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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1976년: 다사다난했던 한 해

by 중은우시 2008. 10. 19.

 

 

 

글: 진청빈(陳淸貧)

 

1976년 9월 9일, 나는 9살이었고, 소학교 3학년이었다. 이 해에 나이 겨우 9살이었던 나에게는 기억이 아주 선명하다. 왜냐하면 그 해에 너무나 많은 놀라운 사건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해에 일어난 일로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문신무장개도(文臣武將開道)

거성종천이강(巨星從天而降)

24만인순장(24萬人殉葬)

 

문신과 무신이 길을 열고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24만명이 함께 죽는다.

 

먼저 민간전설의 앞머리에 나오는 "문신"은 주은래(국무원총리)이고, 1976년 1월 8일 서거했다; "무장"은 주덕(해방군총사령)으로 1976년 7월 6일 서거했다.

 

이 두 위인이 연이어 사망하는 중간에 국내외를 놀라게 하는 길림에서의 대운석사건이 벌어진다. 즉, 1976년 3월 8일 오후, 방대한 운석 하나가 자기의 궤도를 따라 지구의 뒷면에서 지구를 쫓아왔고, 아주 빠른 속도로 대기층을 �고, 15시 02분 36초에 운석의 낙하가 발생했다.

 

당시의 관련보도에 따르면, 그날, 많은 백성들은 자기 눈으로 운석이 떨어지는 장면을 보았다. 그들의 기억에 따르면 가장 먼저 하늘의 동북부에서 돌연 하나의 붉은 색 불덩이(火球)가 나타났는데, 빛이 사방으로 비치고, 아주 눈이 부셨으며, 보름달보다 컸다. 불덩이의 뒤에는 한줄기의 띠가 늘어져 있었고, 짙은 연기가 섞여 있었다.

 

불덩이는 이동과정에서 거대한 온도와 외력의 작용으로 운석체에서 여러번 폭발이 일어났다. 운석의 주체는 길림시 용담구 금주향의 상공에서 폭발했는데, 하나의 노란색 큰 불덩이가 돌연 강렬한 섬광을 일으키더니 3개의 작은 불덩이로 되었고, 서남으로 빛띠를 끌며 비행했다.

 

이것이 바로 길림운석중 가장 큰 3개의 운석이다. 현재는 길림1호, 길림2호 및 길림3호로 명명된 운석이다(주은래, 주덕, 모택동의 세 별의 운석?)

 

길림1호 운석은 길림시 영길현 화피창진 고산촌 십사에 떨어졌다. 3월 8일 북방에서 날씨가 막 따스해지기 시작했는데, 1호운석이 1.7미터의 동토층을 뚫고, 지하 6.5미터 아래로 뚫고 들어갔다. 구덩이의 직경은 2.1미터이고, 당시 사건발생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목격자인 항영춘 노인에 따르면, 길림1호 운석이 땅에 떨어진 후 멀리서 보면 연기가 점차 작은 버섯구름을 형성했는데, 높이가 약 50미터 가량이었고, 연기와 먼지는 아주 농도가 짙었다. 튀어나간 흙부스러기는 가장 먼곳은 150미터까지 이르렀다.

 

중국길림운석의 낙하이전에, 미국에서 1948년 2월 28일 발견된 노튼 스톤 운석이 세계에서 가장 큰 것으로 인정받았다. 무게가 1079킬로그램이다. 다만, 길림운석낙하이후, 세계최대의 운석이라는 칭호를 넘겨주어야 했다. 그것은 2000여킬로그램이라는 세계최고기록을 달성한데 이어 또 다른 한가지 세계최고기록과 하나의 기적을 창조했다. 바로 현재 세계 최대의 운석우(隕石雨)였고, 운석우가 내린 지역범위가 아주 넓어서 동서로 72000미터, 남북으로 8500미터에 이르렀고, 총면적이 500평방킬로미터의 토지에 이르렀다.

 

길림운석은 수량, 중량, 산포범위 및 과학기술함량에 있어서 모두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경우였다. 길림운석비가 내릴 때, 하늘과 땅을 덮는 큰 소리가 났다. 수백리 바깥에서도 분명히 들었다. 땅에 떨어지는 큰 소리와 진파는 많은 주택의 유리를 깨트렸다. 장면이 거대하고, 위력이 엄청나서 마치 원자탄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놀라움에서 깨어나기도 전인 1976년 7월 28일, 중국 하북성 당산시에서 진도 7.8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한다. 지진파는 천진, 북경에 미쳤고, 모두 24.2만명이 사망했으며, 16.4만명이 부상했다.

