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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소기)

유소기(劉少奇)의 여섯 부인

by 중은우시 2008. 10. 22.

 

유소기(류샤오치)는 확실히 6번 결혼했다. 이 점은 <<유소기년보>>에도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다. 제1대 혁명가중에서 여러번 혼인한 사람은 적지 않다. 여기에는 확실히 공통점이 있다. 유소기가 여섯번이나 결혼한 것은 확실히 특수하다.

 

주씨(周氏)

 

유소기의 첫번째 혼인은 부지기수로 많은 옛날 희곡의 이야기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가 19세 되던해에 영향에서 고등학교를 다릴 때, 모친은 이미 혁명에 몸바치기로 하고 집에서 갈수록 멀어져만 가는 그를 붙잡아두기 위하여, 이웃의 한 농촌처녀를 데려왔다. 그리고 모친의 병이 위중하다고 서신을 보내어 아들을 고향으로 불러들인다. 아들이 집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리는 것은 화촉동방이었다. 유소기는 하룻밤 내내 방에 앉아서 그녀에게 자유를 얘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주씨는 어떻게 설득해도 친가로 돌아가라는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유일한 요구는 유소기에게 나중에 아들이 생기면, 그녀에게 하나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유소기는 봉건예교의 희생자인 그녀를 깊이 동정했고, 자기 이름으로 된 30무의 토지를 주씨에게 넘겨주었다. 나중에 그는 하보정과의 사이에 낳은 장남을 주씨에게 맡긴다.

 

하보정(何貞)

 

유소기는 모택동을 알게 되면서 동시에 하보정도 알게 되었다. 1922년, 그가 소련에서 귀국하자, 진독수의 명을 받아 장사로 모택동을 찾아가서 임무를 받는다. 청수당 22호의 판방(板房)에서 모택동과 유소기는 함께 있었다. 그때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한 하보정이 마침 모택동, 양개혜부부의 집에서 함께 거주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진으로 보더라도 하보정이 아주 기운이 충만하고 단장하고 수려한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4세된 유소기가 하보정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자연스럽게 수많은 신 연극의 이야기처럼 반년후에 안원스트라이크 승리를 경축할 때 두 젊은이는 결혼에 골인한다. 하보정의 운명은 양개혜와 비슷했다. 그녀는 유소기를 따라 동분서주했고, 세번 자녀를 낳았지만, 세번 모두 자녀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린다. 1934년 국민당 감옥에서 희생된다. 유소기의 그녀에 대한 감정은 모택동의 양개혜에 대한 것과 비슷하게 순수하고 농후하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유소기는 북경에서 남하하였을 때, 왕광미와 남경 우화대를 가서, 이 혁명의 반려를 애도했다.

 

사비(謝飛)

 

어부의 딸인 사비는 유소기의 세번째 부인이다. 희한하게도 사비는 모택동의 세번째 처인 하자진과 아주 비슷한 데가 있다.

 

바다와 산을 누비던 두 여인은 거의 비슷하게 능력있고, 시원시원하며, 직선적이다. 그녀는 화교아가씨이다. 싱가포르 중공남양임시공작위원회에서 지하공작을 할 때, 사비는 다른 사람들이 유소기에 대하여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선전부장인 서대홍은 그녀에게 중국농민운동의 유명한 영수는 모택동이고, 중국노동운동의 유명한 영수는 이입삼과 유소기라고 말해준다. 1932년 사비는 귀국하고, 1934년 강서 소비에트지구를 찾아간다. 대회를 열었을 때, 유소기를 보게 된다. 그러나 아주 먼 곳에서였다. 장정도중에 그녀는 유소기의 보고를 듣게 된다. 그러나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등발의 부인인 진혜청에게 말하였다: "이 자는 말이 아주 중복된다. 여러번 되풀이하여 말한다" 진혜청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노동운동의 영수인데, 말을 몇번 반복하는게 뭐 어떠냐?" 오래지 않아 사비는 행군도중에 먹은 것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여 다른 세 여자홍군과 함께 후방조달을 담당하고 있던 유소기를 찾아가서 농민에게 짐을 들어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이번에 그녀는 유소기와 얼굴보 마주하고 말도 한다. 와와보에 도착해서, 사비의 농공검사부와 유소기의 노동조합업무는 서로 연관이 많아서 연락도 많아지고, 물어보는 것도 많아지고, 논쟁도 많이 하게 된다.

