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사차소(往事叉燒)
1
임휘인은 서향문제(書香門第)에서 태어난다. 부친은 기질이 유아(儒雅)하였으며 유명한 재자(才子)였다. 여동생 몇몇도 모두 재능이 뛰어났으며, 일가족이 함께 모이면 함께 시를 지으면서 즐겼다. 오직 그녀의 모친만이 끼지 못했다.
임휘인의 모친은 하설원(何雪媛)인데, 소규모가내공업에 종사하는 집안의 딸이었다. 임씨집안에 시집을 와서 임장민(林長民)의 후처가 된다. 하설원은 글을 몰랐고, 바느질같은 집안일도 잘 하지 못했다. 그리고 남편과도 할 말이 없었다. 매번 임씨집안 사람들이 역사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이 우스워보일 뿐이었다.
처음에 임장민은 하설원에게 설명을 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자 더 이상 그녀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하설원은 1남2녀를 낳았는데, 차례로 죽고, 임휘인만 살아남는다.
하설원이 집안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자, 시어머니는 더더욱 그녀를 싫어했다. 그리하여 하설원은 성격이 점점 날카로워지고, 자주 임휘인에게 화를 풀었다. 그리고나서는 다시 임휘인을 껴안고 통곡했다. 임휘인은 전전긍긍했다. 어떻게 해야 모친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임휘인이 9살이 되었을 때, 할머니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장민은 둘째부인을 얻는다. 하설원은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을까봐 겁을 내서 하루종일 불안해 했다. 그러나, 둘째부인을 보자 마음을 놓는다. 특히 둘째부인도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러나 둘째부인은 성격이 아주 좋았고, 애교도 있었다. 그래서 임장민을 즐겁게 해주었고, 연이어 3남1녀를 낳는다. 임장민은 기뻐서 둘째부인을 전원(前院)에 거주하게 하고, 하설원과 임휘인을 후원(後院)의 작은 방에 거주하게 한다.
임장민은 자주 바깥으로 나가서 신기한 물건이나 장난감을 사오곤 했다. 그러면 전원으로 갔고, 하루종일 웃음소리가 났다. 임휘인도 전원으 좋아해서 하루종일 거기로 갔다. 그녀는 특히 집안의 자명종을 좋아했다. 종에는 작은 문이 있었고, 작은 문 안에는 작은 새가 들어 있는데, 정시가 되면 작은 새가 문밖으로 나와서 지지배배하며 울었다. 몇번 울면 바로 몇시인 것이다.
매번 임휘인이 후원으로 돌아오면, 하설원은 모든 원망을 딸에게 풀었다. 임휘인이 자주 전원으로 가서 노는 것을 싫어했고, 항상 "부심한(負心漢, 배신자)'을 욕했다. 임휘인은 고개를 숙이고 옷만 만지작거렸다. 많은 경우 임휘인은 모친이 구석에서 몰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아야 했다.
임장민은 하설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장녀는 아주 좋아했다. 임휘인의 고모는 전형적인 양가집 규수였다. 이 조카딸을 보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그녀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책을 잃게 했다. 임휘인은 자질이 총명하여, 집안의 장서들을 읽기를 좋아했으며,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녀를 편애했다.
8살때, 임휘인은 사촌언니와 함께 부근의 소학교에 들어간다. 부친은 자주 바깥으로 나갔고, 임휘인은 그때부터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편지를 쓰게 된다. 그리하여 집안의 통신원이 된다. 임장민은 이 장녀가 사리에 밝고 자신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일찌기 이렇게 감탄한 바 있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딸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쉽게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니다. 너는 배분을 내려놓고, 먼저 친구로서 이해를 해야 한다."
조부모가 돌아가신 후, 임휘인은 집안에 있으면 더욱 우울하다고 여겼다. 부친은 정치를 하느라 집을 떠나 있으면, 임휘인이 집안의 대들보로, 모친을 모시고, 동생들을 보살폈다.
