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사회/중국의 환경오염

양계초(梁啓超) 손자: 우리 3대는 모두 실패자이다

by 중은우시 2024. 2. 6.

글: 추체독서(抽屉讀書)

양씨삼대인물

양계초는 위난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하여 사방에 호소했었다; 양사성(梁思成)은 사라질 위기에 직면한 전통성시건축물을 구하기 위하여 사방에 호소했었다; 양종계(梁從誡)는 세상만물이 생존을 의지하는 자연환경을 구하기 위하여 사방에 호소했었다.

양씨집안의 혈맥에 뿌리내린 집착, 정직과 용감하게 말하는 태도는 중국의 지식인이 마땅히 가져야할 모습이다.

이는 거의 백년간 사람들에게 잘못 읽혀온 시이다:

"너는 나무 하나 하나에서 핀 꽃이고, 제비가 대들보 사이에서 지저귄다.

너는 사랑이고, 따스함이고, 희망이다.

너는 인간사월천(人間四月天)이다."

임휘인(林徽因)의 이 문구는 많은 문학청년들이 반복하여 암송한 것이고, TV드라마는 이 말을 사랑의 속삭임으로 바꿔버렸다. 그러나 실제로 이 글에서 읊 대상은 바로 임휘인의 작은아들 양종계이다.

임휘인은 아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재능과 미모를 모두 갖추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녀만큼의 성취와 매력을 가진 여성을 다시 찾기는 어려울 정도이다.

아마도 양사성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의 부친은 중국근대사의 개척자인 양계초이다. 그는 중국고건축학과의 개척자이자 창시자이다.

그러나, 양종계도 알고 있는가? 그는 임휘인과 양사성 사이의 아들이고, 임휘인은 그가 태어났을 때 "너는 인간사월천"이라는 유명한 사를 지었다. 그러나 그는 강직하고 집요했으며, 환갑의 나이에 환경보호에 뛰어들어 어떤 사람의 눈에는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이 되었다.

양종계

그는 강바닥이 말라버린 이유를 놓고, 북경시의 고위관료와 얼굴을 붉혀가며 논쟁을 벌이고, 심지어 면전에서 "당신은 두 눈 멀쩡히 뜨고서 헛소리를 한다!"고 질책까지 한 바 있다.

또한 500대포춘 포럼에서 단상 아래에 앉아 있던 경제계의 거물들에게 전혀 거리낌없이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중국의, 아니 세계의 재난이다!"

그리고 산야(三亞)의 해변으로 달려가서 자루 한가득 쓰레기를 줍고, 현지 관리와 식사를 하는 자리에 쓰레기를 그들의 앞에 놓고 질문을 하기도 했었다.

환경에 극도로 취약한 국가에서, 양종계는 고집스럽고 굳건한 존재였다.

한 사합원 안에는 민국시기에 가장 유명했던 학술계의 태두들이 모여 있었다.

양종계는 북총포후통 3호의 사합원에서 태어났다.

"일조고지영(一條枯枝影)

청연색적세수(靑煙色的細瘦)

재오후적창전타과일필화(在午後的窓前拖過一筆畵)"

한그루 마른 나무가지의 그림자는

짙은 연기색으로 마르고 가늘어서

오후의 창앞에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임휘인은 이런 말로 자신의 사합원을 묘사했다.

양종계의 유아시대는 이렇게 '마른가지의 그림자' '짙은 연기색' '한폭의 그림으로 그려지는' 사합원에서 지냈다. 만일 현재의 젊은이들에게는 가오샤오숭(高曉松, 유명가수, 부친은 청화대학을 졸업한 토목공정사, 모친은 청화대학 건축학과 교수, 외조부는 심천대학 초대교장, 외조모는 북경항공항천대학의 창립자중 1인, 외당숙은 청화대학 전자공학과 교수)이 알고 있는 좋은 집안 출신이다. 그러나 양종계의 그 집에는 네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민국시대의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 다 모였었다.

부모님의 친구로서, 심종문(沈從文)은 자주 북총포후통에 손님으로 왔다. 한번은 양종계가 어른들이 <종문자전(從文自傳)>을 주제로 얘기하는 것을 듣다가 호기심에 심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자전이라는게 뭔가요?"

