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기64 공개재판의 강청(江靑) 발언록 1980년 11월 20일, 격리조사를 받은지 4년만에,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은 강청에 대한 공개재판을 진행했다. 12월 24일 오전 강청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변호했는데, 아래의 내용을 특별법정 정장인 강화가 기소장을 읽은 후, 강청이 스스로를 변호한 발언록이다: "나는 그의 의견에 대하여, 즉 금방 말.. 2010. 12. 27. 중국인은 왜 극단과 편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글: 해새장(解璽璋) 내가 받은 교육에서, 한가지 점에 대하여 최근 들어 새로 인식하게 된 것이 있다. 어느 해 여름, 모두가 타협해야할 것인가 아닌가로 논쟁을 크게 벌인 적이 있다. 결국 타협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밀리고 말이 궁색해지게 되었다. 끝까지 견지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2010. 3. 18. 모택동은 왜 화국봉을 후계자로 선택했는가? 글: 축을(丑乙) 모택동의 첫번째 후계자는 유소기(劉少奇)였는데, 모택동에게 타도당하고, 옥중에서 죽었다. 두번째 후계자는 임표(林彪)였는데, 역시 모택동에게 타도당하여, 놀라서 도망치다가, 비행기가 추락해서 죽었다. 이것이 "임표반혁명사건"이다. 임표사건은 모택동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 2009. 11. 14. 유소기(劉少奇)의 여섯 부인 유소기(류샤오치)는 확실히 6번 결혼했다. 이 점은 <<유소기년보>>에도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1대 혁명가중에서 여러번 혼인한 사람은 적지 않다. 여기에는 확실히 공통점이 있다. 유소기가 여섯번이나 결혼한 것은 확실히 특수하다. 주씨(周氏) 유소기의 첫번째 혼인은 부지기수로 많은 .. 2008. 10. 22. 모택동이 유소기를 버리고 임표를 택한 이유는? 글: 김산(金汕) 모택동과 유소기의 관계는 친밀한 전우로서 문혁전에는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왔다. 다만, 1966년 제8기 11중전회에서 이런 혈우성풍(血雨腥風) 속에 맺어진 혁명의 정이 철저히 파괴되었다. 1966년 8월 18일, 모택동은 천안문에서 홍위병을 접견했는데, 전세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 2008. 10. 10. 만주를 뒤흔든 장관일(張貫一) 사건 글: 두응태(竇應泰) 1929년 8월 30일, 일본인이 통제하는 <<만주일보>>는 머릿기사로 눈에 띄는 제목을 달았다. <<공산당지하두목 장관일 여순에서 검거>>라는 기사였다. 이어, 심양에 영향력이 있는 몇 개의 신문인 <<성경일보>>와 <<봉천신문>>등에도 마찬가지로 이 사.. 2008. 9. 25. 이전 1 ··· 7 8 9 10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