여러해가 지난 후, 임휘인의 아들 양종계(梁從誡)는 모친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부친을 사랑했다. 그러나 부친이 자신의 모친에게 무정했던 것은 한스러워했다. 그녀는 자신의 모친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가 못난 것을 한스러워했다. 그녀는 큰누나로서 진지한 감정으로 몇몇 이복동생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 반봉건가정의 왜곡된 인간관계는 정신적으로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2
1920년, 임장민은 유럽으로 고찰을 떠나면서, 임휘인을 데려간다. 딸의 견식을 넓혀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딸을 위해 영어가정교사도 붙여준다. 얼마 후, 임휘인은 뛰어난 성적으로 Saint Mary's College에 합격한다.
부친은 여전히 바빴고, 그녀는 혼자서 런던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벽난로의 옆에서 책을 읽으면서, 어떤 때는 팔베개를 하고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기도 했다.
실로 너무 답담해서 친구인 심종문(沈從文)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혼자서 커다른 서재에서 비가 내리는 것을 보고 있다.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손가락을 깨물며 울고 있다. 나는 생활에 약간의 낭만적인 일이 일어나거나, 혹은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얘기를 나눠주거나, 혹은 벽난로의 옆에서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바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군가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다. 실제는 나와 돌아줄 낭만이 있고 총명한 사람이 없다."
하루는 집에 손님이 왔다. 부친은 그의 이름이 서지마이고 시인이라고 했다. 처음 임휘인을 만났을 때, 두 사람은 모두 어색했다. 서지마를 보고 임휘인은 하마터면 '아저씨'라고 부를 뻔했다.
나중에 서지마는 자주 임장민의 집을 찾아간다. 두 사람은 같이 차를 마시고, 시를 얘기하고, 정치를 얘기했다. 임휘인은 곁에 앉아서 조용히 들었다. 두 사람이 차를 마실 때, 임휘인은 먹을 거리를 내오곤 했다.
서지마와 임장민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임휘인도 그와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알던 다른 모든 남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지마의 진정한 시정(詩情)은 절대로 손톱만큼의 교위(矯僞, 억지나 거짓)도 없다. 그의 그런 치기(痴氣), 아이같은 천진함은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서지마는 눈앞의 여자아이가 아주 영특하고 시야가 넓고, 여러 외국의 명사들과도 알고 지내서, 장유위(서지마의 부인)와 비교하자면 천지차이라고 여긴다.
서지마는 임휘인에게 반하고, 미친듯이 그녀에게 대시한다. 그리고 은사 양계초에게 서신을 써서 보낸다: "저는 망망인해(茫茫人海)에서 저의 유일한 영혼의 짝을 발견했습니다. 얻을 수 있다면 저의 행운이고, 얻지 못한다면 저의 운명입니다."
임휘인에게 사랑편지를 보내기 위하여, 서지마는 특별히 Sawston의 한 이발소에 편지전달함을 설치한다.
그 편지를 읽고, 임휘인은 전전반측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마음 속은 쿵쾅거렸고,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면 더욱 무서워졌다. 그녀는 서지마가 처와 아들을 데리고 런던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말에 장유의가 독일로 가고, 서지마도 따라갔다. 임휘인은 부친과 함께 그들을 배웅했다. 기차가 출발할 때, 서지마와 장유의는 차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서지마는 그녀에게 계속하여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장유의가 애원, 절망, 기구와 질투의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임휘인은 어쩔 줄을 몰랐다.
거처로 돌아온 후, 임휘인은 밤새도록 울었고,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몰랐다.
마지막으로 임휘인은 부친에게 말한다: "아빠, 나는 집이 그립고, 고향이 그리워요. 즉시 귀국할 생각입니다." 임장민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동의해준다.
1921년 10월, 임휘인과 부친은 귀국한다. 서지마에게는 작별인사도 하지 않았고, 오직 한통의 편지만 남겨둔다.
