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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홍문19

모택동의 임종유언의 역사진상 글: 학길림(郝吉林) 1976년 9월에서 10월, 중국정계는 한 마디 말을 둘러싸고 경심동백(驚心動魄)할 투쟁을 전개한다: 그것은 "기정방침에 따라 처리한다(按旣定方針辦)"는 말이다. 이 말의 영향력은 아주 크고 깊어서, 지금 생각하면 탄식이 나온다. 그리고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모두 .. 2012. 4. 23.
모택동 사후의 사인방(四人幇) 글: 서염(徐焰) 1976년 9월 9일, 모택동(毛澤東)이 서거한 후 1시간여가 지난 새벽2시경 중앙정치국은 202루(樓)에서 긴급회의를 개최하여, 장례문제를 논의했다. 강청(江靑)은 회의에서 울며불며 소란을 피웠다. 그녀는 모주석이 등소평(鄧小平)때문에 화가 나서 죽은 것이라고 말하.. 2012. 1. 24.
주은래 사망당일의 중국고위층동향 글: 여위(余偉) 1976년 1월 8일 9시경, 주은래가 입원해있는 병실 바깥의 벨이 돌연 울렸다. 이는 긴급상황을 대비하여 만들어놓은 벨이다.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모두 빠른 걸음으로 병실로 달려갔다. 거의 동시에 계기상의 심박수가 나타났다: 70여회. 계속하여 100여회를 .. 2012. 1. 8.
주은래의 총리지위를 위협했던 두 인물 글: 김산(金汕) 주은래는 신중국의 제1대 총리로서, 27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 이는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27년간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일반적으로 문화대혁명시기에 그의 자리는 가장 큰 위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왕홍문(王洪文.. 2011. 3. 21.
장춘교(張春橋)의 죽음 글: 섭영렬(葉永烈) 2005년 5월 10일, 신화사는 북경발로 <<임표,강청반혁명집단사건의 주범 장춘교 병사>>라는 기사를 송고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임표, 강청 반혁명집단사건의 주범 장춘교가 암으로 2005년 4월 21일 병사하였다. 장춘교. 88세, 1981년 1월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사형, 2년.. 2011. 1. 12.
왕홍문(王洪文)은 어떻게 후계자의 자리에 올랐는가? 글: 김산(金汕) 1972년 9월, 중앙정부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왕홍문을 북경으로 불러들인다. 제10기 1중전회에서 왕홍문은 당의 부주석에 오른다. 그의 서열은 모택동, 주은래의 바로 다음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모택동의 '후계자'로 떠오른다. 그 당시 주은래는 이미 불치의 암을 앓고 있었으며, 얼마.. 2009. 12. 21.
모택동은 왜 화국봉을 후계자로 선택했는가? 글: 축을(丑乙) 모택동의 첫번째 후계자는 유소기(劉少奇)였는데, 모택동에게 타도당하고, 옥중에서 죽었다. 두번째 후계자는 임표(林彪)였는데, 역시 모택동에게 타도당하여, 놀라서 도망치다가, 비행기가 추락해서 죽었다. 이것이 "임표반혁명사건"이다. 임표사건은 모택동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 2009. 11. 14.
1976년: 다사다난했던 한 해 글: 진청빈(陳淸貧) 1976년 9월 9일, 나는 9살이었고, 소학교 3학년이었다. 이 해에 나이 겨우 9살이었던 나에게는 기억이 아주 선명하다. 왜냐하면 그 해에 너무나 많은 놀라운 사건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해에 일어난 일로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문신무장개.. 2008. 10. 19.
모택동의 다섯 명의 후계자 손가락으로 꼽아보면, 화국봉(華國鋒, 화궈펑)은 모택동이 다섯번째로 선택한 후계자이다. 유소기(劉少奇, 류샤오치)가 모택동이 선택한 첫번재 후계자이고. 1945년 중공칠대(中共七大, 중국공산당 제7차 전당대회)에서, 유소기는 모택동의 후계자라는 신분으로 나타났다. 그때 유소기를 위해서 여론을.. 2008.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