에서 일하게 했다. 제갈량이 두번째로 기산을 나서기 전에 마충을 한중으로 불러 한중의 승상부에서 일을 시켰다. 확실히 마충은 제갈량의 사람이다. 심복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문이 든다. 이엄이 제갈량의 심복인 마충을 제갈량에게 보내서 "가짜 성지를 전하게 했다?" 이엄의 머리가 잘못되지 않고서야 그렇게 할 리가 있는가?

 

제갈량은 마충이 거짓으로 전한 성지를 받고 철군했다는 것이다. 이엄은 제갈량이 철군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서 물었다. 군량이 충족한데 승상은 왜 철군하셨습니까? <삼국지>에는 이렇게 말한다. 이엄이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이 양초운송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제갈량이 시기를 놓치게 만든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그후, 이엄은 후주 유선에게 상소를 올린다. 승상은 거짓으로 철군한 것입니다. 그 의도는 조조의 군대를 유인하여 섬멸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그 이후, 제갈량은 이엄의 앞뒤 서신, 상소를 모조리 수집해서 보여주면서 이엄과 대질한다. 이렇게 많은 증거자료 앞에서 이엄은 더 할 말이 없었고, 죄를 인정한다. 유선은 조서를 내려, 이엄을 평민으로 폐하고, 재동군에 유배보낸다.

<화양국지>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팔월, 제갈량이 한중으로 돌아왔다. 이엄은 양식운송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잘못으로 제갈량에게 질책을 받는다. 그리고 독운관 잠술(岑述)을 죽일 생각을 하고, 고의로 놀란 모습을 하면서 승상에게 왜 회군하셨는지 물어보고, 후주에게 상소를 올려 제갈량은 거짓퇴각을 했다고 보고한다.

 

[의사리] 여러분들이 제대로 보았는지 모르겠다. 어쨌는 나는 혼란스럽다. 팔월, 제갈량이 한중으로 돌아와서, 이엄과 그는 만났을까? 알 수가 없다. 이엄은 승상이 왜 회군했는지 물어보았다고 하는데, 제갈량 본인에게 물어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본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제갈량이 이미 한중으로 돌아왔는데, 왜 이엄은 후주에게 제갈량은 '거짓퇴각'을 한 것이라고 보고하였을까? 모른다. 그러나 이 잠술이 누구인지는 약간의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지.양홍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승상장사 장예(張裔)는 사염교위(司鹽校尉) 잠술을 아주 미워했다. 제갈량은 장예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너의 군영이 적에게 함락되었을 때 나는 너의 안위를 걱정했고, 식사를 해도 무슨 맛인지 몰랐다. 나중에 네가 남해로 유배갔을 때, 나는 아주 비통했고,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220년, 익주군의 토호 옹개가 동오로 귀순하려 익주군태수 정앙을 죽이고, 다시 새로 임명된 태수인 장예를 동오로 압송했다. 동오는 장예를 남해로 유배시킨다. 223년 오촉이 다시 연맹을 맺으면서, 장예는 촉국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네가 돌아오고나서 너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우리는 모두 촉황실을 위해 힘을 다한다. 너와 나의 관계는 내 스스로 고대의 소위 '석교(石交)'라고 생각한다. 석교지도는 바로 친구를 위해서 자신의 원수도 추천해줄 수 있는 것이다; 뜻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골육도 자를 수 있어야 하고, 전혀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하물며 원검(元儉, 잠술의 자일 것이다)은 내가 신임하는 사람이니, 네가 그를 용인해야하지 않겠는가?

 

[의사리] 확실히 잠술도 제갈량의 심복이다. 이엄이 잠술을 죽여서 책임을 벗어나려 했는데, 죽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위의 기록으로 보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이러하다. 이엄은 분명 제갈량을 만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갈량이 이엄의 친필문건을 보여주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엄은 변명할 방법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인정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양공문상상서(亮公文上尙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엄은 그의 간계가 발각되었다는 것을 알고, 마음 속으로 사념을 품어, 병을 핑계로 사람을 데리고 저현(섬서성 면현 차점진), 장현으로 도망쳤다. 저현에 도착한 후 다시 강양(사천성 노주시)으로 간다. 다행히 참군 마충이 계속 권유하여, 이엄은 비로소 도망치는 것을 멈추게 된다.