 

유소기는 이 시원시원한 어부의 딸에게 호감을 느낀다. 등영초는 기회를 잡아 두 사람을 연결시켜준다. 이런 점들을 보면, 나중에 발생한 문제들에 대하여 이해가 된다. 사비의 성격으로 오랫동안 그저 가정주부의 신분으로 지낼 수 있을까? 그녀의 경력에 비추어 그저 유소기의 곁에서 문건을 받고, 문건을 발송하는 일을 기꺼이 해낼 수 있을까? 천성과 사업욕심은 사비를 불만에 가득차게 했다. 그녀는 유소기가 화북근거지를 확보하는 휘황한 업적을 쌓은 후, 유소기와 새로운 일을 같이 하는 것을 거절한다. 논쟁이 계속되자, 유소기는 어쩔 수 없이 조직지도자의 신분으로 그녀에게 명령을 하게 된다. 백구(白區)와 홍군의 엄격한 기율을 잘 알고 있던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처이면서 부하로서 억눌렸던 화는 연안에 도착해서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스스로 마르크스레닌주의학원에 들어가겠다고 요청한다. 이때부터 다시는 유소기의 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다만 나중에도 사비는 인터뷰나 글을 쓰면서, 여전히 유소기의 혁명과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왕전(王前)

 

유소기는 왕전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었다. 이번 혼인은 비극이었다. 시비를 따지자면 신비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한 건축노동자와 한 판매원의 가정이야기는 마찬가지로 당의 지도자와 신4군의 간호사 사이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 유감스러운 점은 이번 혼인의 변고를 강청이 이용하면서 기형적으로 폭로되었으며, 유소기의 이미지와 인격을 심각하게 훼손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강정은 왕전과는 다른 속셈을 가지고, 그리고 함께 이미 성년이 된 딸을 교사하여 유소기를 폄하하게 한다. 유소기는 나중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일생에서 그의 몸과 마음에 가장 큰 상처를 준 것은 바로 일찌기 그의 처였던 여자와 그가 낳은 딸이었다고. 유소기는 왕전과 이혼하기를 전후하여 상당히 긴 시간동안 자신이 자녀를 데리고 살았다. 사람들은 식사할 때, 유소기가 큰 밥그릇을 들고 자녀들을 돌아가면서 먹이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자란 딸이, 부친의 진정한 모습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문혁의 비극은 그녀와 그녀의 생모, 그녀와 그녀의 모든 친척간에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

 

왕전은 바람기가 있는 여인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16살에 유소기에게 시집갔는데, 그 때 동시에 다른 남자들과도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결국 결혼기간은 길지 못했고, 유소기는 더 이상 그녀와 함께 살 수가 없어 이혼하게 된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그녀는 섭진(眞)과 결혼하는데, 그는 바로 문혁때 이름을 날렸던 섭원재(元梓)의 오빠이다.

 

문혁때 유소기를 비판하는 대자보에서 왕전은 이렇게 말한다. 유소기가 그녀와 결혼할 때 나이를 속였다. 43세를 32세라고 하였다. 왕전은 그녀가 1945년이 되어서야 유소기가 그녀보다 라고 있던 것보다 10여세나 많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처럼 유소기는 아주 비열하다고 적었고, 또한 당시 유소기를 비판하던 유명한 말인 "작은 손해를 보면서 큰 이익을 가져간다"는 말도 왕전이 폭로한 것이다.

 

왕전은 유소기와의 사이에, 1남1녀가 있었는데, 딸은 유도(劉濤)이고 아들은 유윤진(劉允眞)이다. 유소기는 둘이 생모의 나쁜 영향을 받을까 우려하여, 유도, 유윤진을 왕전과 만나지 못하게 한다. 왕전은 몰래 유도에게 편지를 써서 모녀가 유소기 몰래 만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서신은 유소기에게 들키고, 유소기는 서신을 보내어 왕전을 질책한다. 이로 인하여, 두 사람의 원한은 더욱 깊어진다. 이리하여 왕전은 문혁때 유소기에게 보복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1967년 1월 1일, 유도와 유윤진은 처음 생모를 방문한다. 두 사람은 생모가 제공한 자료에 근거하여, 유소기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대자보를 만든다. 이것은 유소기를 가장 자극하는 대자보였다.

 

지금까지도 대륙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 중에는 '문혁'때 폭로한 유소기의 죄상중 그가 중공지하공작을 할 때 조직경비를 가지고 "황금신발깔창"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다. 사실 당시 중공지하당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던 유소기로서는 조직경비를 황금으로 바꾸었던 것이 완전히 보관과 이전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유도와 유윤진은 유소기가 이것을 개인적으로 착복했다고 적었다. 그리하여 분노한 홍위병들은 유소기에게 당에 그 황금신발깔창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자기의 친자식들 입에서 폭로된 내용에 대하여 유소기는 입이 백개라도 변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완전은 실제로 자신과 유소기 사이에 낳은 두 자식의 장래를 망쳤다. 비록 그 대자보때문에 문혁기간동안에는 유도가 유소기의 다른 자식들처럼 핍박받지 않을 수 있었지만,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지니고 살아가야 했다. 1980년, 왕공미는 유소기의 몇몇 자식들의 연명으로 <<승리의 생화를 당신에게 바칩니다 - 우리의 아빠 유소기를 생각하며>>라는 글을 쓰게 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아주 진지하게 하보정의 세 자녀가 부친이 박해를 받은 후에 당한 비참한 경우를 언급하였지만, 유도와 유윤진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왕전의 단견적인 행동으로, 유소기의 두 자식은 영원히 생부의 사후 덕을 볼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왕건(王健)

 