서지마는 이런 사실을 모른채, 베를린에서 가족과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유의와 이혼하겠다고 극력 고집을 피웠고, <서지마, 장유의이혼통고>를 신문에 싣는다.
절차를 마친 후, 서지마는 황급히 런던으로 돌아와 임휘인을 찾는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둘은 이미 귀국해버린 뒤였다.
집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그가 서지마라는 것을 알고는 임휘인이 남긴 편지를 그에게 전해준다: 저는 떠납니다. 기억의 금합(錦盒)을 가지고, 안에는 우리의 정(情)과 의(誼)을 담아서. 지마, 나는 당신이 진정한 애정과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유의의 비통함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도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편지를 읽고, 서지마는 쇼파에 앉아,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러해가 지난 후, 임휘인은 이렇게 말한다: "서지마는 당시에 실은 나를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쫓아다닌 것이 그의 말로는 진실한 나라고 했지만, 차라리 그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이상화되고 시화(詩化)된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3
귀국후, 임휘인은 배화여자중학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한다. 얼마 후, 양사성이 임장민의 집을 방문하고, 임휘인과 다시 만난다. 양사성은 양계초의 아들이고, 청화학교에서 유명했다. 미술, 음악, 정치를 모두 섭렵했다.
다음 날, 임휘인은 양사성과 처음으로 태묘(太廟)로 놀러간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갔는데, 태묘로 들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양사성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임휘인은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고개를 들어보니, 양사성이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웃으면서 그녀에게 얘기했다. 임휘인은 그가 이렇게 장난치길 좋아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일찌기 몇년전에 임장민과 양계초는 아들과 딸의 결혼은 추진한 바 있었다. 양계초은 양사성을 데리고 임장민의 집을 방문했다. 양사성은 부친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의 생각에 임씨아가씨는 분명 비단옷을 입고 길게 머리를 땋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양사성이 본 임휘인은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았으며, 오관이 정치하고 두 눈이 초롱초롱하여 마치 선녀를 만난 것같았다.
임휘인은 눈앞에 안경을 쓰고 약간 긴장한 소년을 재미있게 보았다. 그리고 손님을 대하는 예로 그를 맞이했고, 그후로는 만나보지 못했다.
임휘인과 양사성은 많은 공통의 화제가 있었다. 자신의 이상을 얘기할 때, 임휘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흥미를 가진 것은 건축이다. 이건 예술과 건축이 하나로 합쳐진 학과이다. 나는 서방인들도 모두 동방건축을 보게 하고 싶다." 양사성은 건축학과라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리고 눈앞의 이 여자아이가 건물을 짓는 것을 배우고 싶어할 줄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양사성은 원래 서방정치를 연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임휘인을 말을 듣자 바로 이렇게 말한다: "그럼 나도 건축을 배우겠다."
집에 돌아온 후, 양사성은 부친에게 말한다: "나는 건축을 필생의 사업으로 추구하겠습니다. 그리고 임씨 큰아가씨와 만나겠습니다."
임휘인도 양사성을 거절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와 함께 있으면 편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1923년, 양사성이 오토바이에 동생을 태우고 행렬을 따라가다가 승용차와 정면으로 부딛친다. 오토바이는 쓰러졌고, 양사성은 차 아래에 깔렸으며, 동생은 멀리 튕겨나갔다.
자동차사고로 양사성은 고관절복합골절을 당하여, 오른쪽 다리의 상처가 심했다. 병원에 8주간이나 입원해야 했다. 임휘인은 그 소식을 듣고 즉시 병원으로 달려간다. 학교에는 1주일 병가를 냈다. 매일 그를 위해 음식을 먹여주고, 옷도 빨아주었다. 양사성은 기분이 좋다보니 회복도 아주 빨랐다.
한번은 임휘인이 양사성에게 <신보(晨報)>를 읽으라고 주면서 웃었다. "봐, 너는 스타가 되었어." 양사성이 보니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사성은 임휘인을 보며 말한다: "그건 관심이 없고, 네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삼생의 복이다."
