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래(周恩來)와 유소기(劉少奇)의 암중각축(暗中角逐)
글: 고문겸(高文謙) 1966년 8월 5일, 모택동은 에서 이상하리만치 격렬한 어조로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유소기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반동의 부르조아계급입장에 서서, 부르조아계급독재를 실행하여,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거대한 문화대혁명운동을 탄압하고, 시비를 전도하고, 흑백을 혼동하며, 혁명파를 토벌하고, 다른 의견을 억누르며 백색공포를 실행하며 스스로 득의하며 부르조아계급의 위풍을 키우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뜻을 꺽었다. 어찌 그렇게 독하단 말인가?" 모택동은 글에서 1962년 조정시기의 소위 '우경'문제를 연결시켜, 기세등등하게 유소기와 최종대결을 벌이겠다는 자세를 취한다. 모택동의 이 글은 그후 전체회의에 인쇄되어 배부되어, 회의참석자들이 유소기를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전체회의는 바로 ..
2023. 5. 18.
팽덕회(彭德懷) 죽음의 배후
글: 임휘(林輝) 1974년 12월 17일, 한 구의 시신이 301병원에서 비밀리에 화장장으로 보내어져 화장된다. 화장신청서에 쓰인 것으로는 "신청인: 왕규(王奎), 주소: 301, 사망자와의 관계: 부자, 사망자성명: 왕천(王川), 남, 76세, 번호: 0012690" 사실상, 이 왕천이라는 이름의 인물이 바로 중국의 전 국방부장, 원수 팽덕회였다. 중공내부에서 팽덕회는 성격이 솔직하고, 충동적이며, 감히 직언을 마다하지 않고 정의감이 넘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찌기 항전시기, 팽덕회는 중공의 적극항전을 주장했다. 서북의 구석에 숨어서 병력과 힘을 비축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가 주도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바로 모택동의 '마작전'만 하라는 지도사상을 어기면서 진행한 것이다. 이 전투는 중..
2023. 1.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