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화/중국의 종교

기독교는 어떻게 중국에 전파되었는가?

by 중은우시 2023. 4. 18.

글: 곽계민(郭繼民)

 

기독교가 중국에 전파된 과정에 대하여 당금 학계에서는 대체로 2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삼분법으로 기독교는 주로 아래의 3개 시기로 전파를 진행하였다는 것이다. 즉 635년을 전후한 당나라시기, 명말청초, 1849년이후 지금까지. 다른 하나는 사분법이다. 원나라의 '야리가온교(也里可溫敎)'(원나라때 몽골인은 중국으로 온 기독교와 그 신도를 이렇게 불렀다)의 전래도 포함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탁신평(卓新平)선생이 이런 견해를 취한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순수한 역사학의 각도에서 보자면 마땅히 '야리가온교'의 원나라로의 전래를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나 만일 전파의 영향이라는 각도에서 보자면 신축성있게 처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원나라의 '야리가온교'는 영향이 극히 미미했기 때문이다. 신도가 가장 많았을 때도 3만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야리가온교'는 거의 중국문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래서 필자는 여기에서 삼분법을 취하여 기도교전파과정을 얘기하기로 한다.

 

제1차전파: 당나라때 "경교(景敎)"의 전파이다. 당태종때는 중국역사상 전성기이고, 극히 개방적인 분위기였다. "경교"의 전래도 그런 분위기때문에 가능했다. "경교"는 중국 당나라때 고대기독교의 이단종파인 '네스토리우스파'를 부르는 칭호이다. 서방에서 네스토리우스파가 정통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된 후, 시리아에서 페르시아, 아랍, 인도등지로 전파되고,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에까지 전파된다. 그러므로, 당나라초기 중국인들은 이를 "파사교(波斯敎, 파사는 페르시아를 의미함)"라고 부르고 사원을 "파사사(波斯寺)"라고 불렀다. 당나라 정관9년(635년) 네스토리우스파의 주교이자 시리아인인 아라본(阿羅本)이 페르시아에서 장안(長安)으로 온다. 이는 기독교가 정식으로 중국문화와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비문기록에 따르면, "태종때 대진국의 상덕 아라본이 경전을 싣고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왔다. 정관9년 장안에 도착한다. 황제는 재상 방현령(房玄齡)을 서쪽교외로 보내어 맞이하게 하여 황궁에 손님으로 받는다. 경서를 살펴보고 교의를 묻는다. 그것이 정진(正眞)하다는 것을 알고 특별히 명하여 전수하게 했다." 태종때 조정은 돈을 내서 장안에 "파사사"를 지어 포교활동을 하도록 해주었다. 당고종때, 경교는 이미 흥성하는 상황이었고, 한때, "법류십도(法流十道), 국부원휴(國富元休), 사만백성(寺滿百城), 가은경복(家殷景福)"하는 성대한 장면이 연출된다. 745년, 당현종은 경교 신도의 요구에 응하여 "파사사"를 "대진사(大秦寺)"로 개명한다. 당덕종 건중2년(781년)에는 위에서 언급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세운다. 이는 경교라는 명칭이 처음 비석에 나타난 경우이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는 초기 기독교중국전래의 가장 유력한 물증이다. 그것은 경교가 당태종때 중국에 전래된 후, 150년간의 발전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845년 당무종(唐武宗) 이염(李炎)이 조서를 내려 "멸불훼사(滅佛毁寺)"한다(즉, 사서에 기록된 회창멸법(會昌滅法)이다), 비록 주로 불교를 겨냥한 행위였지만, 경교도 피해를 입는다. 그리하여 점차 쇠약하게 되고, 그 이후 다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송나라에 이르러, 거의 사라지게 된다. 중국고대사적에서 더 이상 경교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없게 된다.

 