다음 해, 두 사람은 함께 미국 펜실베니아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양사성은 순조롭게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건축학과에 여자는 받지 않아서, 임휘인은 할 수 없이 먼저 미술학과로 입학한다. 그리고나서 건축학과의 모든 수업을 듣는다.
그때, 미국의 학생은 중국에서 온 학생을 "권비학생(拳匪學生)"이라고 놀렸다(권비는 의화단의 난을 일으킨 의화단원들을 멸시하여 부르는 명칭임). 중국학생들은 전형적이고 고지식해서, 변통할줄도 모르고, 사람을 사귈줄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휘인은 달랐다. 성적도 우수하고, 성격도 밝았다. 그래서 모두 그녀와 친구가 되었다.
임휘인은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양사성이 그녀를 만나러 가면 항상 반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얼굴, 머리, 의복과 양말,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입학한지 1달도 지나지 않아, 양사성은 모친이 불행히 병사하였다는 전보를 받는다. 1년후에는 양계초가 서신을 보내어, 임휘인의 부친 임장민이 전쟁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두 사람은 비통해 했고, 임휘인은 귀국하여 장례에 참가하려 한다. 그러나 양사성이 말리면서 그녀의 학비를 대신 내주고, 공부에 전념하도록 해준다.
1927년, 양사성과 임휘인은 정식으로 약혼한다. 다음 해, 두 사람은 각자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중국주캐나다총영사관의 로비에서 혼례를 거행한다.
임휘인은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입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중국식 혼례복은 구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궁리한 후에 그녀는 스스로 동방식의 결혼예복을 설계한다. 봉관하피(鳳冠霞披)
혼례식은 융중했다. 임휘인이 양사성에게 걸어간 후, 양사성은 그녀의 뺨에 키스를 했다. 다음 날, 임휘인과 양사성의 결혼사진은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결혼전에, 양사성은 임휘인에게 묻는다: "한마디만 하겠다. 이번에만 묻겠다. 다음에는 다시 묻지 않을 것이다. 왜 나인가?"
임휘인은 그의 눈을 보며 말한다: "답은 아주 길다. 내가 평생동안 너에게 답을 말해주겠다.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4
1928년 가을, 양사성과 임휘인은 심양(瀋陽)으로 가서, 동북대학(東北大學)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리고 최초의 건축학과를 설치하며, 학과에는 그들 두 사람의 교수만 있었다.
임휘인은 유머스럽게 말하고, 자주 학생들을 데리고 청소릉(淸昭陵)과 심양고궁(瀋陽故宮)으로 가서 수업을 했다. 강의를 시작할 때면 학생들을 대청문(大淸門) 앞으로 데려가서, 어떤 느낌이 드는지 물어본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너희는 이 궁전의 미학구조를 가장 잘 표현한 곳이 어디인지 말할 수 있겠는가?"
학과가 막 만들어졌기 때문에, 임휘인의 임무는 아주 많았다. 이미 임신을 했지만, 학생들에게 영어보충수업도 해야 해서, 자주 깊은 밤까지 일했다. 양사성은 도처를 다니며 고찰하고, 쉴 시간이 없었다.
다음 해, 양계초가 우신(右腎)을 절제하다가 잘못하여 불행히도 사망하게 된다. 얼마 후, 임휘인은 큰딸을 낳는다. 이름은 양재빙(梁再氷)으로 짓는다. 3년후 다시 아들을 낳는다.
결혼후, 임휘인과 양사성은 서로 생각이 달랐다. 그래서 자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임휘인은 매일 스스로를 몇번이고 단장했다. 그리고 득의만면하여 말한다: "내가 남자라면 한눈에 반해 기절할 것같다." 양사성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기절하지 않았는데..."