당시 장삼을 입고 있던 심종문은 마당으로 나가서, 활짝 두 팔을 벌리고도 그 자리에서 한바퀴 돌았다. 그리고는 "이것이 바로 종문자전(從文自轉)이다"라고 말했다.

심종문외에 당시 후원에 살던 김악림(金岳霖)고 그의 집에 항상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양종계와 누나 양재빙(梁再氷)은 그를 "김아빠"라고 불렀다.

"김아빠"는 그들 오누이에게 자신이 어렸을 때 배웠던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계관화(鷄冠花), 만원자개(滿院子開), 대낭갈주이낭사(大娘喝酒二娘篩)"

그런데, 이 노래가 양씨집안의 두 장난꾸러기의 입에서는 "김아빠, 만원자개"로 바뀌었다.

왼쪽부터, 김악림, 양재빙, 임휘인, 비위매(비정청의 부인), 비정청(페어뱅크)등

5년후, "김아빠", 심종문과 그들은 함께 북경을 떠났다. 그들과 동행한 사람은 주배원(周培源), 진대손(陳岱孫), 오유훈(吳有訓)....등이 있다.

그해의 7월 7일은 모든 중국인이 각골명심해야 하는 날이다. 그날, 노구교사변(盧溝橋事變)이 터졌다.

양씨집안의 평정했던 생활도 끝이 났다.

임휘인은 말했다. 망국노가 되고 싶지 않다. 일본의 깃발 아래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리하여, 일본군이 북평(북경)을 점령하기 하루 전날, 그들은 편안한 사합원을 버리고, 일가족이 서남의 '대후방'으로 옮겨가게 된다.

임휘인은 심종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노구교사변에서 현재까지, 우리는 중국의 모든 철로를 다 다녀보았다. 짐과 아이를 끌고, 노모를 모시고, 천진에서 장사로, 배를 타고 차를 탄 것이 모두 16번이고, 여관을 드나든 것이 12번이다."

장사도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임휘인은 일찌기 비정청 부부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포탄이 우리가 살던 대문에서 약 15야드 떨어진 곳에서 떨어졌다. 우리는 포탄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미리 경보도 없었다. 포탄이 떨어질 때, 모친, 두 아이, 사성과 나는 모두 집에 있었다. 두 아이는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었고."

"우리가 어떻게 포탄에 혈육이 날아갔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였다."

당시의 양사성은 포탄이 계쏙 떨어질 때, 일본군의 비행기 소리가 나면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가족을 끌어안아주었다. 양종계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의 부친은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의 집 가까이에 떨어졌던 그 포탄은 기적적으로 폭발하지 않았다. 다음 날, 널부러진 각양각색의 쓰레기더미 속에서, 임휘인은 두 아이를 데리고 쓸만한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임휘인은 찬구(餐具)를 찾고, 아이들은 나무장난감을 찾았다.

"나는 일본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나에게 나무장난감을 돌려달라!"

"그때 우리의 정신은 아주 풍족했다."

당시 지리멸렬했던 장사를 떠나 곤명으로 간다. 일본군의 계속되는 폭격으로 알가족은 곤명시내에서 교외로 옮겨간다. 양사성은 마을에서 빌린 땅에 흙벽돌을 가지고 3칸짜리 작은 집을 짓는다.

흙벽이고 창문에 유리는 없었다. 그저 종이를 발랐다. 이것이 양사성과 임휘인이라는 건축가가 평생 자신을 위하여 지은 유일한 집이다.

곤명에서의 양사성, 임휘인 일가족

그 기간동안 임휘인은 여독으로 폐병을 앓는다. 양사성도 젊었을 때 교통사고를 당한 후유증이 발작하여, 척추가 아파서 앉거나 설 수가 없었다. 게다가 두 어린 아이까지 있다. 양씨집안의 당시 처지는 '간난'하다는 말로는 형용하기 부족했다.

임휘인은 일찌기 디킨스가 쓴 글의 난민에 자신을 비유했다: "나의 두 아이는 갈수록 디킨스가 쓴 빈민굴의 악동들 같다. 종계는 다리에 각종 벌레들에게 물린 상처가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다리가 아닌 것같을 정도이다."

