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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마초(馬超): 유비에게 온 이후 활약하지 못한 이유는...?

by 중은우시 2021. 2. 15.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은창종횡지(銀槍縱橫志), 북망진루천(北望盡淚泉)

 

광위안(廣元)에서 수십년간 살다보니, 이곳의 산수는 아주 친근하게 여겨진다. 광위안은 관광자원도 풍부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삼국문화이다.

 

광위안은 양평관(陽平關)과 검문관(劍門關)의 사이에 위치한다. 그 가운데 있는 소화고성(昭化古城)은 삼국시대때 가맹관(葭萌關)이라 불렸다. 이곳은 나관중이 <삼국연의>에서 멋진 장면을 쓴 곳이기도 하다. 즉 장비가 마초와 싸운 곳이다. 그래서 광위안의 사람들은 마초에 대하여 얘기하기를 즐긴다. 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인물이다. 비록 이 장면은 나관중이 창작한 것이지만.

 

<삼국연의>의 정수는 전반부이다. 마초도 그 정수중의 하나이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은 돌연 나타나서는, 일단 유비에게 의탁한 이후 전혀 활약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주의하지 않으면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삼국의 난세에 곳곳에서 전투가 일어나고, 영웅이 배출된다. 마초는 바로 그런 영웅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서부 변방에서 성장했고, 중원에서 최고권력을 두고 다툴 때 그는 그저 조역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관료자제로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전투에 나서서, 영토를 확장했다. 여러 군벌들과 싸우면서 영웅의 본색을 드러냈고, 그의 풍류를 한껏 과시한다.

 

그의 부친 마등(馬騰)이 경성으로 가서 조조의 의탁하면서, 그는 독자적으로 부친이 남겨놓은 집안의 병력을 이끌고 서북에서 할거하며 조조와 대항한다. 다만 계속 패배했다. 먼저 장로(張魯)에 의탁하고, 다시 유비에 의탁한다. 관직은 표기장군(驃騎將軍), 양주목(凉州牧)에 이르나 아쉽게도 4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시호는 위후(威侯)이다.

 

삼국인물중에서 무장의 전투력에 관해 영향력이 아주 큰 랭킹이 있다. 즉 "일여이조삼안사마오전위(一呂二趙三顔四馬五典韋), 육허칠장팔관구황십방덕(六許七張八關九黃十龐德)" 당연히 근거는 소설이다. 다만 마초의 용모는 공인된 미남이다. "얼굴은 분을 바른 것같이 하얐고, 입술은 주사를 바른 것처럼 붉다. 허리는 가늘고 팔뚝은 굵다. 목소리는 우렁차고 힘이 대단하다. 흰 옷과 은색 갑옷을 입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금마초(錦馬超)라는 별명이 붇는다.

 

부친과 같이 조조를 모시지 않고, 부친이 남긴 무리를 이끌고 조조의 조정과 끝까지 대항해 싸웠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이는 오직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마초가 보기에 조조는 한적(漢賊)이고, 한(漢)나라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부친의 뜻에 위배되지만 독립적으로 행동하겠다고. 다만 힘이 약하여, 기세를 이루기는 어려웠다.

 

결국 마초는 유비에게 의탁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더 이상 휘황함은 보이지 않는다. 궤이한 것은 한편으로 적막하게 죽어갔는데, 다른 한편으로 관직은 계속 올라갔다는 것이다. 사호장중에도 들어간다. 소설에서 여포의 바로 다음간다는 조운보다 훨씬 높은 직위를 누린다.

 

정사에서 마초의 전투력은 그다지 자랑할만한 것이 없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다. 그저 무공에 의존하여 천하를 누빈 용장은 아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한나라초기의 영포(英布)와 비슷한 류의 인물로 묘사했다.

 

나관중은 마초를 아주 좋아한 것같다. 소설에서 그는 계속하여 마초에 관한 장면을 넣고 그를 높여주었다. 장비와도 싸우고, 허저와도 싸우며, 조조가 수염이 잘리고 겉옷을 버리고 도망치게 만들게도 한다. 이 얼마나 대단한 영웅인가. 그리고 조조와 적이 된 연유에 대하여도 아주 좋은 이유를 만들었다. 조조가 부친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초는 효자로서, 조조와 끝까지 싸운 것이고, 집안과 나라의 원한을 모두 갚으려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허구이다. 한나라황실을 쇠퇴해서 거의 사라질 지경이었다. 이는 모두가 보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중에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했따. 마등이건 한수(韓遂)이건, 장로이건 유창(劉彰)이건 모두 그 기회를 틈타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단지 그들은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조가 일시에 군대를 이끌고와서 처리할 수 없었을 뿐이다.