1931년, 임휘인과 양사성은 심양에서 북평(北平, 당시 북경을 북평으로 부름. 수도가 남경이어서)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중국영조학사(中國營造學社) 일을 시작한다. 임휘인은 모친을 모셔와서 함께 산다.
"중국영조학사"는 중국고대건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민간학술기구이다. 그들은 동쪽 성벽에 가까이 붙어 있는 북총포후통(北總布胡同)의 사합원(四合院)을 하나 임차했는데, 환경이 청유(淸幽)하여 임휘인이 아주 좋아했다.
임휘인과 양사성은 전원에 거주했고, 후원에는 김악림(金岳霖)이 거주했다. 두 사람은 그를 "노김(老金)"이라고 친근하게 불렀다. 김악림은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었고, 한번은 꿈속에서 '사서'를 외웠다. 어린 나이에 청화대학에 합격했고,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서지마의 소개로 김악림은 후통으로 와서 양사성과 임휘인을 만났고, 세 사람은 말이 잘 통했다. 김악림은 그 자리에서 양사성, 임휘인과 이웃이 되기로 결정한다.
후원은 아주 좁았다. 나무도 없었다. 김악림은 요황(姚黃, 노란색의 모란) 한그루를 심었는데, 한여름이 되면 찬란하게 꽃이 피었다.
아침을 제외하고, 점심과 저녁은 김악림이 모두 전원으로 가서 양사성, 임휘인 부부와 함께 했다. 식사를 마치면 거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각종 책을 읽었는데, 대부분은 영문서적이었다. 철학, 미학, 도시계획이 망라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 치열하게 논쟁을 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서지마도 참가했다.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김악림은 이렇게 썼다: "그녀는 격정이 무한하고, 창조력이 무한하다. 그녀의 시의(詩意)는 예민한 감수성과 감상성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녀는 사람이 갈구하는 것을 모두 갖추었다."
11월, 임휘인은 중국에 온 외교사절들에게 중국건축예술을 강연할 예정이었다. 모임에서 친구들이 그 말을 하자, 서지마는 상해로 돌아가는데 반드시 돌아와서 듣겠다고 말한다.
19일, 서지마는 비행기를 타고 북경으로 임휘인을 강연을 들으러 가다가 도중에 사망한다. 임휘인은 강연이 끝나도록 서지마를 보지 못했다. 귀가한 후, 양서성과 함께 친구집으로 가서 상황을 물어보다가, 비행기사고가 있었다는 말을 듣는다. 임휘인은 그 자리에서 혼절한다.
1달후, 임휘인은 신문에 <도지마(悼志摩)>라는 글을 싣는다. 양사성은 그녀를 위해 검게 탄 비행기파편을 주워와서 벽에 걸어둔다.
서지마가 죽은 후, 김악림과 임휘인, 양사성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진다.
하루는 김악림이 방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데,돌연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것을 듣는다. "노김" 김악림은 빠른 걸음으로 마당으로 나가봤더니, 양사성과 임휘인이 지붕 위에서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김악림은 그들이 떨어질까봐 겁나서, 그들에게 빨리 내려오라고 말했다. 그들은 크게 웃으면서 내려왔다. 그후 김악림은 그들 두 사람이 지붕위로 올라가서 측량을 해서 수치를 알아내는 것을 보고는 그들을 위해 대련을 하나 지어준다: "양상군자(梁上君子), 임하미인(林下美人)"
양사성은 그 대련을 듣고 아주 기뻐하는데, 임휘인은 그렇지 않았다. "정말 싫다. 무슨 미인이고 아니고. 마치 여자는 다른 건 할 줄 모른다는 말같다.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김악림은 그 말이 맞다며 연신 손뼉을 쳤다.
1932년, 일본이 동북삼성을 점령한다. 일본학자는 공개적으로 말했다: 중국국내에 이미 당나라때의 목조건축물은 없다. 그러나 임휘인과 양사성은 분노하며 말했다: "중국대지의 어느 조용한 구석에는 반드시 당나라때의 목조건축물이 있을 것이다."
