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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칠종칠금(七縱七擒)(I): 제갈량은 왜 직접 남정에 나서야 했을까?

by 중은우시 2021. 10. 23.

글: 의사리(衣賜履)

 

(제갈량의 "칠종칠금"은 삼척동자도 아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제갈량은 일곱번이나 소수민족의 우두머리인 맹획을 붙잡은 후, 잘 먹이고 대접한 다음 보내주고 다시 싸운다. 맹획은 결국 제갈량에게 완전히 굴복한다. 그때부터 촉의 남쪽에 있는 소수민족은 더 이상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제갈량과 맹획은 마치 민족융합을 상징하는 천고의 아름다운 한쌍인 것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럼 실제 상황이 그러할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유비가 사망하기를 전후하여, 익주의 남부지역에서는 여러번 반란이 일어난다. 유비의 후사를 처리한 후, 관료들을 정돈하여 조정의 상하관계를 바로잡은 후 제갈공명은 남부지역에 손을 쓰기로 한다. 다만 그 전에 반드시 해야할 일이 하나 있었다.

 

동오와의 연합

 

유비가 이릉지전에서 패배한 후, 손류 양가는 이미 강화(講和)했고, 서로 사신도 파견했다.

223년, 사월, 유비가 사망한다. 제갈량은 손권이 바로 촉국의 인심이 불안정한 시기를 틈타서 기습을 해올 것을 우려하였다. 그런 일은 손권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옛날 관우를 등뒤에서 칼로 찌른 것이 아직도 제갈량의 기억에 생생하다.

제갈량은 한동안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어찌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나서서 계책을 건의한다:

"승상, 현재 황상은 나이가 어립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동오와 싸워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사신을 파견하여 손권과 다시 화친의 뜻을 전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의양(義陽, 하남성 동백현 동쪽)사람인 등지(鄧芝)였다. 동한의 개국공신이며, 운대이십팔장의 으뜸인 사도(司徒) 등우(鄧禹)의 후손이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할 때, 등지는 비현(郫縣, 성도시 비도구)에서 하급간부로 있었다(郫邸閣督, 개략 상인들의 거래를 관리하는 관리이다). 유비가 하루는 비현으로 가서 공무를 본 적이 있는데, 우연히 등지와 얘기를 나누게 된다. "유비는 그를 크게 기이하게 여긴다" 이 자는 보통내기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즉시 비현현령으로 발탁한다. 나중에 다시 광한군(廣漢郡, 사천성 광한시)태수로 승진시킨다. 등지는 광한을 잘 다스려 업적이 현저했다. 그래서 유비는 그를 다시 궁으로 불러 상서(尙書)의 직을 내린다.

 

제갈량은 등지를 보며 잠시 생각한 후 말한다. 이 일은 나도 이미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다만 사신으로 갈 적합한 인물을 찾지 못했었다. 그런데 마침내 찾았구나.

등지가 묻는다: 누구입니까?

제갈량이 말한다: 멀리는 하늘 끝에 있고, 가까이는 눈앞에 있다.

그리하여, 제갈량은 등지를 중랑장의 신분으로 동오에 사신이 되어 가도록 한다.

 

십월, 등지는 동오에 도착하여, 손권을 접견하고자 한다. 그러나 손권은 등지를 만나주지 않았고, 그를 내버려둔다. 등지는 손권을 만나지 못하자, 직접 글을 써서 올린다:

"대왕, 제가 이번에 온 것은 당신에게 무엇을 구걸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저의 사명은 우리 촉나라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당신들 오나라를 위하여 생각한 것입니다."

손권은 비로소 등지를 만나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고(孤)는 확실히 너희 촉국과 화친할 생각이 있다. 다만 너희 국군은 어리고 약하다. 강역도 좁다. 역량도 박약하다. 만일 위나라가 너희 나라를 친다면, 너희는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다. 그래서 내가 망설이는 것이다."