두 다리에 벌레물린 상처가 있지만, 신발을 살 수 없어서, 그저 짚신을 신어야 했다. 짚신으로 발의 피부는 까졌고, 부친이 석탄유등불 아래에서 죽은피부를 잘라내주어야 했다. 양종계는 고통을 참으면서 소리치지 않았다. 양사성은 그 모습이 기특하여 '착한 아이'라고 연신 칭찬해 주었다.

그러나, 이 착한 아이도 곤명의 이 작은 집에서 부친에게 맞은 적이 있다.

어려서 가난하게 지냈는데, 한 친구가 양씨부부에게 연락을 해왔다. 두 부부는 어떻게 할지를 논의했고, 돈을 빌리러 오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나 자신의 집 상황으로 어떻게 빌려주고, 얼마를 빌려주어야할지를 얘기했다.

그 대화를 어린 양종계가 들었다. 그리하여 손님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 문앞을 막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그에게 소리쳤다: "돈 빌리러 온 거지? 우리 집에 돈 없어!"

그날 수치를 견딜 수 없었던 부친은 그를 때렸다. 나중에 그 일을 회상해보고 양종계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자신이 부친이었다면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양종계가 부모로부터 처음 배운 금전관교육이었다.

양종계의 기억속에 어렸을 때 부친의 이미지는 수시로 자신의 장난질에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거나, 어두운 등불 아래에서 글을 쓰는 모습이었다.

1942년, 양사성은 <중국건축사>를 쓰기 시작한다. 양종계는 말한다: "그때 그의 유일한 특권은 바로 석탄기름등이었다. 이건 인생의 즐거움이었다. 음악을 듣고, 불상을 그리고..."

이 석탄기름등 아래에서 모친은 그에게 미켈란젤로를 읽어주고, 부친은 그에게 그림그리는 것을 가르쳐주고, 장난감을 만들어 주었다.

"그때 우리의 정신은 아주 풍족했다."

반쯤 열린 문으로 빛이 한 줄기 들어온다.

1946년 7월 31일, 양씨일가는 마침내 피난생활을 끝내고, 북평으로 돌아온다. 양사성과 임휘인은 청화대학 건축학과를 만들기 시작했다.

1950년, 양종계는 청화대학 건축학과에 지원했지만, 몇점 차이로 낙방한다. 당시 양사성은 건축학과 과장이고, 임휘인은 건축학과 1급교수였다.

과장과 1급교수읭 아들이 건축학과에 합격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제2지망으로 청화대학 역사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5년후, 임휘인이 병으로 사망한다. 묘비에는 그녀 자신이 직접 설계한 한백옥화권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는 일찌기 북경시위의 지도자들에게 의분강개하여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당신들은 지금 진짜 문화재를 부수고 있다. 나중에 만드는 것은 가짜문화재일 것이다."

중국 최초의 여성건축학자는 결국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북경에서, 마지막으로 방대한 북경성벽이 철거될 때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1972년, 양사성이 북경에서 사망한다.

고건축을 보호하기 위하여, 손에 아무런 무기도 들지 못한 이 지식인은 험준한 산길을 걷고, 사방에서 출몰하는 비적들에게서 목숨을 건져가면서, 박쥐가 무수히 날라다니는 천년간 쌓인 먼지와 벌레들이 가득한 곳에서 측량을 했다. 용문석굴을 고찰하고, 응주탑과 불광사를 감측했다.

곤명의 석탄기름등 아래에서도 여전히 <중국건축사>를 쓸 뜻을 품었다. 그러나 북경에서 대규모로 신도시를 건설할 때 그는 실망하게 된다. 성벽이 무너지고, 패루가 철거되는 것을 보면서 양사성은 이렇게 말했다: "성루를 철거하는 것을 보면 내 살을 그만큼 베어내는 것같다. 외성의 성벽을 철거하는 것은 내 피부를 한겹 벗겨내는 것같다."

그는 우울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들의 아들 양종계는 청화대학을 졸업한 후 북경대학 역사학과의 연구생이 되고, 그후 운남으로 가서 교편을 잡는다.

1960년대 중반, 문혁이 발발한다. '양씨집안'의 인물이어서 그는 사람들에게 '양삼자(梁三子)'로 칭해진다. 1969년, 중점혁명대상이 되어, 강서의 '오칠간부학교'로 보내어져 노동개조를 당한다. 거기에서 그는 농사짓는 법을 배우고, 용접하는 것을 배우고, 트랙터운전을 배운다.