 

마등과 한수는 비록 조조에게 신복할 때, 마등은 마초를 보내 원소를 치게 하기도 했다. 단지 나중에 이들 서북의 호강(豪强)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각자 출로를 찾게 된다. 혹은 자립하고, 혹은 누군가에 의탁한다. 마초와 한수는 동맹군을 조직하여 함께 조조를 쳤다. 그러나 조조의 반간계에 걸려들어 사분오열되고 참패해 버린다.

 

어쩔 수 없이 마초는 장로에 의탁한다. 이때 그의 부친은 아직 조조가 장악한 조정에서 관리로 있었다. 그래서 마초가 효자이고 부친의 복수를 위해서라는 등의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마초가 조조와 적이 되면서, 마등에게 좋지 않게 된 것이다. 마초, 한수의 연합군이 동관에서 참패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는 마들을 죽여버린다. "마등을 주살하고, 삼족을 멸했다." 그의 가족들도 모두 비명에 간다. 마초 본인도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서, 인심을 점점 잃게 된다. 그리고 점점 일방제후의 위망도 잃어버린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누군가에 의탁하여 조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초는 부친 마등에 의존하여 성장했다. 그는 전투에 용맹했다. 죽어라 싸우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여러번 부상도 잆었다. 그는 싸우면서 명망을 쌓아갔다. 그리하여 서북일대에서는 큰 영향력이 있었다. 특히 강족(羌族) 부락내에서는 모두 그를 꺼렸다. 그의 가족은 강족과 혼인을 계속해왔다. 역사기록에는 "마초는 한신,영포의 용맹함이 있었다. 그래서 강족 오랑캐의 마음을 크게 얻었다."

 

장로에 의탁하건 유비에 의탁하건, 기실 마초에게는 이미 좋은 패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정수는 이미 다 써버렸다. 그리하여 이용가치가 크게 약화된다. 즉 그에게 남아있는 약간의 영향력뿐이다. 유비는 그 잉여가치를 최대화했다. 관직을 계속 올려주었지만, 그를 중용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벌어진 전투에서 거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중용되지 못한 것은 그의 가치가 높지 않은 것도 원인의 하나이다. 그러나 본인의 생각에 더욱 중요한 원인은 유비의 눈에, 마초의 인품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고 본 것이 근본원인일 것이다. 즉, 마초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결함이 있다.

 

그러나, 마초는 스스로 자신을 유비가 어떻게 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시종 겸손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일관되게 '신(信)'과 '의(義)'를 제창하는 유비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자신에게 투항해온 옛날의 군벌을 그다지 신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모든 수단방법을 다해서 유비에게 충성심을 나타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유비는 그가 소수민족들 사이에 가지고 있는 명망을 기꺼이 이용했다. 설사 마초가 앞장서서 유비에게 한중왕이 되라고 권했지만, 그는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했다. 마초는 그저 좌장군에 임명되고, 유비를 대신하여 서량(西涼)을 지켰을 뿐이다. 이는 둘 다에게 좋은 일이다. 그러니 유비가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괴도반덕(乖道反德, 도덕에 결함이 있다)"과 "용이불인(勇而不仁, 용맹하나 인자하지 못하다)" 이 당시 사람들의 마초에 대한 평가이다. 마초는 간접적으로 부친과 동생을 죽게 만들었고, 나아가 일백여명에 이르는 가족들까지 주살되게 했다. 그리고 친구인 팽양(彭羕)을 팔아넘긴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한수를 버렸고, 장로를 배반했다. 후인들은 여포에 대하여 '무정무의'하다고 욕하지만, 마초와 비교하자만 여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마초의 전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삼국연의>에서는 나관중이 띄워준 것이다. 다만 필자는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마초를 인정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어떤 때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질만큼 가지고, 내려놓을만큼 내려놓는다. 상황을 정확피 파악하고 현상에 적응한다. 그래서 <삼국지>의 작자인 진수(陳壽)는 이렇게 평가한다: "마초는 강력한 군대와 용맹함을 가졌지만, 집안이 풍비박산났다.  이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그가 궁박한 지경에 몰려 명리를 추구하지 않고 다투지 않았으니, 그래도 몸을 보전할 수 있지 않았던가." 이는 마초의 지혜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