유소기보다 나이가 많은 주덕은 중공당내의 명실상부한 후덕한 어른이다. 그와 부인 강극청은 유소기를 아끼는 마음에서, 그리고 왕전의 사례를 감안하며, 인품이 현숙하고, 품성이 단아한 짝을 찾아주려 한다. 그리하여 유소기의 자녀들이 의탁할 사람을 가지게 해주려고 했다. 마침, 그들의 곁에서 일하던 사람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왕건이다. 왕건은 말이 많지 않았고, 웃고 떠드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과 얼굴을 붉히고 다투지도 않았다. 성격이 유소기와 아주 비슷했다. 주덕부부는 이 젊은이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해주었다고 만족했다. 그러나, 아무도 생각지 못하게, 건강요인으로 이 혼인은 지속되지 못한다. 이 관계는 며칠만에 끝나버린다. 유소기는 주도면밀하게 왕건을 자기의 옛부하이자 옛전우인 임풍, 곽명추부부에게 맡겨서 그녀를 동북의 유명한 요양지에 보낸다. 그리고 왕건의 언니가 함께 돌봐주도록 해준다. 이에 대하여 주덕 부부는 유소기에게 항상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동지들과 함께 왕광미와 유소기의 결혼을 성사시키게 된다.

 

왕광미(王光美)

 

왕광미가 그녀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다 쓴다면 아마도 아주 두꺼운 하나의 책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그녀는 북경의 유명한 "수학삼왕(數學三王)"중의 여왕이었다: 양진녕, 이정도, 등창려, 오검웅은 모두 그녀가 아주 잘아는 선배, 친구였다. 지금도 그녀의 딸은 농담처럼 말한다. 그녀는 중국의 노벨상수상자들과 인연이 있다고; 그녀의 넷째여동생, 다섯째 여동생이 모두 혁명에 헌신할 때도 왕광미는 여전히 과학입국의 꿈을 안고 살았다; 우연히 북경의 지하조직이 추천하여 '군조소조' 중공의 영어통역이 되었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영어회화실력을 향상시켜서 미국유학의 기초를 닦겠다는 생각이었다; '군조'사업이 요절된 후, 한편으로 국민당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 공산당과 같이 일하면서 공산당에 흥취를 느끼게 되어, 그녀는 연안으로 간다; 그녀의 장기로 인하여 그녀는 중앙군위 외사부문에 배치된다; 업무성격상, 그녀는 모택동 유소기등 중공영도자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녀는 왕건보다 전에 유소기를 알았다. 왕건이후에 여자친구가 유소기의 불행한 혼인경력을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도 이것들은 그녀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녀는 해야할 일만 했다. 그저 진수토지개혁에 참가하여 한번 떠나서 1년여를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토지개혁과정에서 그녀의 과학의 꿈과 미국유학의 꿈은 공산주의이상으로 바뀌게 된다.

 

유소기가 중공공위를 이글고 진수를 지나다가, 왕광미등 공작대원과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가 시작되지는 않는다. 연속 세번이나 혼인에서 좌절을 겪은 그는 이 방면에는 이미 포기하고 있었다. 해방전쟁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자 더더구나 짬을 내서 혼인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의 위장병은 이 시기에 더욱 악화된다. 사람이 아주 말라깽이가 되어버린다. 천리밖에서 섬북을 전전하던 모택동도 자주 전보등을 통하여 유소기의 체중과 마른 것에 관심을 나타내고 물어보곤 하였다.

 

천하를 얻고, 해야할 일이 많아지자, 유소기의 신체상황과 생활상황은 일찌감치 그 개인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토지개혁임무를 끝내고, 군사위원회로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왕광미는 유소기와 혁명사업을 위하여 결혼한다. 혹자는 당중앙과 동지들이 혁명사업을 위하여 그들에게 결혼하라고 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지금 들으면, 웃기는 일같지만, 실사구시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완전히 사실이다.

 

왕광미와 유소기는 머나먼 곳에서 함께 했고, 너무나 많은 우연이 있었다. 그리고 많은 필연이 있었다. 1948년 8월부터, 유소기는 하루하루 뚱뚱해진다. 사람들이 문혁 전의 그의 사진을 보면, 유소기 주석이 허리에 약간 뚱뚱한 허리띠를 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광미는 그녀의 비범한 남편과 20년을 생활했다. 그녀는 이것은 무상의 영광으로 알았다. 그녀는 이로 인하여 12년간 감옥에 들어간다. 유소기의 처지가 아무리 험악해도, 그녀는 자기의 남편을 배신하지 않았다. 한번도 자신의 감정을 배신하지 않았다.

 

수백명의 중앙위원이 거수로 "반도(叛徒), 내간(內奸), 공적(工賊) 유소기의 당적을 제명한다"고 결의할 때 한 여인은 손을 들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진소민(陳少敏)이다; 8억여 중국인들이 "유소기타도"를 소리높여 외칠 때에도 한 여인은 반석처럼 굳거히 그를 사랑했다. 바로 왕광미이다. 왕광미는 자신의 직책을 지키고,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남편을 보좌했다. 잘나갈 때도 교만하지 않았고, 낙마하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두 전처의 자녀를 자기의 아들과 함께 화목한 가정으로 만들어갔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대가의 풍모를 지녔다. 지금도 그녀는 조용하게 생활하는 외에 중국의 모친들을 위하여 '행복공정'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