1976년, 문혁이 끝나고, 1978년 양종계는 북경으로 돌아와 대백과출판사에서 일한다. 여러번 미국에서 대백과전서를 위하여 방중한 사람들을 위해 통역을 했었다. 당시 편집을 맡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문혁에서 막 해방된 노학자들이었고, 그들이 만든 것은 현대백과사전이었다. 그들은 이를 필생의 사업이라고 여겼다.

1980년대 후반, 양종계는 공직을 사직하고, '문화서원'에서 지도교수로 일한다. 일하는 틈틈이 <지식분자> 잡지의 편집도 맡는다.

잡지의 서문에 양종계는 "누군가 지식인을 사회의 동량, 대뇌등등이라고 치켜세우지만, 우리는 지식인의 한계성에 대하여 스스로 잘 파악하는 것을 유지할 것이다."

<지식분자>의 표지는 영원히 바뀌지 않았다. 반쯤 열린 문이 있고, 문 밖에서 빛이 한줄기 들어온다.

양종계는 이 표지를 그림으로 만들어, 자신의 거실에 걸어두었다.

"누굴 만나러가는 것이냐?" "나 자신"

바로 '문화서원'의 지도교수를 맡고 있을 때, 그는 한 환경보호학자의 투고를 받는다.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중국향진기업의 발전은 토지를 잃은 농민에게 출로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세에 영향을 미칠 분산된 거대한 오염원이 되었다."

이 투고로부터 시작하여, 양종계는 중국에 존재하는 거대한 환경오염문제를 깨닫게 된다.

1993년, '중국문화서원'은 '녹색문화문원'을 산하에 설립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최초의 민간환경보호조직인 "자연지우(自然之友)"이다. 최초자금은 양종계가 친척에게 빌린 300위안이었다.

금사후 보호에 관해 논의하는 클린턴과 양종계

부인 방정(方晶)은 자연지우의 첫번째 회원이었다. 당시 양씨집안의 간면후통에 있는 작은 거실이 바로 '자연지우'의 사무실이었다.

당시의 양종계는 스스로 체제를 떠나 아무런 수입도 없었기 때문에, 집안의 비용이나 '자연지우'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부인 방정이 받은 약간의 퇴직금에 의존해야 했다.

원숭이띠인 양종계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개에게 시집가면 개를 따른다는 말이 있는데, 그녀는 원숭이에게 시집와서 원숭이를 기르고 있다. 개가 원숭이를 기르는 것이다." 부인은 곁에서 웃으면서 말한다: "제가 개띠입니다."

양종계와 부인

자연지우의 제1차회의는 경서팔리장의 황무지에서 개최된다. 황무지에는 영롱탑이 있다. 당시의 양사성과 회원들은 친구친척들을 동원해서 모두 82명이 현장에 모였었다.

낡은 이 고탑에서부터 시작하여, 60여세의 양종계는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함께 환경보호의 길에 나서게 된다.

영롱탑 모임

자연지우에 가입하려면, 첫번째 조건이 "진심을 가지고, 직접 행동한다"이다.

"그 몸이 바르지 않은데 어찌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양종계의 후반생은 주변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는 각지에서 폐지를 수집하고, 이들 폐지를 작은 조각으로 만든 다음, 성명과 연락처를 이들 작은 폐지조각위에 적었다. 이것이 바로 이 '자연지우' 창시자의 명함이다.

바깥으로 나가 식사를 할 때면 반드시 큰 봉지를 가져간다. 그 안에는 몇년이 되었을지 모르는 젓가락과 숟가락이 있다. 샴페인을 마시는 파티에 가더라도 그는 자신의 젓가락과 숟가락을 꺼내서 쓴다.

더더욱 다른 사람들과 맞지 않는 점이라면 영원히 가지고 다니는 이미 누렇게 변색된 손수건이다. 양종계는 종이휴지를 쓰지 않는다.

사무실의 물건들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여전히 "쓰레기를 줍는" 방식으로 해결한다: 사무실에서 쓰는 프린터, 서류캐비넷등등은 모두 양종계의 친구들이 필요없다고 준 것들이다.

검은색의 쇼파는 쓰레기더미에서 찾아낸 것인데, 회원들이 잘 기워서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하다.

손님을 접대하는 것은 영원히 반잔의 물이다. "너무 많이 따르면 낭비가 될까봐 걱정되어서."

