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왕홍문(王洪文)은 어떻게 후계자의 자리에 올랐는가?

by 중은우시 2009. 12. 21.

글: 김산(金汕)

 

1972년 9월, 중앙정부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왕홍문을 북경으로 불러들인다. 제10기 1중전회에서 왕홍문은 당의 부주석에 오른다. 그의 서열은 모택동, 주은래의 바로 다음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모택동의 '후계자'로 떠오른다. 그 당시 주은래는 이미 불치의 암을 앓고 있었으며, 얼마후 세상을 떠난다. 모택동은 임표사건후 심신에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사람들은 왕홍문이 장래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느낀다.

 

중국인들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모택동의 이전 후계자는 유소기, 임표였는데, 유소기는 모택동과 동시대의 지도자이고, 임표는 비록 경력은 약간 적지만, 전공이 뛰어났다. 당내 그리고 일반백성들이 모두 인정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나이 겨우 38세에 경력이 일천한 왕홍문이 어찌 등소평, 섭검영과 같은 사람들보다 윗자리에 앉는단 말인가? 모택동이 그를 선택한 중요한 근거는 그가 공농병(工農兵)을 다 거쳤다는 것인데, 이런 조건을 갖춘 사람은 전국에서 수십만은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에피소드는 의미심장하다. 몇년후 왕홍문은 진성감옥(秦城監獄)에 갇히는데, 임표의 부하인 몇몇 핵심인물들과 함께 갇혔다. 비롣 당시에 임표집단, 사인방을 모두 합쳐서 '반당집단'이라고 불렀지만, 두 집단은 물과 기름이었다. 감옥안에서도 이작붕 장군은 장춘교를 욕했다. 성격이 좋았던 오법헌 장군은 키가 작았다. 모기를 쫓는 것이 힘들어서 매번 키가 큰 왕홍문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그는 한번은 왕홍문에게 속에 있는 말을 물어본다: "이 나라는 이렇게 크고, 능력있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너는 네가 이 국가를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이때는 왕홍문도 인정했다. 그러나, 1973년의 왕홍문은 정말로 자신이 중화대지를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사람들은 나중에 왕홍문이 후계자가 된 것은 웃음거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왕홍문의 출현은 확실히 그 내재적인 논리가 있다.

 

우리는 먼저 그가 성공한 초기를 보자.

 

1966년 가을 일련의 파도가 하나 또 하나 밀려온다. 일부 담대하여 함부로 행동하는 노동자, 기관업무인원도 여기에 가담한다. 문혁중에 이름을 날리고 나중에 모택동에게 후계자로 뽑히는 왕홍문도 바로 그 중의 한 명이었다.

 

왕홍문은 1935년 길림성 장춘시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난다. 1951년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고, 한국전쟁에도 참전한다. 1956년 상해국면17창(上海國棉十七廠)에서 보전공, 보위간사를 맡는다.

 

왕홍문의 성공은 섭원재와 비슷하다. 상면17창에 "첫번째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를 붙임으로써 상해에 이름을 날린다. 기세나 영향으로 봐서 그의 "당위원회의 화피(畵皮)를 벗겨내서 진상을 보자"는 대자보는 섭원재의 "첫번째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와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히 그 나름의 독특한 점이 있었다. 만일, 섭원재가 어느 고위층의 정보를 얻은 후에 아무 두려움없이 풍랑을 일으켰다면, 왕홍문의 거동은 큰 리스크를 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후각과 정세판단에 근거하여, 자신이 두각을 드러낼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평민백성이었고, 친척친구들 중에서 특권과 관련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부친처럼 평범하게 살면서, 일생동안 시미유염(柴米油鹽)을 구하려 뛰어나니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농촌에서 나와서 군인이 되고, 다시 중국최대도시 상해로 온다. 이것만 해도 농촌의 이웃들에게는 부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왕홍문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큰 일을 해내서 조상을 빛내고, 후손들이 음덕을 입을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왕홍문의 '잔머리'는 젊었을 때부터 두드러졌다. 그는 지원군에 있었는데, 그의 전우들의 회고에 따르면, 한번은 부대가 산골짜기에서 미군의 포격을 받고 있을 때, 그는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포격이 끝나자 그는 어디에서인지 모르게 다시 나타났다. 또 한번은 부대에 균이 묻은 물건이 떨어졌다. 그는 전염을 두려워해서 어디론가 모르게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청소가 다 끝날 때쯤 다시 나타나서 일하는 척했다. 장춘사람이 상해로 갔다면 그 자체로 만족할 것이다. 그러나 왕홍문은 "나는 노동자가 되고싶지는 않다. 정치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결혼할 때, 모친을 상해로 모시고 오는데, 집이 비좁아서, 모친은 상해에 며칠 머무르지 않고 장춘의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왕홍문은 집안의 장남이다. 장남으로서의 의무 즉 모친을 부양하지 못한데 대하여 마음아파했다. 기차역에서 왕홍문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모친에게 말한다: "내가 두각을 나타내면, 반드시 어머니를 모셔서 행복하게 살게해드리겠다"

 

마침내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1966년 6월 2일, 왕홍문은 <<인민일보>>에서 섭원재등 7명이 쓴 대자보와 <<인민일보>>평론원의 글을 읽는다. 비록 수천리 바깥에 있는 대학캠퍼스에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상해공장안에 있는 왕홍문은 신속히 판단한다: 북경대학은 오사운동의 발원지이다; 북경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이다; 인민일보는 중공중앙의 기관지이고, 당의 입이고 혀이다. 기회는 놓치면 다시 오지 않는다. 제왕장상에 씨가 따로 있단 말인가? 왕홍문에게 비록 뒷배경은 없고, 그럴듯한 친척도 없지만, 그에게는 야심이 있었고, 생각을 행동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었다. 열흘후, 1966년 6월 12일 10시, 왕홍문은 스스로 앞장서고 역시 7명이 서명한 상면17창의 첫번째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가 공장의무실벽에 나타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대자보에는 원래 6명의 서명이 있었는데, 왕홍문은 섭원재를 따라하고자 했고, 반드시 7명을 만들려고 했다. 마침 재무과의 한 출납원이 보위과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왕홍문이 그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마침내 7명을 채웠다고 한다.

 

나중에, 사람들은 왕홍문의 이런 행동을 동시효빈(東施效)이라고 비하한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볼 것은 아니다. 이 정치생애의 첫걸음은 왕홍문의 정치수완을 드러낸다. 남을 따라하는 것은 문예작품에서는 백안시되는 것이지만,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방식이다. 왕홍문도 그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동시에 백성들의 심리를 잘 파악했다: 연상하기를 좋아한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면, 그가 제백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칭찬한다. 7명이 서명하게 되자, 대자보를 본 군중들에게 연상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 사태의 발전도 그러했다. 대자보는 상면17창의 첫번째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자보로 불리운다. 왕홍문은 이 하나로 풍운인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