등지가 말한다:

"오,촉 두 나라는 4개주(오나라는 양주, 형주, 교주의 3개주, 촉은 익주)를 점거하고 있습니다. 대왕은 당세의 영웅이시고, 우리 제갈승상도 일대의 인걸입니다. 촉은 지세가 험준하여 수비하기는 쉬우나 공격은 어렵습니다. 오나라는 3갈래의 큰 강이 막고 있습니다. 오,촉 두 나라는 순망치한의 관계입니다. 같이 나가면 천하를 얻을 수 있고, 물러나 있으면 위나라와 정립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만일 대왕께서 반드시 위나라에 빌붙으시겠다고 하신다면, 위나라는 반드시 무리한 요구를 할 것입니다. 당신에게 입조하여 조비를 배알하라든지, 태자를 인질로 보내라든지. 만일 대왕께서 따르지 않으면, 그들은 반역자를 토벌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오나라를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일단 그런 일이 발생하면 우리 촉나라가 기회를 틈타 강을 따라 동으로 내려와 오나라를 나눠가지며 이익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강남의 땅은 대왕의 것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손권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인정한다.

그리하여, 손권은 위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촉나라와 화해한다. 그리고 촉에 사신을 보낸다.

 

(이 부분은 약간 기이하다. 특히 손권이 '그리하여 위나라와 관계를 단절하고, 촉나라와 화해한다'는 내용이다.

왜 그런가?

전해인 222년, 십월, 손권은 연호를 황무(黃武)로 짓고 이미 조위와 철저히 갈라섰다. 이어서 쌍방은 유수(濡須), 동구(洞口), 강릉(江陵)의 세 방향에서 동시에 전투를 벌인다. 출동병력은 30만이 넘었고, 사상자가 수만에 이르렀다. 원래 죽기살기로 싸우는 두 나라인데 무슨 '그리하여 위나라와 관계를 단절하고'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필자가 생각해보니 등지가 위나라의 일을 끄집어 낸 것은 그저 명분이다. 실제상황은 손귄이 일단 촉과 화친하게 되면 자신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해서 망설였던 것같다.

손권에게는 이런 특징이 있다. 상황상 필요하면, 그는 누구에게든지 신하로 고개를 숙일 수 있다. 다만 전제조건이 있다. 어떻게 하더라도 내 영토는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

즉, 상대방에게 체면을 살려줄 수는 있지만, 실속은 반드시 내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20년, 익주군의 명문거족 옹개(雍闓)가 유비가 임명한 태수 정앙(正昻)을 살해하고 손권에 투항한 바 있다. 손권은 아주 기뻐하며, 옹개를 영창군(永昌郡, 익주군의 서쪽)태수로 임명한다. 즉, 손권이 만일 촉과 연합하게 되면, 반드시 옹개를 포기해야 한다. 비록 손권이 옹개와 아무런 친분도 없지만, 옹개를 버리게 되면, 그것은 옹개를 통하여 촉의 남부지역영토를 차지할 기회까지 놓치게 되는 것이다.

더 깊이 생각해보면, 만일 손권에게 익주 전체를 차지할 기회가 생긴다면, 그는 바로 조조와 남북으로 나뉘어 일대일로 대항할 수 있게 된다. 현상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익주를 공격하여 취할 것인가를 가지고 망설였을 것이다. 아마도 손권은 잔머리를 많이 굴렸을 것이고, 최종적으로 일거에 제갈량이 다스리는 촉한을 쳐서 이기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같다. 그래서 연합에 동의한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손권이 망설인 진정한 원인일 것이다. 조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손권과 맹약을 체결한 후, 제갈량은 남부지역을 정벌하러 나선다

 

남중을 평정하다

 

실제로 남중지구(南中地區, 개략 오늘날의 운남, 귀주와 사천서남부)는 혼란상태였다.