 

[의사리] 실제로 이때 이엄과 제갈량의 사이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나는 여전히 수수께끼라고 본다. 그저 억지로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여름가을교체기에 이엄은 마충, 성번을 보내 군량미운송에 문제가 생겼음을 제갈량에게 보고한다(후주 유선의 명의로 그런 말을 했는지, 도대체 제갈량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고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제갈량이 철군한다

이엄은 왜 철군했는지 묻는다

이엄은 후주 유선에게 상소를 올려 제갈량이 '거짓퇴각'했다고 말한다.

팔월, 제갈량이 한중으로 돌아온다. 이엄은 잠술을 죽여서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

제갈량은 이엄의 친필문건을 내놓으며 대질했고, 이엄은 죄를 인정한다.

이엄은 자신의 간계가 발견된 것으로 여기고 마충을 데리고 도망치다가 나중에 마충에게 설득당해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이엄은 평민으로 강등되고 유배된다.

 

솔직히 이 시간선을 단서로 보면 나 자신조차 설득되지 않는다. 그리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해석할 방법이 없다. 많은 세부내용들이 해석이 안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엄은 왜 거짓으로 후주 유선의 뜻이라고 했을까? 이엄이 정말 성지를 거짓으로 전했을까? 이엄의 '간계'라는게 도대체 무엇인가? 이엄은 도망치면서 왜 마충을 데려갔을까? 마충을 데려간 것인가 마충을 끌고간 것인가? 등등.

다만 나는 두 가지는 확정할 수 있다: 첫째, 이엄은 제갈량에게 불복했다. 둘째, 이엄은 확실히 많은 '증거자료'를 제갈량의 손에 남겨두었다.

양식운송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는 토론하지 않겠다. 첫째는 토론을 제대로 할 수도 없고, 둘째는 다른 증거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이엄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데는 충분하다. 이전에 이엄과 제갈량간의 서신왕래는 아주 많았고, 이엄은 파주자사를 하고 싶어했고, 개부하고 싶어했다. 이것만으로도 금기를 어기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엄이 제갈량에게 칭왕하고 구석을 받으라고 권하는 서신도 있다. 이는 모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들 자료를 내려놓고 따지면 이엄이 인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외에 제갈량의 손에는 다른 증거자료도 있었을 것이다.

제갈량은 이엄을 축출한 후, 이엄의 아들 이풍을 종사중랑으로 임명하여, 장완과 함께 승상부를 관리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가지고 제갈량이 이엄에게 박하게 대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첫째는 이엄을 죽이지 않았고, 둘째는 그의 아들 이풍을 중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승상부에서 일하도록 안배했으니 이엄에 대하여 인의의 극치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은 아마도 타당하지 않은 것같다. <화양국지.유후주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제갈량이 대노하여, 상소를 올려 이평(이엄)을 평민으로 끌어내리고, 재동군에 유배보낸다; 그의 아들 이풍의 병권을 박탈하고, 종사중랑에 임명하여, 장사 장완과 함께 승상부의 업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중점은 이풍이 당시 강주도독으로 수하에 병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엄의 아들 이풍의 병권을 박탈한다"는 것이 바로 이풍을 기용한 근본원인이다.

당연히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제갈량은 사람을 죽이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풍을 기용한 것은 한편으로 이엄부자를 다독이면서 자신의 흉금을 보여주고, 둘째는 이풍의 능력과 자질, 실력과 명망은 이엄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로 하여금 승상부에서 일하게 하는 것은 장완등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풍은 그저 조용히 지내야 하고, 승상부에서 정말 무슨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234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한다. 이엄은 그 소식을 듣고 자신이 이후에 더 이상 기용될 수 없을 것이라 여기고 우울증에 빠져죽는다

이엄은 왜 자신이 제갈량에게 다시 기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을까?