제2차전파: 명말청초의 '천주교' 전파이다. 명나라개국 200년간 한때 해금(海禁)을 실행하고, 폐관쇄국정책을 실시한다. 그러나, 서방의 기독교문명은 문예부흥, 종교개혁을 거친 후 자본주의단계로 접어든다. 이어서 자본의 확장과 더불어, 기독교는 2차로 중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번에는 주로 4명의 인물이 대표적이다. 첫번째 인물은 스페인사람으로 예수회의 선교사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方濟各.沙勿略, 라틴어 Franciscus Xaverius, 스페인어 Francisco Javier)이다. 1552년 일본에서 상선을 타고 중국 광동 상천도(上川島)에 상륙한다. 다만 '해금'정책으로 내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섬에서 병사한다. 두번째 인물은 포르투갈인으로 예수회 선교사인 그레고리오 곤잘레스(公匝勒, Gregorio Gonzales)로 그 는 마카오에 성당을 짓고 선교하며 처음으로 발을 붙인다. 세번째 인물은 이탈리아 선교사 미셀 루기에리(羅明堅, Michele Ruggieri)이다. 그는 비록 가장 먼저 내지로 진입한 선교사였지만,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네번째 인물은 '실질적 효과'를 거둔 마테오 리치(利馬竇, Matteo Ricci)이다 1583년 마테오 리치는 미셀 루기에리의 조수이면서 상인의 신분으로 조경(肇慶)에 들어와 성당을 짓고 선교를 시작하여 중국내지에 선교를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 된다. 1601년 마테로 리치는 스페인 예수회 선교사인 디에고 데 판토야(龐迪我, Diego de Pantoja)와 함께 유복(儒服)을 입고 북경으로 간다. 그리고 허가를 받아 오랫동안 북경에 거주하면서 선교활동을 한다. 그후 서방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속속 중국으로 들어오고 이로 인해 서학동점(西學東漸)의 제1차붐이 일어난다. 18세기초, 중국의 천주교는 단지 마카오, 남경과 북경의 3개 주교구가 있었는데, 신도는 이미 30여만명에 달했다. 이를 보면 상당히 흥성했음을 알 수 있다.

 

'천주교'의 전파와 더불어, 여러가지 갈등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하나는 천주교는 중국에서 전파하면서 중국의 일부 사대부드의 견제와 반대에 부닥친다. 둘은 '천주교 각 수도회간 그리고 선교사내부간에 '중국예의' 문제 및 '중국전파전략문제'로 논쟁이 일어나 의견불일치와 갈등이 발생한다. 특히 '예의모순'논쟁은 로마교황과 중국황제간의 권위다툼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1715년 로마교황 클레멘트 11세는 <이날부터>라는 교유를 반포하고, 중국의 선교사들은 중국예의문제를 더 이상 꺼내지 말며 이를 위반하면 이단으로 보아 교회에서 제명하겠다고 밝힌다. 강희제도 이에 맞서서, 기독교금지를 선포하고, 선교사들을 축출한다. 그리고 어필로 이렇게 주비(朱批)를 내렸다: "서양인등 소인들이 어찌 중국의 큰 이치를 알겠는가? 하물며 서양인등은 한명도 한자서적을 아는 자가 없다. 하는 말이라고는 가소롭기 그지없다. 오늘 보내온 고시를 보니, 화상,도사,이단종교와 같다. 어지러운 말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이후 서양인들은 중국에서 선교할 필요가 없으니,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 여러 사태를 피할 수 있겠다." 이때부터 청나라는 100년에 걸친 선교금지를 실시한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제2차중국선교는 이렇게 허망하게 끝이 난다.

 

제3차전파: 아편전쟁때부터 지금까지 기독교가 전면적으로 전파된 단계이다. 1840년 아편전쟁은 중국에 자본주의의 국제질서를 가져왔고, 제국주의의 견선리포와 함께 기독교도 중국에서 제3차 전파붐의 서막을 열게 된다. 이번 전파는 기독교가 전면적으로 '진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천주교의 각 수도회 예를 들어, 예수회, 아우구스티노회, 도미니크회, 파리외방전교회, 견사회(Congregatiion of Mission), 성모성심회, 성언회등 선교사들이 속속 중국으로 온다. 19세기말에 이미 중국에는 5대선교구가 설치되고, 신도가 70여만명으로 늘어난다. 이번 기독교전파는 이전의 '조용한 전래'와는 전혀 달랐다. 근대중국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은 전면적이며 정치, 문화, 교육등 여러 방면에 미친다. 예를 들어 홍수전(洪秀全)을 대표로 하는 태평천국의 난은 바로 기독교관념과 중국의 무술의식을 결합시켜서 그가 이끄는 농민반란은 어느 정도 기독교적인 색채를 띠기도 했다. 또한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등 유신파가 이끈 무술변법은 당시 저명한 선교사인 티모시 리처드(李提摩太)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는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중국과 서양간 정치, 경제상의 충돌과 더불어 중서사상문화의 충돌과 교류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20세기초기의 적지 않은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신문을 출판하고, 학교를 개설하며, 병원을 열고, 여러가지 자선사업을 했다. 중국의 근대교육, 위생, 사회복지와 사상문화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교육을 보면,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최고학부는 거의 모두 교회학교에서 발전한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기독교는 심지어 반전통주의의 지도자급 인물들에 영향을 끼친다. 유학부흥을 사명으로 여긴 장개석도 세례를 받은 기독교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