220년, 익주군의 토호 옹개는 태주 정앙을 살해하고, 동오의 교지군태수 사섭(士燮)을 통해 손권에 귀부한다. 유비는 성도사람 장예(張裔)를 익주군태수로 임명한다. 옹개는 전임태수를 죽였는데, 어찌 신임태수가 부임하도록 놔두겠는가? 남중지구의 백성들은 보편적으로 귀신을 믿었다. 옹개는 무당을 찾아 이런 말을 만들어 듣는다.

 

장예부군여호로(張裔府君如瓠蘆), 외수택내실조(外雖澤內實粗), 살지불가박여오(殺之不可縛與吳)

 

그 뜻은 새로 임명된 태수 장예는 호로박같은 인물이다. 겉은 매끄럽지만 속은 거칠다. 죽이는 것은 안되지만 붙잡아서 오나라로 보내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옹개는 사람을 보내어 장예를 붙잡아 동오로 보내 손권에게 바친다. 손권은 옹개를 영창군)운남성 보산시)태수에 임명한다. 동시에 유장(劉璋)의 아들 유천(劉闡)을 익주자사로 임명하여 교주,익주의 경계가 되는 곳에 머물게 한다.

 

(손권이 유천을 익주자사로 임명한 것은 그가 익주를 노리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솔직히 말해서, 손권이 왜 옹개를 영창군태수에 임명했는지는 모르겠다. 직접 익주군태수로 임명하지 않고. 옹개의 본거지는 익주군이다. 본거지를 떠나 영창으로 간다면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손권은 옹개를 통해 촉한의 남중지구에 대한 장악력을 파악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장예를 얘기했으니 몇 마디 더 덧붙여보기로 하자. 등지가 동오에 사신으로 가기 전에, 제갈량은 그에게 특별히 당부한다. 장예를 데려올 수 있으면 데려오라는 것이다. 등지는 손권을 만났을 때, 장예를 촉으로 데려가고 싶다고 말한다. 이때 장예는 이미 동오에 몇년째 머물고 있었지만, 손권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등지의 요구에 바로 응락한다.

손권은 어떤 때는 아주 재미있다. 자주 우스개같은 이야기를 잘 한다. 

장예가 떠나기 전에 손권을 만난다. 그때 손권은 이런 말을 한다:

듣기로 너희 촉군에는 과부가 있는데 이름이 탁문군(卓文君)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사마상여(司馬相如)와 눈이 맞아 도망쳤다면서. 너희 그곳은 여자들이 정말 열정적이고 자유분방하구나. 하하하하.

장예는 그에 지지 않고 한마디 한다:

제 생각에 탁씨과부는 주매신(朱買臣)의 처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손권은 말싸움에서 밀렸다. 다시 이렇게 말한다. 

장예, 너는 이번에 돌아가면 분명히 관직을 맡을텐데, 앞으로 어떻게 나에게 보답하겠느냐.

장예가 말한다.

저는 죄인의 몸입니다. 돌아가서 무엇을 할지는 모두 조정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다행히 목숨이 붙어 있게 된다면, 오십팔세 이전은 부모가 주신 것이고, 오십팔세 이후는 대왕께서 주신 것입니다.

 

손권은 크게 웃는다. 그리고 이 장예가 보통인물이 아니라고 여긴다.

장예는 궁을 나서자, 자신이 너무 말을 심하게 했다고 여긴다. 그저 멍청한 바보인 척하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 그리하여 즉시 배를 타고 밤낮을 몰아서 촉으로 간다. 과연 나중에 손권은 장예를 놓아준 것을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잡아오라고 시킨다. 그러나 그때 장예는 이미 영안에 도착해 있었다.

 

다시 옹개에 대하여 계속 얘기해보기로 하자.

이 영창군태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부임한다.

<화양국지>의 기재에 따르면 장무초년(221년이 장무원년이다), 영창군에는 태수가 없었다. 즉 유비가 황제를 칭하기를 전후하여, 영창에는 태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처리를 하는 사람은 공조(功曹)인 현지인 여개(呂凱)와 군승(郡丞)인 촉군사람 왕항(王伉)이었다. 이것이 아마도 손권이 옹개를 임명한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여개, 왕항은 손권이 임명한 태수가 온다는 말을 듣자 결사반대하고, 옹개를 막는다. 옹개는 여러번 영창에 격문을 반포했지만, 여개는 서신을 보내 옹개를 욕하면서 협력하지 않았다.