왜냐하면 이엄이 축출된 후, 제갈량은 이풍에게 서신을 한통 보냈기 때문이다. 내용은 대체로 이러하다:

나는 지금까지 너희 부자와 관계가 아주 좋았었다. 같이 한황실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 했다. 나는 너의 부친을 한중으로 불러 일을 시켰고, 너를 강주도독에 앉혔다. 이건 모두 아무와도 상의하지 않은 일이다. 나는 스스로 내가 너희 부자에게 성의껏 대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우의는 만고에 푸르를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일이 이 지경에 이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너는 너의 부친을 잘 위로해주고, 잘못을 보완하도록 해라. 그는 지금 비록 면직되었지만, 노비와 빈객이 아직 백수십명이 있다. 사는 것도 아주 괜찮다. 너는 승상부에서 일하고 있으니 신분이나 지위로 따져서 상층인사이다. 만일 너의 부친이 잘못을 통열하게 반성하고 자신의 잘못을 깊이 인식하고, 너와 장완이 한 마음으로 승상부의 건설을 위해 일해준다면, 막힌 것은 다시 뚫을 수 있다. 잃어버린 것도 다시 찾을 수 있다. 너는 나의 권고를 가슴깊이 새기고, 나의 마음을 알아달라.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장탄식과 눈물이 나오는구나.

 

[의사리] "막힌 것은 다시 뚫을 수 있다. 잃어버린 것도 다시 찾을 수 있다.(否可復通, 逝可復還)." 이는 이엄에게 이런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이 글을 쓰면서 장탄식과 눈물이 나오는구나(臨書長嘆, 涕泣而已)." 이는 이엄으로 하여금 그와 제갈량의 관계가 정말 괜찮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제갈량은 뛰어난 배우이다. 하하. 이엄은 그래서 제갈량을 믿었고, 자신이 정말 재기용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정말 멍청하면서도 귀여운 인물이다.

왜 이엄은 공명에게 속았을까?

당연히 원인은 있다.

첫째, 이엄은 후주 유선과의 관계가 긴밀하지 못했다.

둘째, 이엄은 너무 원로이고 명망도 너무 높았다. 제갈량이 아니면 그를 기용할 사람이 없었다. 제갈량이 죽은 후, 장완이 후임자가 된다. 만일 이엄을 기용한다면, 장완등은 어떻게 그를 대해야할 것인가. 어쨌든 내가 장완이라면, 이엄을 완전히 장악할 자신이 없다면 그를 기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셋째, 가장 중요한 것인데, 제갈량은 한번도 이엄을 다시 기용할 생각을 품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증거가 있다.

<삼국지.진진전>을 보면 이엄을 축출한 후, 제갈량은 장사 장완, 시중 동윤에게 각각 서신을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효기(孝起, 陳震을 가리킴)는 오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전에, 나에게 말한 바 있다. 이엄은 뱃 속에 인갑(鱗甲)을 품고 있다고(사람으 마음이 간사하여 가까이 할 수 없다는 뜻으로 한 말). 그의 고향사람들은 모두 이런 사람과는 내왕하지 말아야한다고 했다. 나는 당초에 뱃속에 인갑이 있어도 서로 부딛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여겼었다. 다만 나는 생각지 못했다. 이엄은 소진, 장의의 일을 다시 하려 했다. 너희는 나의 말을 효기에게 전하라.

여기까지 보면, 제갈량은 이미 이엄의 규정했다. 이런 '뱃속에 인갑이 있는' 인물은 기용할 수 없다. 이엄은 뱃속에 인갑이 있다. 이건 진진이 제갈량에게 한 말이다. 제갈량은 그걸 장완과 동윤에게 말하면서 그들에게 진진에게 전하라고까지 말한다. 네가 직접 진진에게 서신을 써도 되지 않는가 왜 하필 두 사람에게 전하라고 한단 말인가. 당연히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하. 장완과 동윤 제갈량이 확정한 후계자들이다. 장완은 승상부를 맡고, 동윤은 궁안의 일을 맡았다. 그는 후주 유선의 신변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이 서신을 보냈다는 것은 조정과 승상부의 사람들에게 선언한 셈이다. 이엄은 아주 나쁜 사람이다. 뱃속에 인갑을 품고 있을 뿐아니라, 소집단을 꾸린다. 이런 인물을 관직에 등용할 수 없다. 진진은 위위(衛尉)였고, 이엄의 고향사람이다. 우리는 이엄이 고향사람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제갈량의 이 서신이 나간 후, 이엄의 정치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기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엄은 너무 일찍 죽었다. 그가 몇년만 더 버텼다면, 후주 유선은 아마도 그를 불러들였을 것이다. 후주의 조정에는 모두 제갈량의 사람들이었고, 후주도 아마 고민했을 것이다.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강한 인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정치인의 일거일동은 모두 정치적이다.

 

아래에서, 우리는 분석해보기로 하자. 제갈량은 왜 이엄을 축출했을까? 그것도 철저하게.