 

이상이 바로 나중에 민간에서 말하는 "문신무장개도, 거성종천이강, 24만인순장"의 이야기의 유래이다. 그리고 당산대지진은 당시에 전국에서 거의 모든 인민이 지진을 방비하느라 인심히 흉흉하여 극도의 불안에 떠는 상황이 되었다.

 

필자는 당시 호북성 효감의 안륙션에 있었다. 우리는 3층집의 1층에 살았으므로, 아주 긴장하고 있었다. 저녁에는 감히 잠들지를 못하고, 방의 구석에 몇 개의 술병을 놓아 두었다. 부모는 우리에게 당부했다: 술병이 땅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바깥의 광장으로 나가라고 하였다.

 

생각도 못하게 어느날 깊은 밤에, 한 쥐가 삼층의 모 집에서 술병을 건드렸다.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구르는 소리에 우리 식구는 모두 벌떡 일어나서, "지진이다"라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결국 모두 다리가 부러졌다. 이것이 현지에서는 우스개꺼리가 되었다.

 

바로 이런 초목개병의 공황분위기 속에서 1976년 9월 9일 오전, 방송에서는 중대소식을 공포할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모두 의론이 분분했다. 절대다수는 모두 무슨 새로운 지진소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중 일부 마음이 급한 사람들은 물건을 수습해서 언제든지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우리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마지막에 공포된 소식은 청천벽력이었다. 모주석이 서거한 것이다.

 

하늘이여, 우리는 당시 열심히 공부하고 매일 노력하는 목적이 바로 좋은 성적으로 모주석에게 보답하는 것이었다. 모주석이 죽었는데, 우리가 계속 공부해서 뭐하겠는가? 좋은 성적을 거두더라도 누구에게 보여주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그때 맹서를 할 때는 "모주석에게 보증한다"고 하였다. 모주석이 죽었는데, 우리는 이후에 어떻게 맹서를 하는가? 나중에 다시 "화주석에게 보증한다"고 말하기는 하였지만, 이전처럼 진정이나 신뢰도가 없었다.

 

그때 나는 9살이었다. 느낌은 하늘과 땅이 무너졌다는 것이었다. 마치 세계종말이 온 것같았다. 몇년 후 나의 부친(모주석을 한번 뵌 적이 있었다)은 그 날의 정경을 이렇게 결론내렸다: "하나의 단어로 나의 당시 상태를 형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행시주육(行屍走肉, 걸어다니는 시체)'이다. 모주석이 죽었는데, 우리가 살아서 뭐할 것인가?"

 

그날, 우리는 현지의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자살하였다고 들었다. 후세에 약간의 탄식거리를 남긴 것이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주석이 서거하는데, 그는 뱀의 해(1893)에 태어나서, 용의 해(1976)에 죽었다. 작은 뱀이 자라서 큰 용이 된 것이다. 결국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날 우리의 960만킬로미터의 산하는 빛을 잃었다. 전국이 곡성을 뒤덮였다. 우리는 처음으로 하얀 견지로 하얀 꽃을 만들었다. 크고 작은 화환을 만드는 외에 한 사람이 한 송이씩을 꽂았다. 그 후에 팔에는 검은 천을 둘렀다. 곡성이 하늘을 울렸고, 어른들은 길거리에서 추도회를 했다.

 

이후 우리같은 아이들은 모두 흑백티비 앞에 모여 앉아서, 티비에서 왕홍문이 말을 길게 끌면서 하는 지시를 들었다. 함께 텔레비전을 향하여 절을 세번 했다.

 

모택동(毛澤東)의 세글자의 번체자 필획은 28획이다. 그래서 모주석의 필명의 하나는 바로 "이십팔획생(二十八劃生)"이다. "이십팔(二十八)"은 공산당의 "공(共)"자이기도 하다. 그는 1893년생이고, 1921년에 입당하였으니 28세때의 일이다. 1921년에서 1949년까지 28년만에 전중국을 해방시키낟. 1949년에서 1976년까지 27년반이다. 모택동의 일생은 3개의 "28"로 나눠볼 수 있다.

 

모택동의 위수부대는 "8341부대"라고 부르는데, 모주석은 83살까지 살았고, 41년간 재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