평일에, 길거리에서 채소를 사든, 정협에 회의를 가든, 양종계는 항상 오래되어 낡아빠진 자전거를 탄다. 한번은 정협회의때, 수위가 그를 막았다. 수위는 "당신은 누굴 만나러 가는 것이냐?" "나 자신!" 수위는 의심스러워했지만, 그가 위원증을 꺼내보이자 들여보내 주었다.

"이곳의 물은 간장기름탕같은데, 여러분은 어떻게 술을 마실 수 있습니까?"

명문의 후예인데, 그때부터 그는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여러 장소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괴퍅한 늙은이가 된 것이다.

1999년, 상하이 글로벌500강포춘포럼에서, 여러 경제계의 거물들이 각자 자신이 그리고 있는 미래의 청사진을 펼쳐보이고 있을 때, 양종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여러분이 신나게 얘기하고 있는 '세계공장'은 실제로 그저 '세계주방'입니다. 우리의 원료로 요리를 만들어서, 국제식탁에 올려놓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지꺼기나 뼈다귀 뿐입니다. 그리고 불에 타고 거슬린 오염뿐입니다!"

그리고 기업가들에게 물었다: "여러분들은 어떤 책임을 져야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사천서부의 작은 현성에서 그는 술을 권하던 현장에게 큰 소리로 소리친 바 있다: 이곳의 물은 간장기름탕같은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술을 마실 수 있습니까?

해남에서, 그는 해변에서 쓰레기를 봉지에 가득 주웠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갔다. 식사때, 현지관리가 그에게 해남은 물이 좋고, 사람이 좋고, 공기가 좋다고 자랑하자, 그는 그 쓰레기를 의자에서 꺼내 그 관리의 면전에 올려놓았다.

그는 정협회의에서 '시의적절하지 않게' 하루빨리 환경보호 민사공익소송제도를 도입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금 그의 호소는 현실이 되었다.

2015년의 환경보호법 수정으로 자연지우는 환경공익소송주체자격을 획득한다. 모두 34건을 제소했고, 그중 11건이 종결되었다.

그는 각 대학, 각 기업을 다니면서 강연했다. 사람들에게 자연은 이미 더 이상 우리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고 호소했다.

그는 각 사회가 잠시 멈추고 토지에게도 약간의 회복될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당시 경제, 사회는 모두 급속히 발전하는 단계였고, 양종계의 이런 주장은 실로 시의적절하지 못했다.

시대의 조류하에서, 깨달은 사람이 비록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행이라면, 항상 몇몇은 있다는 것이다.

해지농(奚志農)은 운남 백마설산지구에서 국가1급보호동물인 금사후(金絲猴)생태연구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금사후의 사진을 많이 찍었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운남 덕흠현이 재정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100평방킬로미터의 삼림을 벌채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 삼림에는 200마리의 진귀한 금사후가 살고 있었다. 도움을 청할 곳이 없게 된 해지농은 양종계를 찾아간다.

얘기를 들은 후, 양종계는 "네가 버티면 우리가 뒤를 막아주겠다." 그리고 즉시 당시 국무위원이던 송건(宋健)에게 편지를 써서, 구체적인 상황을 전한다.

바로 답변이 내려왔고, 중앙정부에서 덕흠현에 자금을 내려보내 재정곤란을 해결해주기로 한다. 이렇게 하여 금사후가 살아갈 수 있는 삼림이 보존되었다.

이건 원래 아주 기쁜 일이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항상 우리에게 어두운 면을 보게 만든다.

당시 주변의 현,진에서는 이 사건을 보면서 자신들도 '돈을 벌' 방법을 알게 된다. 삼림을 벌채하면 국가에서 보조금을 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덕흠현처럼 "자세를 취한 후", '윗사람'이 보게 만들어, 중앙정부로부터 재정보조금을 받으려 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속속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이는 양종계가 생각한 것이 아니었고, 그는 분노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티벳영양(藏羚羊)과 야모우(野牦牛)의 처지를 알고난 후, 그는 청해 격이목에서 야모우팀의 팀원을 만났다. 말솜씨가 없는 캉바(康巴) 사내는 양종계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그들은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생명의 위험을 무릎썼는데, 마침내 멀리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지지해주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북경으로 돌아온 후, 양종계는 글을 써서 신문에 실었다.