그때, 중화대지는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다. 임휘인, 양사성은 고찰단의 몇몇 학자들과 함께 출발하여, 측량도구를 가지고, 전쟁의 포성을 넘어, 고찰측량제도의 길을 시작한다.
매번 출발하기 전에, 임휘인은 기도했다. 우리가 당나라때의 목조건축물을 찾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5년후, 산서(山西)의 두촌(豆村)에서 일행은 마침내 불광사(佛光寺)를 발견한다.
정리업무는 고되다. 대들보위에 쌓인 먼지는 몇치두께는 되었다. 도리는 이미 박쥐의 집이 되었고, 수백수천마리가 뗴를 이루어 살고 있었다. 그리고 벌레도 무수히 많았다. 며칠 후, 문자 한줄에 마침내 나타난다: 공덕주고좌군중위왕(功德主故左軍中尉王). 임휘인과 양사성을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두 사람은 원고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통상적으로 임휘인이 자신의 생각을 말로 얘끼하면, 양사성이 그림으로 그리고, 그후에 임휘인이 글을 쓰는 식이었다.
양사성은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중국의 옛말에 '문장은 자기 것이 좋고, 마누라는 남의 것이 좋다'는 말이 있는데, 나같은 경우는 다르다. '마누라는 내 것이 좋고, 글은 마누라의 것이 좋다.'"
5
노구교(盧溝橋사건이 일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평이 함락된다. 임휘인과 양사성도 어쩔 수 없이 피난을 가야 했다.
울퉁불퉁한 흙길을 뚫고, 일가족은 마침내 곤명(昆明)에 도착한다. 막 거처를 찾자 마자, 양사성이 병으로 쓰러진다. 등의 통증으로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가족을 유지하기 위하여, 임휘인은 운남대학(雲南大學)의 학생들에게 영어보충수업을 하면서 한달에 40원을 벌었다.
일본군용기의 폭격을 피해 도망치다가, 양사성은 고건축물을 측량하는데 쓰는 가죽자(皮尺)를 잃어버리고, 하루종일 우울해 했다. 돈을 받자, 임휘인은 시내로 나가서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한 잡화점에서 가죽자를 발견한다. 23원이었다. 임휘인은 너무 비싸다고 여겼지만, 이를 악물고 샀다. 남은 돈으로는 아이들의 신발을 사고, 고기를 약간 사서, 다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준비했다.
이런 나날이 1년을 넘어갔다. 곤명의 상황도 갈수록 나빠진다. 매일 몇차례씩 폭격이 이루어졌다.
1940년말, 영조학사는 사천(四川) 이장(李莊)으로 옮겨간다. 임휘인도 가족을 끌고 할 수 없이 이사해야 했다. 양사성은 파상풍으로 어쩔 수 없이 곤명에 남아서 치료했다. 그때 이장은 자주 작았고, 총인구가 4천명도 되지 않았다.
이장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휘인은 폐결핵이 재발한다. 열이 40몇도까지 올라갔고, 몇주간 열이 내려가지 않았다.
이장에는 상수도가 없었고, 전기도 없었다. 아무런 치료할 여건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저녁에 임휘인은 식은 땀이 나면서 아주 괴로워했지만 혼자서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딸은 젖은 여러 개의 베조각을 말리기 위해 줄에 걸어놓은 것을 보고 몰래 눈물흘린다. 모친이 자신을 떠나지나 않을까 겁이 나서, 일기에 이렇게 적는다: "아빠. 왜 아직 안오시는 거예요."
임휘인은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위로했다: "아이야. 엄마는 괜찮다."
1941년 4월, 양사성이 이장에 도착한다. 병이 들어 모습이 말이 아닌 처를 보고 아주 가슴이 아팠다. 집안은 엉망진창이었다. 양사성은 모든 집안 일을 떠맡는다. 불을 지피고, 탕을 끓이는 것, 그리고 정맥주사를 놓는 법까지.
