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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서제)

광서제(光緖帝)는 왜 사진을 남기지 않았을까?

by 중은우시 2023. 1. 5.

글: 지식거륜(知識巨輪)

 

사진은 그 사람의 일생을 남기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1843년 사진기가 발명된 이래, 서양의 상류층인사들은 자주 이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서 남겼다. 사진기가 청나라에 전래된 후, 서태후는 사진을 많이 찍었고, 지금도 우리는 서태후의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서제의 경우는 몰래 찍은 사진 한장만 남아 있다. 이것은 도대체 무엇때문일까?

광서제는 청나라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황제이다. 그의 일생은 전설적이면서도 비참하다. 1874년, 동치제(同治帝)가 죽고, 후사를 남기지 못한다. 서태후는 조정대신들과 긴급회의를 열었고,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순친왕(醇親王) 혁현(奕譞)의 아들 재첨(載湉)이 황위에 오르도록 결정한다. 그 말을 듣자 혁현은 땅바닥에 쓰러져 대성통곡을 했고, 아무도 그를 일으켜세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서태후는 그 광경을 보면서도 담담했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광서제가 등극한 후, 점차 철이 들어간다. 그는 국가를 위해 일을 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서태후가 권력을 꽉 쥐고 있어서, 광서제는 명실상부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렇기는 해도 광서제는 여전히 황제였다. 왜 궁녀들과 대신들까지도 모두 사진을 남겼는데, 그만 화상(畵像)으로만 남아 있게 된 것일까? 

2016년이전의 역사서에는 광서제의 "사진"이 한 장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이 심도있게 연구한 후 이것은 사진이 아니라, 화상(그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시보도화주간(時報圖畵週刊)>과 <환구화보(環球畵報)>에 모두 이 그림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그 주인이 광서제인지에 대하여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그외에 어떤 사람은 "광서제"를 양계초와 강유위와 함께 실은 사진을 찾아낸다. 그러나 이 사진이 실린 것은 1936년으로 세 사람이 모두 죽은 후여서 아무도 이 사진의 진위를 밝혀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료에 따르면, 이들 세 사람은 변법유신을 지지했지만, 광서제가 두 사람을 접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 사람이 함께 사진을 찍었을 가능성은 없다.

그외에 역사상 몇 장의 유명한 가짜사진들이 있다. 위의 사진은 영국의 잡지 <Black + White Photography>에 실려 있는 것으로 광서제가 어렸을 때 말을 타는 사진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잡지의 내용은 말채찍을 든 사람이 이홍장(李鴻章)이라고/을 소개한다. 이홍장이 어린 황제를 위해 말채찍까지 쥐었는지는 놔두고서라도, 이홍장의 전해지는 사진과 이 사진의 차이를 살펴보면 진위를 충분히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진은 광서제와 그의 생부 순친왕 혁현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황실법도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이 사진의 진위는 판단할 수 있다. 어쨌든 광서제는 등극한 이래 폐위된 적이 없다. 그리고, 신하는 의자에 앉고, 황제는 서서 사진을 찍을 수는 없다. 당연히 나이많은 남자는 확실히 혁현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 서 있는 소년은 아마도 광서제의 동생일 것이다. 부의가 고궁을 참관할 때, 고궁에 걸려있는 '광서제사진'을 보고, 그건 자신의 부친 사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잘못 알려지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위 사진의 앉아있는 인물이 광서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진위를 확인해줄 수 없다.

유일하게 광서제로 확인되는 사진은 몰래찍은 것이다. 촬영한 사람은 외국인이다. 광서제가 황급히 도망치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그러나, 사진의 주요인물의 오관은 흐릿하여, 역사적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다.

 

왜 광서제는 제대로 된 사진을 하나도 남기지 못했을까? 모두 3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청나라때 사람들은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빼앗긴다고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광서제는 초기에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영대(瀛臺)에 연금된 뒤였다.

 

둘째, 광서제의 권한은 유한했다. 서태후의 어전여관 덕령(德齡)은 일찌기 그와 교류한 바 있다. 광서제는 유화를 그리는 것조차 어려웠다. 왜냐하면 서태후가 사사건건 간섭했기 때문이다. 서태후는 사진으로 내외국인들과 교류했다. 그녀는 광서제도 사진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셋째, 광서제가 총애했던 진비(珍妃)는 사진찍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녀의 사후에는 위조된 사진만 남아 있다(머리모양이 잘못되었음). 서태후가 미워하던 광서제와 진비의 사진을 모조리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