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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원명원(圓明園) 이야기

by 중은우시 2024. 2. 20.

글: 전심생(田沈生)

얼마전 인터넷에서 유머 하나를 보았다: 소명(小明)이 역사수업때 잠이 들었다. 선생님은 그것을 보고 돌연 질문을 했다. 소명학생 원명원은 누가 불태우고 파괴시켰지? 잠에서 덜 깬 소명은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급히 대답했다: 제가 불태우고 파괴한 게 아닙니다. 절말 제가 안했습니다. 선생은 화가나서, 수업이 끝난 후, 소명의 부친에게 전화를 걸어서, 당신 아들이 원명원을 그가 불태우고 파괴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소명의 졸부 부친은 화를 벌컥 내면서 말했다: 이 자식이 또 말썽을 부렸군요. 그 놈이 불을 질렀건 아니건간에 선생님이 말씀해 주십시오. 얼마를 배상해주면 됩니까. 우스개는 우스개인데, 이는 나의 원명원에 대한 몇 가지 기억을 환기시켰다.

원명원을 얘기하자면, 나의 청소년시기 가장 익숙한 곳이다. 당시 원명원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서, 몰락한 모습이었다. 담장은 무너져 있어, 곳곳에 허물어진 곳이 있었다. 원명원내에는 잡목이 자라고, 잡풀이 가득하여 황량했다. 우리는 자주 거기로 가서 귀뚜라미를 잡고, 토끼를 잡곤 했다. 이곳저곳을 탐험하면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잊을 정도였다. 소학교때 원명원의 폐허 위에서 애국주의교육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일찌기 원명원내의 서남쪽에는 베이징시에서 손가락에 꼽는 원림식 중고등학교가 있었다. 바로 베이징101중학이다.

베이징101중학을 얘기하자면, 정말 범상치않은 내력을 지닌 학교이다. 1946년 3월 20일에 개교하였는데, 전신은 장가구시립중학(張家口市立中學)으로, 중국공산당이 혁명구에 창건한 곳이다. 서백파(西柏坡)에서 중공중앙을 따라 베이징으로 옮겨온 유일한 학교였다. 1955년, 학교는 정식으로 "베이징101중학"으로 개명한다. 주은래총리가 직접 기초를 놓고, 전인대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이자 대문호인 곽말약(郭沫若)이 학교명을 써주었고, 교가를 작사해주었다. 저명한 작곡가인 이환지(李煥之)가 곡을 붙여서, 지금까지도 불려지는 교가가 완성된다. 그리고 101은 보통중학의 서열이 아니다. 그 의미는, "백척간두, 갱진일보(百尺竿頭, 更進一步)"이며, 학교는 이를 교훈으로 삼는다.

베이징101중학은 부지면적이 20만평방미터이고, 캠퍼스내에는 언덕도 있고, 호수도 있다. 버드나무와 잔디도 깔려 있고, 연꽃이 핀다. 자연경치가 아주 아름답다. 학교안의 건물은 수업동, 사무실, 식당, 강당, 도서관, 숙사건물외에 음악교실과 400미터의 트랙과 수영장이 있는 체육관도 있다. 이는 당시 베이징의 중학교 캠퍼스중에서는 극히 보기 드문 경우였다. 이를 보면, 막 베이징에 입성한 중공지도자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학력은 높지 않아도,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교육은 아주 신경썼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큰 기대를 걸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관자녀를 위한 이런 학교를 만들었던 것이다.

초대교장인 왕일지(王一知)도 보통인물이 아니다. 그는 중공원로 장태뢰(張太雷)의 부인이고, 유소기(劉少奇)의 입당소개인이다.

보도에 따르면, 왕일지 교장의 첫남편인 시존통(施存統)은 저명한 작곡가인 시광남(施光南)의 부친으로 역시 중공초기 지도자중 한명이다. 부부가 상하이에서 지하공작을 할 때, 젊고 예쁜 왕교장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장태뢰와 광저우로 가서 동거한다. 시존통은 이로 인하여 눈이 멀고, 결국 병으로 인하여 단중앙서기직을 사임하고, 1923년 상해대학의 교수가 되어 구추백(瞿秋白)의 뒤를 이어 사회학과주임이 된다. 저명한 작가 장빙지(蔣氷之, 丁玲)도 그의 제자중 한명이다. 그가 교편을 잡고 있는 동안에 학생이던 종복광(鍾復光)의 마음을 얻는다. 두 사람은 뜻이 통해서 부부로 합쳐진다. 그러자, 두 눈이 신기하게도 다시 회복된다. 그래서 이름을 시부량(施復亮)으로 개명한다. 1940년 시광남이 중경에서 출생한다. 재미있는 것은 시광남이 101중학에 입학했을 때 바로 왕지일이 교장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모자'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았을까?