영창을 차지하지 못하자, 옹개는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익주군으로 되돌아간다. 아마도 유비가 죽은지 얼마지나지 않았을 때쯤, 옹개는 사람을 하나 부른다. 그리고 그를 보내 각지의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한다.

그가 바로 맹획이다.

맹획은 인물이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이야기를 날조해서 퍼트리는데는 고수였다. 그는 각 부락의 우두머리를 만나서 이렇게 소리친다.

어르신 큰 일 났습니다.

우두머리들은 놀라서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게 된다.

그러면 맹획은 이렇게 말한다.

믿을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촉한정부에서 여러분에게 오구(烏狗) 삼백마리, 만뇌(蟎腦) 3두(斗), 그리고 3장길이의 작목(斫木) 삼천근(根)을 바치라고 요구한답니다. 여러분들이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우두머리들은 난리가 난다. 그건 우리에게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과 같지 않은가.

맹획은 말한다.

저도 여러분들이 마련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제가 알려드리러 온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죽고, 저렇게 해도 죽습니다. 차라리 우리 옹개를 따라 같이 반란을 일으킵시다.

이에 우두머리들도 호응하게 된다.

 

(아래위의 글로 판단해보자면, '오구'는 아마도 현지에서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는 특징이 몸이 까맣고, 가슴앞의 털은 흑색이 아닌 것인 것같다. 수백마리를 준비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온몸이 새카만 개를 구하는 것은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작목'은 글자의 뜻으로 보면 잘라낸 나무이다. 다만 이 곳에서의 작목은 아마도 특정한 수목을 가리키는 것같다. <화양국지>에는 작목이 아주 단단하지만 곧게 자라지 않고, 가장 큰 나무도 2장을 넘지 못한다고 적었다. 아마도 황화리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길이가 일정정도에 이르면 굽어서 자란다. 3장길이의 대형목재를 구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만뇌'는 일설에는 마노(瑪瑙)를 가리킨다고 하고, 일설에는 만충(蟎忠)의 뇌라고 한다. 무엇인지 확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이 세 가지 물건을 모두 모아서 바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우두머리들은 모두 대노하여 맹획을 따라 반란에 가담하게 된다)

 

익주군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다른 군에서도 야심가들이 꿈틀거렸다. 장가군(牂牁郡)태수 주포(朱褒), 월전군(越嶲郡, 사천성 서창시)의 소수민족추장 고정(高定, 일설에는 高定元)이 모두 거병하여 옹개에 호응한다.

 

(현재 세 갈래의 역량이 반란에 가담했다. 익주의 옹개, 장가의 주포, 월전의 고정.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세 사람중에서 고정만이 소수민족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한족이다)

 

225년, 촉한의 승상 제갈량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남중을 토벌한다.

승상장사(丞相長史) 왕련(王連)는 반대하여 말한다.

승상이 이번에 가는 곳은 불모지입니다. 전염병과 장기(瘴氣)가 도처에 있습니다. 현재 전국의 백성들이 모두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렇게 위험한 곳을 가시면 안됩니다.

역사서에 따르면, 제갈량은 여러 장수들의 재능을 검토해본 후에 자신이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드시 남중으로 친히 떠난 것이다. 왕련이 극구 간언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왕련이 말한 것이 맞다. 남중을 평정하려면 제갈량이 직접 나설 필요가 없었다. 임무를 맡을 대장으로는 조운, 위연, 심지어 오일(吳壹)등등이 있다. 개인적인 생각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기실 이엄(李嚴)일 것이다.

그렇다. 이엄이다. 유비가 아들을 맡긴 두 명의 탁고대신중 한명인 그이다.

