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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초44

양계초(梁啓超) 손자: 우리 3대는 모두 실패자이다 글: 추체독서(抽屉讀書) ​ 양씨삼대인물 ​ 양계초는 위난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하여 사방에 호소했었다; 양사성(梁思成)은 사라질 위기에 직면한 전통성시건축물을 구하기 위하여 사방에 호소했었다; 양종계(梁從誡)는 세상만물이 생존을 의지하는 자연환경을 구하기 위하여 사방에 호소했었다. ​ 양씨집안의 혈맥에 뿌리내린 집착, 정직과 용감하게 말하는 태도는 중국의 지식인이 마땅히 가져야할 모습이다. ​ 이는 거의 백년간 사람들에게 잘못 읽혀온 시이다: ​ "너는 나무 하나 하나에서 핀 꽃이고, 제비가 대들보 사이에서 지저귄다. 너는 사랑이고, 따스함이고, 희망이다. 너는 인간사월천(人間四月天)이다." ​ 임휘인(林徽因)의 이 문구는 많은 문학청년들이 반복하여 암송한 것이고, TV드라마는 이 말을 사랑의 속삭임.. 2024. 2. 6.
민국(民國)시대 가장 권위있는 10명의 국학대사(國學大師) 글: 방유(方維) 민국시기는 중국문화사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대사(大師)들이 많이 배출되었을 뿐아니라, 개성도 충만했다. 그리하여 춘추전국과 위진남북조의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1. 장태염(章太炎) 1929년, 상해 는 을 발행했다. 에서 108명의 영웅호한을 정한 형식을 모방하여당시 문화계의 대사들의 서열을 매긴 바 있는데, 1위로 선정된 사람이 바로 장태염이었다. 청화대학 국학원이 성립될 때, 가장 먼저 확정된 교수 명단에는 단지 3명이 있었다: 장태염, 양계초(梁啓超), 왕국유(王國維). 그러나, 장태염은 고사하고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뒤의 두 사람은 그와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찌기 양계초에 대하여는 "만일 양계초 같은 무리라면, 역사에 한 글자라도 들어갈 수 .. 2023. 5. 30.
기독교는 어떻게 중국에 전파되었는가? 글: 곽계민(郭繼民) 기독교가 중국에 전파된 과정에 대하여 당금 학계에서는 대체로 2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삼분법으로 기독교는 주로 아래의 3개 시기로 전파를 진행하였다는 것이다. 즉 635년을 전후한 당나라시기, 명말청초, 1849년이후 지금까지. 다른 하나는 사분법이다. 원나라의 '야리가온교(也里可溫敎)'(원나라때 몽골인은 중국으로 온 기독교와 그 신도를 이렇게 불렀다)의 전래도 포함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탁신평(卓新平)선생이 이런 견해를 취한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순수한 역사학의 각도에서 보자면 마땅히 '야리가온교'의 원나라로의 전래를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나 만일 전파의 영향이라는 각도에서 보자면 신축성있게 처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원나라의 '야리가온교'는 영향이 극히 미미했기 때문이.. 2023. 4. 18.
광서제(光緖帝)는 왜 사진을 남기지 않았을까? 글: 지식거륜(知識巨輪) 사진은 그 사람의 일생을 남기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1843년 사진기가 발명된 이래, 서양의 상류층인사들은 자주 이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서 남겼다. 사진기가 청나라에 전래된 후, 서태후는 사진을 많이 찍었고, 지금도 우리는 서태후의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서제의 경우는 몰래 찍은 사진 한장만 남아 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광서제는 청나라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황제이다. 그의 일생은 전설적이면서도 비참하다. 1874년, 동치제(同治帝)가 죽고, 후사를 남기지 못한다. 서태후는 조정대신들과 긴급회의를 열었고,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순친왕(醇親王) 혁현(奕譞)의 아들 재첨(載湉)이 황위에 오르도록 결정한다. 그 말을 듣자 혁현은 땅바닥에 쓰러져 대성통곡.. 2023. 1. 5.
임휘인(林徽因): 민국재녀 일생의 세 명의 남자 글: 왕사차소(往事叉燒) 1 임휘인은 서향문제(書香門第)에서 태어난다. 부친은 기질이 유아(儒雅)하였으며 유명한 재자(才子)였다. 여동생 몇몇도 모두 재능이 뛰어났으며, 일가족이 함께 모이면 함께 시를 지으면서 즐겼다. 오직 그녀의 모친만이 끼지 못했다. 임휘인의 모친은 하설원(何雪媛)인데, 소규모가내공업에 종사하는 집안의 딸이었다. 임씨집안에 시집을 와서 임장민(林長民)의 후처가 된다. 하설원은 글을 몰랐고, 바느질같은 집안일도 잘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남편과도 할 말이 없었다. 매번 임씨집안 사람들이 역사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이 우스워보일 뿐이었다. 처음에 임장민은 하설원에게 설명을 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자 더 이상 그녀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하설원은 .. 2022. 12. 29.
"명청시대폐관쇄국문제신탐": 폐관쇄국 개념의 기원과 변천 2. "폐관쇄국" 개념의 기원과 변천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문헌에서 '폐관쇄국'에 대한 기술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중국전통의 역사개념이 아니다. 17-19세기 서방인은 중국을 묘사할 때 '폐관쇄국'과 대응하는 말을 내놓지 않았다. 중국이 상대적으로 서방의 주변에 있다는 지리적위치로 인하여 서방인들은 자주 중국이 일종의 세계와 '단절된(isolation)' '고립된(seclusion)' '외부영향을 받지 않는(hermetic)' 상태로 인식했다. 여기의 '단절'과 '고립'은 왕왕 '폐관자수(閉關自守)' 혹은 '폐관쇄국'으로 번역되었다. 확실히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이 개념은 서방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폐관쇄국"이라는 개념은 도대체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것의 의미는 또 무.. 2022. 9.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