1960년대초에 평등을 고취하고, 특권에 반대했다. 아마도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일정수량의 평민자제도 입학시키게 된다. 그러나 점수에 대한 요구조건은 아주 엄격했다. 필자는 운좋게도 그곳에서 5년간 생활했다. 당시 가장 인상깊었던 일은 매 주말마다 수업동앞의 광장에 검은색 승용차가 가득찼다는 것이다. 보모, 경위등이 와서 도련님, 아가씨를 모셔갔다. 그때 승용차를 가졌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신분의 상징이다. 우리같은 일반인들은 자전거를 타고 그 승용차들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그때부터 사회주의가 제창하는 '평등'은 기실 그럴듯한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책을 많이 읽다보니 연안시기에 이미 등급이 삼엄한 제도를 만들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눈치없는 문인은 공개적으로 "의분삼색(衣分三色), 식분오등(食分五等)"의 연안특권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결국은 목이 잘렸다. 그가 바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왕실미(王實味)이다. 가장 불쌍한 것은 그의 부인은 자식을 데리고 해방이 되기만을 학수고대했는데, 해방이 되고나서야 자신의 남편이 죽은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제로 되돌아오면, 당시 101학교의 캠퍼스 바깥은 채소밭이었다. 마을의 이름은 괘갑둔(掛甲屯)이었다. 거기에 저택이 하나 있는데 오가화원(吳家花園)이다. 이 집은 명나라때 장수인 오삼계(吳三桂)가 자신의 애첩인 진원원(陳圓圓)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아무도 살지 않고 황량해졌고, 낡고 허물어져 있었다. 이곳은 오삼계의 홍안일노(紅顔一怒)의 이야기를 제외하고도, 또 하나의 쓸쓸한 이야기가 있다. 1959년 여산회의가 끝난 후, 일찌기 국방부장의 높은 자리에 있던 팽덕회(彭德懷) 원수는 하룻밤만에 당국의 이류(異類)로 전락한다. 관직에서 파면된 후 중남해에서 쫓겨나, 괘갑둔의 오가화원으로 옮겨온다. 장군이 실세하여 괘갑둔(괘갑은 갑옷을 걸어둔다는 의미임)에 은거했으니, 그 이름에 들어맞았다.(아마도 위에서 고의로 그를 모욕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가장 비참했던 일은 팔로군총사령관을 따라 북경까지 온 그의 처는 남편이 관직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스스로 글을 써서 이혼을 요구한다. 당시 북경사범대학 당위서기로 있던 포안수(浦安修)는 당성이 인성보다 높아야 한다는 원칙하에 남편인 팽덕회와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 그리고 팽덕회원수가 잘라준 반쪽짜리 압리(鴨梨)를 스스럼없이 집어삼키고 떠난다. 전장에서 일생을 보내고, 자식도 없던 팽덕회는 처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면서, 황량하고 무너져가는 집에서 장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가화원아 오가화원아 지금 정말 무가화원(無家花園, 중국발음으로 오가화원과 같음)이 되었구나.

그때 괘갑둔 부근의 사람들은 자주 팽덕회가 경위와 함께 산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앞뒤로 서서 걷는데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나이도 어리고 호기심도 많아서, 자주 오가화원의 밖에서 붉은 담장 건너로 안을 쳐다보곤 했다. 집안페는 돌계단이 무너져 있었고, 마당에는 잡풀이 가득했다. 밥짓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고, 사람이 사는 흔적은 없었다. 스산한 바람이 궤이하게 부는 느낌이 있어서, 원래 몰래 뛰어들어가려고 하던 귀뚜라미조차 용기를 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 <요재지이>에서나 볼 수 있는 공포스러운 화면은 소년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있고 지금까지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팽덕회는 이런 상황에 처했지만 그래도 비극을 피할 수는 없었다. 천하에 반장(叛將)을 남겨두는 법은 없지 않은가? 팽덕회는 오가화원에서 2년여간 유배생활을 했고, 결국은 전쟁준비를 핑계로, 서북삼선으로 다시 유배된다. 명목상으로는 부총사령관이지만, 실권은 전혀 없다. 어쨌든 관직이 없으면 몸이 가볍다. 권력핵심에서 멀어져서 아무런 욕심도 없이 평안하게 생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 사상유례없던 재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문혁이다. 모택동이 찬양한 홍위병조직, 북항<홍기>는 그를 붙잡아 북경으로 끌고 온다. 그리고 끊임없이 비투를 한다. 무릎을 꿇리고 뺨을 때리며, 세 개의 늑골이 부러지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고 만다.

권력투쟁의 패배자가 온전하게 물러나고자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혁때, 국가주석읜 높은 자리에 있던 유소기도 헌법을 손애 쥐고서도 자신의 권익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저 물러나서 고향에서 말년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조직에서는 특별히 그의 생일을 골라 그의 당적박탈을 선포한다. 그것도 영구박탈이다. 그가 처량하게 죽었을 때는 어찌된 일인지 무직백수 유위황(劉衛黃)이 되어 화장당하여, 유골조차 남기지 못한다. 모택동의 명언이 있다: 육억인구에 안싸우고 되는가? 일찌기 헌법에 기재되었던 후계자인 부총사령관도 하룻밤만에 사막에서 목숨을 잃는다. 처와 자식과 함께. 끊임없는 권력투쟁은 너죽고 나살기이며 냉혹무정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만든다. 그런 말이 이해가 된다. 경성에서 관직에 있는 것은 반군여반호(伴君如伴虎)이다. 자금성은 진성(秦城, 감옥이 있는 곳)에서 단지 한걸음 떨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진성에 비하여 자금성은 경산(景山, 숭정제가 목을 매어 자결한 곳)이 더욱 가깝다.

지금, 원명원은 이미 재건되어, '고대상(高大上)'의 방고건축군공원으로 변모했다. 나는 일찌기 표를 사서 한바퀴 돌아본 적이 있다. 정대루각(亭臺樓閣)은 화려하고, 초복은 푸르고, 호수물은 찰랑거린다. 인조경관은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기억속의 원명원은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