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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심리

중국인은 왜 극단과 편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by 중은우시 2010. 3. 18.

글: 해새장(解璽璋)

 

내가 받은 교육에서, 한가지 점에 대하여 최근 들어 새로 인식하게 된 것이 있다. 어느 해 여름, 모두가 타협해야할 것인가 아닌가로 논쟁을 크게 벌인 적이 있다. 결국 타협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밀리고 말이 궁색해지게 되었다. 끝까지 견지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도덕적인 자부심을 나타냈다. 이것은 사실 이상할 것도 없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렇게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가법(史可法)은 비교적 쉽게 받아들이지만, 전겸익(錢謙益)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둘 다 명나라말기의 사람으로 사가법은 청나라에 항거하다 죽었고, 전겸익은 청나라에 투항했다). 우리는 양군이 대항할 때 그 중 한 편에 서야한다는데 익숙해진 것같다. 초나라와 한나라가 나뉘어진 경우 이쪽이 아니면 저쪽이다. 중간지대가 존재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이는 바로 한 개인의 입장이 견고한가에 관련되고, 기치가 선명한가에 관련되고, 감정이 순수한가에 관련되고, 절개가 높은가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 사람이 정치적인 평가와 도덕적인 평가를 받는 기준이 바로 이런 태도표명에 걸려 있고, 어느 편에 줄을 서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이성적이고, 평화적이고, 중용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목소리는 격정적인 사람들의 구호에 파묻혀서 매몰되어 버린다. 중시되지도 않고, 오해되거나, 연약하거나 타협적이거나 원칙을 잃은 것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광장정치는 결국 무질서와 비이성으로 향하는데 뿌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누구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자 하지 않는다. 결과는 그저 구호가 갈수록 커지고, 요구는 갈수록 높아진다. 선동된 민중의 정서에 파묻혀, 한걸음 한걸음 극단으로 걸어가고, 심연으로 빠져든다. 역사는 이러한 교훈 혹은 비극이 너무나 많았다.

 

사실, 중국의 문화전통에서 '적절한 때에 그쳐야 한다'는 이성적인 정신이 없지는 않다. 유가사상의 '중용(中庸)'이나 도가가상의 '무위(無爲)' '부쟁(不爭)'은 모두 지고무상의 정치적 지혜와 도덕적 경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런 정신이 처음에 우리에게 전달될 때에는, 그들이 이미 구겨지고 덧붙여져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직 어렸다. 개략 열너댓살이었다. 마침 '문혁'을 맞이하여, 유소기는 '최대의 주자파권력파', '모주석 신변의 후르시쵸프'로 비판받아서, 잔혹한 투쟁과 무정한 타격을 받았다. 전해들은 바로는 그가 주장한 '흑팔론(黑八論)'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계급조화, 중용지도였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그 안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저 이 몇 글자만 기억한다. 그것도 좋지 않고, 소극적이고, 시정잡배의 처세철학으로 기억한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평가하지 않기를 바랐다. 한 사람의 가치관은 자주 이렇게 건립된다. 당시에 유행한 주류의 가치는 투쟁철학이다. 투쟁으로 단결을 추구하면 단결되고, 양보로 단결을 추구하면 깨진다는 것이었다. '팔억인구가 싸우지 않고 되겠는가?" 그리하여 '하늘과 싸우면, 그 재미가 무궁무지하다, 땅과 싸우면 그 재미가 무궁무진하다"는 호방한 말이 나온 것이다. 그때는 아직 '과유불급'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 당시에는 '지나친 것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거나 '궁지에 몰린 도적은 쫓지를 말아라'는 것을 받아들일 줄 몰랐다. 왜냐하면, '마땅히 남은 용기와 힘으로 궁지에 몰린 적을 끝까지 쫓아야 하고, 명예를 추구하거나 초패왕을 배워서는 안된다"고 배웠다. 초패왕 항우와 송양공은 모두 아녀자의 어짐을 지닌 것이고 멍청한 것이라고 배웠다. 그러니, 본받을 사람은 아니었다.

