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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논쟁/폐관쇄국논쟁

"명청시대폐관쇄국문제신탐": 폐관쇄국 개념의 기원과 변천

by 중은우시 2022. 9. 8.

2. "폐관쇄국" 개념의 기원과 변천

 

지금까지 우리는 고대문헌에서 '폐관쇄국'에 대한 기술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중국전통의 역사개념이 아니다. 17-19세기 서방인은 중국을 묘사할 때 '폐관쇄국'과 대응하는 말을 내놓지 않았다. 중국이 상대적으로 서방의 주변에 있다는 지리적위치로 인하여 서방인들은 자주 중국이 일종의 세계와 '단절된(isolation)' '고립된(seclusion)' '외부영향을 받지 않는(hermetic)' 상태로 인식했다. 여기의 '단절'과 '고립'은 왕왕 '폐관자수(閉關自守)' 혹은 '폐관쇄국'으로 번역되었다. 확실히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이 개념은 서방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폐관쇄국"이라는 개념은 도대체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그것의 의미는 또 무엇인가?

 

중국고대의 문헌에서 "폐관"이라는 단어는 최초에 "관폐성문(關閉城門, 성문을 걸어잠그다)"라는 의미였다. 예를 들어 <주역>에 '선왕이지일폐관(先王以至日閉關), 상려불행(商旅不行)"같은 경우이다. 그후 역대이래로 "폐관"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모두 중성적인 의미이고, 봉쇄, 보수라는 의미는 품고 있지 않았다. 폄하하는 의미도 아니었다. 명나라때 숙주순무(肅州巡撫) 진구주(陳九疇)는 '토번'의 변경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상소문에 '적불가무(賊不可撫), 걸폐관절공(乞閉關絶貢), 전고변방(專固邊防)"(적은 다독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청컨대 성문을 걸어닫고 조공을 막아서, 변방을 공고히 하옵소서) 이에 대하여 중앙정부의 대답은 "보가(報可, 보고한대로 하라)"였다. 여기서 '폐관'은 군사방어수단이다. 청말에 이르러, "폐관"은 점점 '보수'의 의미를 담게 된다. 예를 들어, 영국인 맥킨지가 쓰고, 영국선교사 티모시 리차드가 구술번역하고, 중국인학자 채이강(蔡爾康)이 쓴 <태서신사람요(泰西新史攬要)>라는 책에는 당시 청나라정부가 "우항폐관자수(又恒閉關自守), 여타국불상문문(與他國不相聞問)"라고 했다. 다만 국가이익에 관련되면 '폐관'은 다시 적국과 항전하는 수단 혹은 방식이 되고, 농후한 긍정적인 정치적 함의를 품게 된다. 예를 들어, 청말의 정보정(丁寶楨)은 이렇게 지적한다: "내지에 공장을 지어, 그 족(외국)이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다른 사건이 생기게 되면, 여전히 폐관자조(閉關自造)할 수 있어, 그들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니, 이익의 하나입니다." 

 

16-19세기, 중국과 서양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서방인들의 중국에 대한 흥미는 갈수록 강해진다. 중화제국을 찬미하는 글들도 많지만, 중화제국의 폐쇄, 고립의 부정적인 면을 언급하는 글도 나타난다. 독일철학자 헤르더, 헤겔 및 마르크스등은 '봉쇄' '폐색'과 '외부영향을 받지 않는 단절'이라는 말로 중국을 묘사했다. 미국선교사 체스터 홀콤브(Chester Holcombe, 何天爵)등은 '고립'이라는 말로 청나라의 대외관계를 묘사했다. 다만 당시는 아직 '폐관쇄국'에 대응하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았다.

 

중문의 "폐관쇄국"은 근대에 합쳐져서 만들어졌다. 중국에 있던 "폐관"이라는 말과 19세기초 일본에서 나타난 "쇄국"이라는 말이 결합한 산물이다. 1801년, 일본학자 시즈키 타다오(志築忠雄)는 독일인 켐프(Kempf)가 쓴 17세기말의 <일본사>를 번역하면서 "shutting up"을 "쇄국"으로 번역한다. 이를 통해 에도막부시기의 외교정책을 묘사했다. 이 '쇄국'의 개념은 청나라말기 일본유학생들에 의해 국내에 전해진다. 이들 일본유학생들의 대다수는 당시 국내의 분위기를 이끌던 인물이었으니, 영향력이 자연스럽게 컸다.

 

중국에서 비교적 일찌감치 "폐관쇄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문헌은 1906년의 작자미상의 글 <중국인의 성질이 대외에 부적절한 이유를 논한다>라는 글이다. 1910년, 저명한 기자 임백수(林白水)는 정치인과관계를 분석하면서 '폐관쇄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근대이래, 유신파의 지도자인 양계초(梁啓超), 신문화운동의 영수 진독수(陳獨秀), 노신(魯迅), 그리고 신민주주의혁명시기에 중국공산당을 대표한 사회각계는 명확하게 '폐관쇄국'을 사용하는 외에 보편적으로 '폐관자수', '폐관시대' 혹은 "폐관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구사회, 낡은외교정책 혹은 문화보수주의를 지칭했고, 이를 통해 혁명과 사회발전을 추진하고자 하여, 강렬한 '공명'을 불러일으키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의 가장 전형적인 표현은 헤르더, 헤겔, 마르크스등의 저작을 번역할 때, 원래 지리적으로 '단절' '고립' '외부영향을 받지않는' 상태를 표시하는 글이 번역될 때는 "폐관자수" "폐관쇄국"으로 되었다. 엄격한 학술적 의미로 말하자면, 이런 번역은 분명히 하자가 있다. 그것이 'hermetic isolation'이건 'seclusion'이건 단어기원적으로 지리적의미에서의 봉쇄된 공간이나 단절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어의 "폐관쇄국"은 인위적인 정책으로 선택적으로 혹은 주관적으로 보수와 봉쇄를 선택한 것을 의미하게 된다. 양자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후자로 전자를 번역한 것은 부지불식간에 인위적이고 주관적인 색채를 강화하게 되는 것이고, 나아가 작자의 원래의도를 바꾸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시대적인 색채를 지닌 '의역(意譯)'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78년이후, 개혁개방의 시대적 배경하에, 그리고 '문혁'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사학계는 중국역사발전의 진전을 기술할 때, '폐관쇄국'으로 명청시기의 대외정책을 개괄했다. 이렇게 하여, '폐관쇄국'이라는 단어는 중국학술계와 사회에서 유행하게 되고, 명청시기 외교정책과 사회상황을 개괄하는 주류인식이 되었으며, 개념으로서 고정되어 버린다.

 

19세기이래, 서방인들은 유럽의 입장에 서서, 개방 - 봉쇄, 문명 - 야만의 2분법모델로 아시아각국 특히 중국, 일본 양국의 대외정책을 설명했다. 서방국가는 종합국력과 발언권에서 강력한 우세를 점하고 있으므로, 일상교류와 문화전파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서방중심주의'시각으로 아시아국가의 자신에 대한 평가시각을 바꾸어 버렸다. 나아가 아시아국가 특히 동아시아국가의 자아인식에 영향을 준다. 이렇게 보면, '폐관쇄국'으로 명청시기 대외정책을 형용하는 것은 특정시대 '서방중심주의'의 영향을 받은 산물이라 할 것이고, 명청시기 대외정책의 객관적인 묘사는 아니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