215년, 유비는 성도를 점령한다. 그리고 이엄을 건위군(犍爲郡, 사천성 팽산성)태수, 흥업장군으로 임명한다. 218년 도적 마진(馬秦), 고승(高勝)등이 처현(郪縣, 광한군에 속함, 지금의 사천성 삼태현)에서 모반이 일어난다. 무리는 수만에 이르렀고, 군대를 이끌고 자중현(資中縣, 건위군에 속함 지금의 사천성 자중현)에 이른다. 당시 유비는 한중에서 조조와 싸우고 있어 이쪽을 돌볼 수가 없었다. 이엄은 유비의 지원도 받지 않고, 군내의 장사 오천명을 이끌고 반란군을 무찌른다. 그리고 마진, 고승등을 참한다. 그후 월전군의 소수민족 우두머리인 고정이 군대를 보내 신도현(新道縣, 월전군에 속함. 월전과 건위의 경계선부근이다)을 포위한다. 이엄은 달려가서 지원하여 반란군을 쳐부순다.

유비가 사망한 후, 옹개는 더욱 기세등등했다. 이엄은 옹개에게 6장의 장문의 서신을 보내어 설득한다(이엄은 아마도 옹개와 아는 사이였던 것같다)

옹개는 회신을 보내어 이렇게 말한다:

제가 듣기로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 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천하는 정립하여 정삭이 셋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으로서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어디를 따라야 하는 겁니까.

만일 촉한정권의 목적이 단순히 반란을 평정하는 것이었다면, 필자 개인의 생각으로 이엄이 최선의 후보이다. 명망도 있고, 전투도 잘한다. 그리고 반란을 평정한 경험도 있다. 남중지구에 대하여도 비교적 잘 안다. 하물며 유비가 탁고할 때 이엄으로 하여금 '내외의 군사를 통할하도록'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제갈량은 굳이 자신이 나섰다.

왜 그랬을까?

역사서에는 다른 장수들이 모두 자기만 못해서, 반란을 평정하려면 반드시 자신이 나서야했다고 썼다.

실제로 그랬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진정한 원인은 바로 제갈량에게 전공이 필요했던 것이다.

207년부터 유비를 따랐지만, 225년까지, 제갈량은 기본적으로 전공을 세운 적이 없다. 그래서, 그는 직접 나서야 했던 것이다. 이후 북벌을 하기 위한 경험과 위신을 쌓기 위해서.)

 

제갈량이 남정할 때, 마속이 배웅한다. 수십리를 따라왔다. 제갈량이 말한다. 우리가 이 일을 여러 해동안 토론했는데, 지금 무슨 좋은 건의할 것이라도 있는가?

마속이 말한다:

남중이라는 곳은 지세가 험준하고, 길이 멉니다. 그곳의 사람은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설사 우리가 오늘 그들을 격퇴시킨다고 하더라도, 내일 그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현재, 승상께서는 전국의 병력을 모아서 북벌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남중의 반도들이 국가가 비어있는 것을 알면 반란을 더욱 일으킬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후환을 제거하려면 그들을 모조리 없애야 하는데, 그것은 인자한 사람이 할 것이 아니고, 단기간내에 이루어질 수도 없스니다. 그래서 용병지도는 마음을 공략하는 것이 위이고, 성을 공략하는 것은 아래입니다. 심전이 위이고, 병전이 아래입니다(攻心爲上, 攻城爲下, 心戰爲上, 兵戰爲下). 그들을 마음으로 복속시키십시오.

제갈량은 마속의 건의가 아주 옳다고 여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제갈량이 마속에서 같이 여러 해동안 논의했다고 한 것이다. 즉 남중을 평정하는 일을 그들은 이미 여러 해동안 토론해 온 것이다. 마속의 건의는 이치에 맞지만, 여러 해동안 토론하면서 얘기하지 않은 것이거나, 배웅하면서 비로소 돌연 얘기할 것은 아닌 것이다. 만일 정말 제갈량이 물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마속이 다른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연기한 것일 것이다. 마속의 명망을 올려주어 이후 중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