이 글의 마지막은 이런 의문문으로 맺었다: "커커시리, 티벳영양, 모우야. 우리는 깊이 너희를 사랑한다. 다만 우리가 너희를 위해서 더 뭘 할 수 있겠는가?"

땅이 더러워지면, 어쨌든 누군가 치워야 한다.

말년의 양종계는 갈수록 말이 없어졌다. 자연지우의 이사장 양동평(楊東平)은 이렇게 말한다: "최근 들어 한 일은 실패한 것이 많았다. 설서 언젠가 승리하더라도, 그건 그저 표면적인 승리일 뿐일 것이다."

최근 들어 한 행위가 어떤 작용을 했을까?

자연지우가 막 성립되었을 때, 각종 방문객들이 여러가지 오염문제를 가지고 와서 도움을 청했고, 전국각지의 고발장이 양종계의 책상위로 날아왔다. 처음에 그는 모든 편지에 회신을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점점 회신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할지를 모르겠다."

그는 말이 갈수록 줄어들었고, 말에서도 점점 고독이 늘어났다.

2002년을 전후하여, 양종계는 자연지우의 이사장 양효연(梁曉燕)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 일을 시작했을 때, 기실 우리는 너무 조금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이 분야가 도대체 얼마나 엉망인지를 알지 못했었다."

"단 우리는 차마 가만히 있지 못했다. 마음 속으로 차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뭔가를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일을 하고난 후,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더 많은 것을 보았다. 마치 한 상처의 아래에 이미 골수를 곪아터지게 만드는 극독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냥 상처가 아물었다고 말하면서 독소를 덮어버리는 것처럼.

사람들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양씨집안의 삼대가 여기에서 태어나고, 여기에서 자랐다. 이 토지가 우리를 키웠다. 우리는 이 사회를 위해서 이 토지를 위해서 이 민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한의 보답을 해야 한다."

그는 국가의 청소부를 자청했다. "이 국가는 우리의 것이다. 더러워졌으면 어쨌든 누군가 치워야 한다.

환갑때부터, 양종계는 국가를 위하여 십여년간 청소부역할을 했다.

병이 위중해 졌을 때, 한 자연지우의 회원이 그를 보러 갔다. 그에게 자신을 알아보겠느냐고 물었다.

양종계는 말했다: "당신은 자연지우의 회원이 아닌가?"

상대방은 아주 기뻐했지만, 양종계의 부인 방정은 이렇게 말했다. 누가 오든지, 그는 모두 자연지우의 회원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2010년 10월 28일, 양종계는 북경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는 후반생을 국가를 위해 '청소'했다. 최종적으로 수장(樹葬)의 형식으로 창평 십삼릉의 국제우이림안에 묻혔다.

묘비는 불규칙한 원형돌맹이이다.

그 위에는 "자연지우양종계"라고 적었다. 장례음악은 그가 일찌기 부인과 상의해둔 <송별>이었다.

그해에 그는 78세였다.

그는 일찌기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고발방식을 생각해 두었다. 양말을 신지 않고, 맨발로 있으면서, 발바닥에는 두 개의 웃는 얼굴을 그려 두었다.

68세때, 그는 자연지우의 신분으로 사방을 돌아다니며 호소했고, 사람들의 환경보호의식을 일깨우려 노력했다.

58세때, 그는 토지, 자원, 인구의 3자간의 모순을 보았고, 중국의 환경문제를 우려하기 시작했다.

48세때, 그는 <지식분자>의 잡지에서: 지식분자는 한계성을 지녔다고 썼다.

38세때, 그는 강서의 어떤 지방으로 하방되어, "오칠간부학교"에서 농사를 지었다.

28세때, 그는 운남대학의 역사학과 교수가 되었고, 당시의 사람들은 그가 역사학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8세때, 그는 몇점 차이로, 부모가 일하는 청화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하지 못하고, 역사학과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했다.

8살때, 그는 곤명의 한 흙벽돌로 만든 작은 집에서 모친이 읽어주는 <사냥군일기>를 들었다.

양씨집안의 삼대는 모두 일생동안 겉으로 보기에 성공할 수 없는 일들을 추진했다. 이런 비장한 견지는 아마도 진정한 중국지식인들이 뼛속부터 가져야할 모범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