군량운송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사실이 아닐 것같다.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 토론하지 않기로 한다.

개인적인 느낌으로, 이엄이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외에, 제갈량이 이엄을 축출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아마도 계속 북벌하기 위해서는 이유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북벌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제1차북벌. 실패했다. 이유는 마속이 가정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속을 참한다.

제2차북벌. 아무런 성과없이 돌아온다. 그리하여 전광석화처럼 제3차북벌을 일으켰다. 무도, 음평 두개 군을 차지하여 제2차북벌에서 아무런 전과가 없던 것을 메울 수 있었다.

제4차북벌, 전과가 풍성했다. 위나라병사 수천명을 베었을 뿐아니라, 위나라의 거기장군 장합까지 사살했다. 다만, 촉군의 손실도 수천명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쌍방은 비겼다고 할 수 있다. 촉군은 전략적으로 우위를 점했지만 영토를 더 차지하지는 못했고, 인구를 얻지도 못했다.

제4차북벌에서 동원된 군대는 십만이 넘는다. 각종 보급으로 소모한 것까지 계산하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거의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위나라는 아직 지치지 않았는데, 촉이 먼저 버티기 힘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황제에게, 여러 신하들에게, 백성들에게 북벌의 의의가 어디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제갈공명은 촉국의 상하에 뭔가 얘기할 것이 필요했다.

마속이 책임을 뒤집어쓴 제1차북벌처럼, 이번에는 이엄이었다. 만일 철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옹주의 더 넓은 땅을 차지할 수 있었을텐데, 이엄이 군량운송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그리고 성지를 거짓으로 전하는 바람에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결국 우리는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세웠던 공을 모조리 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엄을 처벌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북벌정책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고, 이엄이라는 자가 나쁜 자였다. 그래서 이엄을 처벌해야 촉국내의 북벌반대의 목소리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또한  이엄이라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자도 제거할 수 있었다. 이는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다.

(여러분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만일 이엄이 군량미를 충분히 운송했더라면, 제갈량의 제4차북벌에서 어떤 전과를 거둘 수 있었을지?)

여기까지 토론하다보면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새로운 문제가 나타난다. 즉 제갈량의 북벌정책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지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반대했을까?

먼저, 많은 지방관리들이 반대했다. 위에서 말한 바 있지만, 제갈량이 매년 북벌을 하면서 각군에 병력을 징집했다. 파서군태수 여예는 오천명을 징집하여 전방에 보낸다. 그러나 다른 여러 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서.지리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파서군, 구개현을 통할함. 1만2천호. 1호당 5명으로 계산하면, 파서군에는 개략 6만명이 있었다. 한번 징집에 5천을 데려가다니, 청장년남자는 모조리 전선에 보내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집안에 남은 사람은 늙은이, 어린아이, 부녀자, 병약자, 장애인이다. 지방관리로서 인자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니면 한황실을 부흥시키겠다는 정치적이상이 그다지 강렬하지 않다면, 아마 이런 북벌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형주집단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이런 말이 있다: "촉중무대장(蜀中無大將), 요화당선봉(廖化當先鋒)" 이 요화는 아마도 북벌정책을 지지하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제갈량이 장예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에게 '원검'을 용인하라고 했는데, 일반적으로 원검은 잠술의 자라고 생각하는데, 아마도 제갈량이 말한 '원검'은 잠술이 아니라 요화일 수도 있다. <삼국지>에 유일하게 자를 명확히 '원검'이라고 한 사람은 오직 요화 한 명뿐이다. 그 서신에서, 제갈량이 말한 것이 모두 요화가 북벌을 반대하기 때문에 싫어하지만 나는 그에게 일을 맡기고 있으니, 너 장예도 잠술을 참으라는 뜻이었을까?

이런 해석도 기본적으로 가능하다.

요화는 양양(襄陽) 사람이다. 원래는 관우의 주부(主簿)였다. 관우가 패전한 후, 수하의 사람들은 거의 동오에서 거두어간다. 요화는 죽은 척을 하고 오나라사람들을 속이고, 노모를 데리고 밤을 새워 서쪽으로 걸어왔다. 당시 유비는 이릉지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자귀에서 그를 만난다. 유비는 아주 기뻐하며, 요화를 의도군태수로 임명한다. 유비가 죽은 후, 요화는 승상참군이 된다. 그후 광무도독이 되고, 우거기장군, 가절, 병주자사, 중향후에 이른다. 그는 성격이 과열(果烈)한 것으로 유명했다. 