의사는 양사성에게 이렇게 말한다: "폐결핵은 격리시켜야 합니다." 양사서은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그럴 필요없습니다." 그후 그도 폐결핵에 걸린다.
먹을 거리를 살 돈이 없자, 양사성은 자신이 아끼는 물건들을 전당포에 맡기러 간다. 전당포주인은 아주 인색했다. 그에게 주는 돈은 겨우 물고기 두 마리를 살 돈이었다. 물고기를 사서 집으로 돌아와서 처에게 이렇게 농담을 던진다: "이건 파카펜을 끓인 것이고, 이건 금시계를 구운 것이다."
생활의 곤란이 계속되었지만, 그래도 양사성은 여러 해동안 준비한 <중국건축사>를 집필한다. 임휘인은 문헌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준다.
그때, 임휘인은 자주 각혈을 했다. 그러나 글을 쓸 때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임휘인이 글을 쓸 때, 양사성은 밤을 세워 제도를 한다. 그의 척추도 심각하게 손상을 입어 작은 화병을 턱아래 받쳐서 머리와 척추가 받는 압력을 줄였다.
여름방학이 되자, 김악림이 이장으로 온다. 임휘인을 처음 봤을 때는 거의 못알아볼 정도였다. 해골처럼 말라 있어서. 다음 날, 김악림은 시장으로 가서 병아리 십여마리를 사온다. 닭을 길러서 달걀을 낳게 되면 먹는 게 좀 좋아질 거라면서.
매일 오후 3시, 그들은 일을 쉬고, 차주전자를 들고 애프터눈티를 마셨다. 임휘인도 침상을 마당으로 옮겨와서 두 사람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그때마다 김악림은 임휘인에게 케이크를 한조각 주거나, 말을 한마디 하고는 다시 두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놀았다.
임휘인이 친구에게 보낸 서신에서 세 사람이 이장에서 지낸 생활이 묘사되어 있다: 사성은 느긋한 성격이다. 한번에 한가지 일밖에 못한다. 가장 못하는 일이 복잡한 집안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뉴욕센트럴역에서 언제든지 도착하는 각 노선의 열차가 그를 향해 달려오더라도, 나는 아마도 여전히 역장이겠지만, 그는 역이다. 나는 깔려죽을지 모르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 노김은 여행객처럼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한다. 그러나, 역을 더욱 흥미있게 만들어주어서 역장은 더욱 기쁘다."
6
1945년, 일본이 무조건항복을 한다. 양사성은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돈으로 술과 고기를 샀고, 임휘인도 즐겁게 몇잔을 마셨다.
북평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가족은 먼저 중경으로 가서 친구를 만난다. 그리고 의사를 청해서 임휘인의 폐를 검사한다. 의사는 유감을 표시하며 말했다: "임휘인의 양쪽 폐와 신장 하나는 이미 폐결핵에 감염되었다. 살 날이 아마도 겨우 5년정도일 것이다." 양사성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멍하게 임휘인을 쳐다보았다.
임휘인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가볍기 양사성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가자.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북평에 돌아온 후, 양사성과 임휘인은 청화대학 건축학과에 교수로 초빙된다. 양사성이 미국으로 가서 강의를 할 때, 임휘인은 국내에서 집안 일을 도맡았다.
매일 밤에 임휘인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기침을 했다. 페평이 신장에 전이되어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전에 임휘인은 친구에게 작별편지를 보낸다. 이어서 그녀를 보기 위해 돌아온 양사성에게 미소를 보이려 노력했다.
눈을 떴을 때, 임휘인은 양사성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휘인, 마침내 깨어났구나!"
