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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초45

매국(賣國)과 보황(保皇) 글: 항려(伉儷) 양계초(梁啓超, 량치차오)는 미국 보스톤의 모습을 보고는 중국의 "오구통상(五口通商)"은 불행이었다고 탄식했다. 통상때문이 아니라, 통상에 부가된 매국조항때문이었다. 정상적인 국가무역이라면 '오구통상'은 당연한 것이고 매국이라 할 수가 없다. 패전국인 청나라는.. 2012. 3. 3.
청나라말기의 "입헌"과 "혁명" 글: 뇌이(雷頤) 청나라말기에 '입헌(立憲)'과 '혁명(革命)'의 시합에서 전자는 후자에 패배한다. 이는 아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후에 이어진 것이 재화가 끊이지 않는 사회의 대혼란이었기 때문이다. 소건(邵建)의 <혁명이 입헌을 억제하다>와 <입헌파의 민주노선도>는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 2011. 6. 11.
입헌파는 왜 혁명파에 패배했는가? 글: 뇌이(雷頤) 청나라말기 입헌과 혁명의 경주에서, 전자는 후자에 패했다. 아쉬운 일이다. 곧이어지는 것은 바로 재난이 끊이지 않는 사회의 대동란이었다. 소건(邵建)의 <<혁명이 입헌을 누르다>>와 <<입헌파의 민주노선도>>(각각 <<재경>>2010년 제5기, 제7기에 등재됨)를 읽.. 2010. 10. 7.
육소만(陸小曼): 나는 바람이 어디로 불 지 모른다 (I) 글: 강홍(江泓) 나는 내가 검색할 수 있는 모든 육소만의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일대명원(一代名媛)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사교계의 꽃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마치 평생 머리에 퍼머를 한 적이 없는 것같다. 혹은 두 가닥으로 머리카락을 땋거나, 혹은 귀까지 가지런히 짧게 자르거나, 혹.. 2009. 9. 17.
양계초(梁啓超)와 채악(蔡鍔): 원세개(袁世凱)를 잠못이루게 한 사도(師徒) 글: 고문기(高文麒) 2003년 4월, 천진의 마르코폴로광장의 북쪽에 두 동의 나란히 선 이탈리아식 서양건물이 정식으로 관광객에게 개방되었다. 북쪽으로 놓여진 건물은 중화민국초기의 대사상가 양계초의 주택이고, 남쪽으로 놓여진 건물은 그의 서재인 그 이름도 유명한 음빙실(.. 2009. 4. 20.
하(夏)왕조는 존재했는가? 작자: 미상 최근들어 한가지 소식을 들었다. 국내에 하왕조가 존재했는지에 대하여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본인은 하왕조와 은왕조의 역사에 대하여 연구를 해본 바 있으며, 심득(心得)이 있어, 그 작은 성과를 여러분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상고시대때, 우두머리를 승계.. 2009. 1. 9.
캉유웨이(康有爲): 이상추구와 현실선택의 차이 글: 마라(摩羅) 이는 하나의 기이한 현상이다: 어떤 때는 한 위대한 역사인물이, 그가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과 그가 손끝으로 행하는 것이 왕왕 많이 다르다. 그의 이상추구와 현실선택의 차이는 자주 사람을 놀라게 한다. 캉유웨이가 1894년 <<대동서>>를 쓸 때, 그는 아직 36세의 청년이며, .. 2008. 10. 9.
국학(國學)과 국수(國粹) 글: 유몽계(劉夢溪) 국학(國學)이라는 단어는 다른 두 개의 비슷한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국학을 검토하려면, 반드시 또 다른 두 개의 단어를 언급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국고(國故)"와 "국수(國粹)"이다. 여기서는 국학과 국수의 관계를 논하기로 한다. 이분야의 전문연구를 정사거(鄭師渠) .. 2008. 6. 9.
고홍명(辜鴻銘)과 양계초(梁啓超)의 비교 글: 정만군(程萬軍) 청나라말기, 부패하고 썩은 청나라조정은 이미 백족지사(百足之蛇)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각종 신구 "애국지사"가 연이어 등장하여, 각자의 파벌의 정견으로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구하고자 하였다. 신구파로 나뉜 "변사(辯士)"의 무리중에서, 두 명의 대표적인 인물이 나타난다... 2008. 4. 24.
장태염(章太炎)의 정치병 글: 장명(張鳴) 장태염은 지금 국학대사(國學大師)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청말민초(청나라말기부터 민국초기까지)에 그의 명성이 가장 컸던 시기에 그는 혁명가였고, 정치가였다. 그저 그는 정치가라는 것이 책무더기에서 기어올라온 것이므로 요란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하지는 못했.. 2008. 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