<화양국지.유후주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요화가 우거기장군이 된 것은 경요2년 즉 259년이다. 제갈량이 죽은지 20여년이 지난 후이다. 그전에는 광무도독을 지낸다. 광무는 음평군에 속하고, 요화가 광무도독으로 되면서 개략 음평, 무부일대를 지켰을 것이다. 이전에 우리는 말한 적이 있다. 무도, 음평은 위나라에 있어서 계륵도 아니라고. 그러나 촉나라에 있어서는 북방의 병풍이라고. 이곳은 환경이 열악하고, 인구도 적다. 광무도독을 맡겼다는 것은 제갈량이 중용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제갈량이 요화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것은 위에서 본 그 서신이 아니라, 요화는 무장이지만 북벌을 지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삼국지.요화전> 배송지의 주석으로 인용한 <한진춘추>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262년, 강유가 무리를 이끌고 적도(狄道)른 나선다. 요화가 말한다. "병불집(兵不戢), 필자분(必自焚), 백약지위야(伯約之謂也)" 병력을 마구잡이로 쓰면 반드시 화가 닥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강유이다. 지혜도 적보다 못하고, 역량도 적에 못미치면서, 계속 병력을 일으키니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즉, 강유시대에 요화는 북벌을 찬성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갈량시대에도 요화는 북벌에 찬성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그는 성격이 과열(果烈)한 것으로 유명했다. 즉 성격이 불같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수시로 제갈량에게 반대의견을 냈을 것이다. 제갈량은 4년동안 5번이나 조위와 전쟁을 벌인다(228년부터 231년까지, 4차례의 북벌. 1번은 조진이 쳐들어온 것이다). 어쨌든 병력운용이 너무 잦았다.

그외에 제갈량이 이엄을 축출하면서 쓴 상소문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북벌을 하기로 생각한 이래, 이엄의 병력을 한중으로 데려오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엄은 궁난종횡하면서 오지 않았다. 오히려 5개군을 합쳐서 파주를 성립해, 자신으 파주자사에 앉혀달라고 요구했다.

소위 소진,장의의 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하여 학계에 정설은 없다. 전여경 선생같은 사학계의 대가조차도 모르겠다고 했다.

소진,장의가 한 일은 합종,연횡이다. 소위 합종,연횡은 한 무리를 묶어서 연맹을 맺는 것이다. 제갈량이 말한 이엄의 "소진, 장의의 일"과 "궁난종횡"을 합쳐보면 그뜻이 명백하다. 이엄은 사람들을 끌어모아서 제갈량에 반대한 것이다.

다만, 실제로 이엄은 그다지 그런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일당을 끌어모으는 일을 시시하다고 여겼을것이다. 사서에는 이엄이 '성격이 자긍심이 높다"고 했다. 그는 아주 청고하고 고아한 인물이다. 일반인들은 아예 상대하질 않았다. 우리는 이렇게 믿을 수 있다. 만일 명확한 정치적주장이 없다면, 이엄은 상하로 '종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만일 그에게 명확한 정치적주장이 있었다면 합종연횡은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제갈량은 대권을 잡고 있고, 집정능력도 아주 강하다. 인품에 하자도 없다. 사람들 사이에서 명성도 높다. 그리고 후주 유선은 제갈량을 '상보(相父)'라고 부른다. 이엄이 제갈량과 싸운다면 어디부터 시작해야할까? 개인적인 생각으로 북벌에서 전공이 없다는 것이 제갈량의 약점이다. 이엄은 몰래 반전의 기치를 내걸지 않았을까? 다른 북벌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과 연락하여, 제갈량에 도전하지 않았을까? 그게 흐름상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제갈량이 이엄과 다른 북벌반대론자들간에 오고간 서신을 얻어냈거나, 누군가가 그것을 제갈량에게 바쳤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이엄에게 '소진, 장의의 일'을 벌였다고 한 것일 것이다. 조정과 지방이 연락하여 당파를 만든다. 고대의 정치는 이렇게 했다. 다만 그것을 드러내놓고 하게 되면 큰 죄가 될 수 있다. 

이런 친필서신을 증거로 내밀면 이엄은 반박할 방법이 없다.