 

사회에 가득찬 분위기는 이렇게 호전적이었다. 우리 세대는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있었다. 악을 원수처럼 싫어해도 좋고, 애증이 분명한 것도 좋다. 정책이나 책략을 모른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다른 사람이 입장이나 감정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의심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모두 '좌를 향할 지언정 우로 향해서는 안되었다' 그저 극단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적절하게 멈추어서는 안되었다. 중용의 도는 안되는 일이다. 공개적으로 입장을 나타낼 때는 절대로 망설여서는 안된다. 여기에는 이 말이 적절하다: "편집광만이 생존할 수 있다." 당시에 농촌에서 지주와 투쟁을 벌일 때, 우리같은 아이들은 그저 뒤따라다니면서 구경을 했다. 한 사람을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생명이 위험할 지경이 되어, 누군가가 동정을 약간이라도 표시하면, 바로 같이 비판받는다. 기억하기로 홍위병들은 "부친이 영웅이면 아들도 영웅이고, 부친이 반동이면 아들도 반동이다"라는 주제를 놓고 중산공원에서 변론을 벌인 바 있다. 처음에는 '기본적으로 이렇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절대적으로 이렇다'로 바뀌었다. 발언대에 올라 발언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먼저 출신을 밝혀야 했다. "홍오류(紅五類)"출신이면 자연히 대단하다. "흑오류(黑五類)" 출신이면 불쌍하다. 가벼우면 발언대에서 끌려내려오고, 심하면 머리칼을 잡히면서 비판당한다. 누군가가 '문투(文鬪)를 하고, 무투(武鬪)는 안된다'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나 작았다. 완전히 '혁명을 하지 않으면 개새끼다'라는 구호에 파묻혀 버렸다. 그때, "비액발뢰(費厄潑賴, 영어 Fair Play의 한역)"라는 말은 전염병과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회피하고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임어당이 '비액발뢰'를 주장했지만, 노신이 바로 <<'비익발액'은 시행보류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임어당이 어떤 사람인가? 매판자본계급의 반동문인이다. 노신이 어떤 사람인가? 문화혁명의 기수이다. 어떻게 되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노신이 '비액발뢰'를 얘기하면서, 무조건 실시해서는 안된다고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시행을 보류해야 한다'고 말했을 분이다. 언제까지 보류해야 하는가? 그는 말하지 않았다. 지금은 괜찮은 것인가? 계급투쟁은 일찌감치 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러나 너죽고 나살기식이 역사가 된 것만은 아니다. 지금도 충돌과 대항이 여전히 광범위하고 심각하게 존재한다. 이때 '비액발뢰'를 주장하고, '적절한 때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중용지도'를 주장한다면, 나는 우리 국가와 사회와 민중들이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궁금하다. 이런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기나 한 것일까? 우리는 청나라말기에 발생한 혁명과 입헌의 변론을 보았고, 혁명은 크게 소리치며 개선하고, 입헌은 낙망하여 도망쳤다. 거기에도 마찬가지의 논리가 있다. 혁명의 목소리와 비교하자면 입헌은 확실히 '간도 쓸개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완전히 피압박자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혁명을 시행하게 되면, 파괴는 쉽지만 건설은 쉽지 않다. 과거에는 자주 '부수지 않으면 세울 수 없다. 막지 않으면 흐르지 않는다. 그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다". "파(破)자가 앞에 나오면, 입(立)자는 그 안에 있다."고 해왔다. 그러나 결과는 항상 폐허였다. 초토였다. 파자는 앞에 섰지만, 입자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민국시대처럼 혁명은 성공했고, 공화도 실현되었다. 그러나 헌정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중의 실제지위와 생존상황으 개선되지 않았다. 나는 돌연 양계초를 생각한다. 그는 입헌을 주장했다. 먼저 군주입헌을 주장했는데, 군주제가 무너지자, 다시 민주입헌을 추구했다. 그는 <<이재소위국체문제자>>라는 글을 써서, 모두 국체(國體)문제로 싸우면서 가장 근본적인 정체(政體)문제를 다루지 않는 것은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의 목소리는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청나라말기와 같은 역사환경속에서는 그러했다. 그래서 양계초의 주장은 혁명당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서태후의 일당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스승에게도 의심을 받는다. 후세인들은 양계초를 간단하게 보황당과 유신파로 구분해버리는데, 그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를 하는 사람은 드물다. 확실히 양계초는 현실에서도 난감했고, 역사에서도 적막했다. 이는 모두 중화(中和)를 주장하고, 불편불의(不偏不倚)를 주장하면 오히려 고독하게 되고, 아무도 그를 자기 편으로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양계초의 비극이다. 또한 우리 민족과 민중의 비극이다. 그의 처지에서 우리는 개략 느낄 수 있다. 비록 적절한 선에서 그만두는 것이 아주 좋은 것이지만 진정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현재는 아직 어려움이 있다. 사실상,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우리는 이 측면에서 심각하게 반성해본 적이 없다. 체계적으로 감별하고, 토론하고, 정리해본 적이 없다. 우리의 가치선택은 여전히 극단과 편집적인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것이다. 어느 정도 쌓이게 되면 결국 재난으로 돌아온다. 비록 우리는 항상 이 이슈를 회피하려고 하지만, 언젠가 중국의 현대화의 길에서 우회할 수 없는 장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