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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민국(民國)시대 가장 권위있는 10명의 국학대사(國學大師)

by 중은우시 2023. 5. 30.

글: 방유(方維)

 

민국시기는 중국문화사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대사(大師)들이 많이 배출되었을 뿐아니라, 개성도 충만했다. 그리하여 춘추전국과 위진남북조의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었다. 

 

1. 장태염(章太炎)

1929년, 상해 <시보>는 <문단점장록(文壇點將錄)>을 발행했다. <수호전>에서 108명의 영웅호한을 정한 형식을 모방하여당시 문화계의 대사들의 서열을 매긴 바 있는데, 1위로 선정된 사람이 바로 장태염이었다.

 

청화대학 국학원이 성립될 때, 가장 먼저 확정된 교수 명단에는 단지 3명이 있었다: 장태염, 양계초(梁啓超), 왕국유(王國維). 그러나, 장태염은 고사하고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뒤의 두 사람은 그와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일찌기 양계초에 대하여는 "만일 양계초 같은 무리라면, 역사에 한 글자라도 들어갈 수 있으랴?"라고 말한 바 있고, 왕국유에 대하여는 멸시하면서 "부유(腐儒)"라고 불렀다.

 

기실 대사들은 각자 자신의 장점이 있는데, 장태염은 스스로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자신의 국학이 대단하다고 여겨서, 양계초와 왕국유 두 사람을 그렇게 낮춰 평가했던 것이다.

 

2. 양계초(梁啓超)

 

양계초는 청화대학 국학원의 "사대도사(四大導師)"중 으뜸이다. "중화민족"이라는 단어도 그가 처음 꺼낸 것이다. 그의 일생은 고대 독서인의 "나아가면 천하를 도모하고, 물러나면 책을 써서 자신의 학설을 세운다"는 궁극적인 경지에 부합하였다고 할 수 있다.

 

3. 왕국유(王國維)

 

왕국유는 중국근대역사상 최후의 미학가이며 문화사상가로 불린다. 양계초는 그를 이렇게 높이 평가했다: "중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세계를 위한 학인이다."

 

4. 진인각(陳寅恪)

 

진인각은 "교수의 교수", "대사의 대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양계초는 그를 아주 존경했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 양계초는 비록 쓴 책이 내 키만큼 되지만, 나의 모든 저작을 합치더라도, 진선생의 삼백자만한 가치는 없다."

 

5. 진원(陳垣)

 

호적(胡適)은 진원을 이렇게 평가했다: "남방사학은 열심히 힘들여 연구하지만 고대전적을 너무 믿는다. 북방사학은 고대전적을 의심하고, 학문인 너무 누추하다. 남북의 장점을 살리고 그 단점을 버린 사람으로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왕국유와 진원이다."

 

6. 황간(黃侃)

 

황간은 장태염의 제자이다. 성취는 사부에 못지 않았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평가한다: "중국역사가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넘어갈 때, 그 시대를 종결시킨 사조는 맹자와 순자이다;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갈 때, 그 시대사조를 종결시킨 사람은 오직 장태염과 황계강(黃季剛, 계강은 황간의 자이다)이다."

 

7. 유사배(劉師培)

 

황간은 일생동안 오만했고,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다만 유독 유사배에 대하여는 존경해 마지 않았다. 유사배의 병이 위중할 때, 황간은 배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유사배의 문하에 들어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만일 유사배의 학문이 전승되지 않는다면 세계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8. 고홍명(辜鴻銘)

 

서방인들은 동방문화를 대표하는 두 사람은 타고르와 고홍명이라고 여겼다. 타고르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특별히 고홍명을 찾아간다. 그러나 고홍명은 타고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역경(易經)>을 모르기 때문에 동방문화를 대표할 수 없다. 그냥 돌아가서 시나 써라.

 

9. 전목(錢穆)

 

전목은 진인각, 진원, 여사면(呂思勉)과 더불어 "사학사대가(史學四大家)"로 불린다. 황인우(黃仁宇)는 이렇게 말했다: "전목 선생은 아마도 중국에서 역사를 쓰는 전통을 앞뒤로 잇는 현대의 첫손가락 꼽히는 대사이다."

 

10. 풍우란(馮友蘭)

 

풍우란은 중국당대 철학가, 교육가이다. 근현대 중국사상 첫손꼽히는 철학사가, 철학가의 신분을 지닌 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