솔직히 말해서 이엄은 한 지방을 다스리고, 병력을 이끌고 전쟁을 벌이고, 법령을 제정하는데 있어서는 얻기 힘든 인재이다. 그러나 위에서 본 내용을 보면 우리는 이렇게 결론내릴 수 있다:

제갈량이 이엄을 축출한 것은 당시에는 세재필행(勢在必行), 시세의 흐름상 반드시 해야할 일이었다.

이엄사건을 좀더 연장시켜보면, 우리는 촉한의 인재부족현상이 나타난 원인을 알 수 있을 것같다.

촉국은 나라도 적고 인재도 적다. 이건 선천적인 부족함이다. 위나라와 비교할 수는 없다. 심지어 오나라와도 비교할 수가 없다. 우리가 검토해야할 것은 제갈량의 치하에는 특정유형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제갈량에 의해 중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촉한에 인재부족을 불러온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삼국지.유팽요이류위양전>을 살펴보자. 이는 유봉, 팽양, 요립, 이엄, 유염, 위연, 양의에 대한 합전이다.

유봉, 유비의 양자이고, 제갈량은 유비에게 그를 죽이라고 권한다.

팽양, 법정과 방통이 그를 아주 높이 평가했다. 제갈량은 유비의 면전에서 그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유비도 그를 멀리한다. 그후 팽양이 약간 지나친 말을 하자, 사형에 처한다. 팽양은 옥중에서 제갈량에게 서신을 써서 용서를 구하나, 제갈량은 무시하고, 옥중에서 죽는다.

요립, 너무 자만심이 높아, 제갈량에 의해 유배당한다.

이상의 세 사람은 제갈량의 용인기준, 말을 듣지 않으면 쫓아낸다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위연과 양의는 비극적인 운명이고, 그것은 제갈량과도 관련이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재능이 있다. 모두 한 성격한다. 제갈량은 두 사람 모두에게 의지했다. 다만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병사하기 전에, 두 사람의 성격특징에 근거해서 그들을 제대로 이끌거나 어떤 안배를 해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갈량이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간에 충돌이 발생하고, 위연은 참형에처해지며 양의는 유배가서 자살한다.

위의 7명 중에서 유염이 선종한 외에, 나머지 6명은 명백하게 공통된 특징이 있다

첫째, 이들은 모두 재능이 있다. 일을 잘한다.

둘째, 이들은 모두 성격이 있다. 그래서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셋째, 이들은 모두 연부역강했다. 젊었다.

넷째, 이들은 모두 유비가 좋게 본 사람들이다.

제갈량의 용인명단에 유비가 좋게 본 사람들 중에서 특히 성격이 강한 사람들은 자리가 없거나 제한적으로 기용했다. 전자는 유봉, 팽양, 요립, 이엄이고, 후자는 위연, 양의이다. 아마 요화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같다.

제갈량이 이렇게 한 것은 속이 좁아서일까

내 생각에 그렇지는 않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능력이 있고, 성격도 강해서, 누구도 제압하기 힘들다. 제갈량이 일단 이들을 제압하지 못하면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설사 제갈량이 이들을 제압하더라도, 만일 제갈량이 없어지면? 이들은 마구잡이로 날뛸 것이다. 위연, 양의가 바로 그러했다.

제갈량이 이렇게 한 것은 제갈량의 능력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제갈량의 위치와도 관련이 있다. 제갈량은 유비가 아니다. 그리고 조조도 아니다.

직위상으로 보면, 제갈량과 조조는 모두 승상이지만, 정치적 야심으로 보면, 조조는 제왕급이고, 제갈량은 촉한정권에서 비록 그가 최고의사결정권을 가지긴 했지만, 어쨌든 시종일관 신하였다. 이엄이 만일 조조의 수하였다면 명목상은 동료이더라도 실제로는 군신관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엄과 제갈량은 비록 상하급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실질이 동료관계이다. 동료이면서 복종하지 않으면 문제가 터진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이엄같은 사람은 제갈량이 기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건 풀 수가 없다. 촉국은 인재풀이 원래 위, 오만 못한데, 게다가 사람을 기용하는데 난점까지 있다. 그래서 인재가 대를 내려갈수록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유비가 죽지 않았다면 혹시 모르겠다. 아니면 후주 유선이 위명제 조예같았다면 촉국에 아마 다른 모습이 나타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