북평이 평화롭게 해방된 후(인민해방군이 무혈입성), 임휘인과 양사성은 청화대학 국휘(國徽)설계팀에서 일한다. 그후, 임휘인의 몸은 완전히 망가진다. 매일 침대에서 일어나 동료가 보내준 책을 읽으려 했지만, 두 줄을 읽기도 전에 머리가 어지러워 다시 침대에 누워야 했다. 임휘인은 두 눈이 쾡해서 이미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양사성도 병이 든다. 폐결핵이 재발한 것이다. 의사는 두 사람의 병실을 나란히 배치했다. 비록 2분거리이지만, 아무도 움직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임휘인은 정신이 약간 좋아질 때면 시를 읽었다. 그녀는 거울은 보지 않았다. 자신의 움푹 들어간 얼굴모습을 보는 것이 두려워서.
1955년 설날이 지난 후, 양사성의 병세는 호전된다. 매일 임휘인의 병실로 가서 그녀와 함께 지낸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조용히 얘기를 나누었다. 양사성은 처음 본 순간부터 회고하기 시작했다. 임휘인은 깜짝 놀란다. 그녀는 양사성이 그렇게 또렷이 기억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임휘인은 계속 고열에 시달렸고, 양사성은 갈수록 두려워진다. 그는 처가 이번에는 정말 떠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나 임휘인은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3월 31일 밤에 임휘인이 돌연 간호사를 부른다.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성을 다시 한번 만나 몇 마디 말을 하고 싶다고. 간호사는 밤이 깊었으니 내일 말씀하시라고 말한다.
새벽, 임휘인이 세상을 떠난다. 양사성은 비틀거리며 임휘인의 병실로 가서, 방성대곡한다. "휘인, 고생했다. 정말 고생했다."
김악림은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무실에서 멍하니 있었다. 한 학생이 그를 찾아갔는데,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돌연 크게 소리쳤다. "임휘인이 갔다!" 그 말을 마치고는 팔에 머리를 묻고 대성통곡했다. 몇분 후 몸을 세운 후 조용히 눈물을 닦고는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임휘인이 병사한지 7년후, 양사성은 자기보다 27살어린 임수(林洙)와 재혼한다. 임수는 원래 임휘인의 제자이다. 그리하여 주변의 친구들과 친척들이 많이 반대했다.
임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날, 양사성이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대담한 편지를 썼다: "정말 생각디조 못했다. 네가 이때 돌연 나타나서 여러 해동안의 적막을 깨주면서, 나에게 막대한 행복을 가져다 줄 줄은. 네가 그것을 다시 가져가지 말아달라. 내가 정식으로 너에게 '신청서'를 보내더라도 네가 '승인'할지 아닐지 알지 못하겠다. 나는 이미 완전히 너의 '포로'가 되었다" 서명난에는 '심신이 불안정한 성'이라고 적었다.
임수는 그 자리에서 편지를 읽었다. 양사성은 그녀에게 너무 당돌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닌가 걱정하여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앞으로...다시는 이런 글을 쓰지 않겠다." 그때 임수가 그의 품에 뛰어들며 울음을 터트렸다.
양사성은 말련에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요 몇년간 임수에게 많이 미안하다."
임수는 인터뷰때 이렇게 말한다: "임휘인은 좋은 처는 아니었습니다. 집안일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식사를 준비하지도 않았고. 식사는 모두 보모가 했습니다."
김악림은 끝까지 혼자 지낸다. 매번 임휘인의 기일이 되면, 항상 묘지를 찾아가서 묵묵히 꽃다발을 올렸다.
하루는 김악림이 돌연 여러 친구들을 북경반점으로 불러서 연회를 개최하면서, 이유는 전혀 밝히지 않았다. 모두 한참을 생각한 후에 비로소 이 날이 특수한 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연회를 시작할 때, 김악림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말한다: "오늘이 휘인의 생일이다."
말년이 되어, 김악림은 더 이상 임휘인에 대하여 말을 꺼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임휘인의 시집 재판에 글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김악림은 한참을 생각한 후에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고싶은 모든 말은 그녀에게 직접 해야 한다. 내가 그녀에게 직접 말할 기회가 없었으니, 나는 말하고 싶지 않다."
말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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