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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상시11

동탁(董卓)의 본모습은 어떠했을까? 글: 삼갑제사(三甲第四) 먼저 얘기할 것은 이 글은 동탁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탁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바로 "권경조야(權傾朝野)", "전횡발호(專橫跋扈)", "흉포잔인(凶暴殘忍)", "도행역시(倒行逆施)", "죄악영천(罪惡盈天)", "악관만영(惡貫滿盈)"으로 표현한다.. 2018. 6. 19.
삼국소인물(4): 허유(許攸). 탐욕에 눈이 멀어 목숨을 잃은... 글: 살사(薩沙) 허유는 삼국시대 중전기의 핵심인물이다. 관고지전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그는 재능이 있으나 탐욕이 많았던 소인이다. 최종적으로 자신의 독특한 성격으로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는 원래 원수 휘하의 참모였다. 그리고 원소를 위하여 적지 않은 기책묘계를 올린 바 .. 2018. 1. 9.
조조는 동탁을 암살하지 않았다. 글: 불감왕언(不敢枉言) <삼국연의>에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는 장면이 있다. 당시 동탁이 권력을 농단하고 있어서, 사도 왕윤이 신하들을 불러모아놓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돌연 조조가 박수를 치며 크게 웃는다. "조정의 공경들이 밤부터 낮까지 곡을 하고, 낮에서 밤까지 곡을 하.. 2015. 2. 10.
십상시(十常侍)의 수수께끼. 글: 우후양광(雨後陽光) <삼국연의> 제1회의 첫페이지에 소위 "십상시"가 등장한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당시에 환관 조절(曹節)등이 권력을 농단해서, 두무(竇武), 진번(陳蕃)이 그들을 주살하려고 모의했다. 그러나, 기밀이 누설되어 오히려 피살을 당한다. 환관들은 이때부터 더욱 .. 2015. 1. 15.
한소제(漢少帝): 환관묘에 묻힌 유일한 황제 글: 문재봉(文裁縫) 고대인들은 사후의 묘를 쓰는 것을 아주 중시하였다. 백성의 집안들도 그러했으니, 황실귀족은 더욱 그러했다. 이치대로라면, 황제의 묘는 설사 금벽휘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신경써야 할 것이다. 다만, 한소제가 죽은 후, 그저 아무렇게나 환관의 묘에 묻어버린다.. 2014. 12. 15.
황건적의 난 이후의 5년 (3): 흔들리는 한영제와 떠오르는 영웅들 한영제는 역사적으로 혼군(昏君)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 점에 관하여 얘기한 사람은 너무 많다. 동탁마저도 한 마디를 했다: "매번 한영제를 생각하면, 분독(憤毒)하게 된다"(<후한서.원소열전>)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 한영제에 대하여 개관논정(蓋棺論定)한 사람으로 가장 뛰어.. 2014. 12. 12.
원소(袁紹)의 영웅기개: "모두 어딜 갔는가?" 글: 동호소주(東湖少主) 원소의 가족은 사세삼공(四世三公)으로 명성이 혁혁했다. 원소에 이르러, 마찬가지로 삼공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는 조상의 음덕으로 명성과 지위를 잃은 적이 없다. 단지, 한나라황실이 쇠약해지고, 정치가 부패하였으며, 원소의 지위는 대장군 하진(何進)의 뒤.. 2014. 4. 4.
환관과 사대부: 누가 더 나쁜 짓을 많이 했는가? 글: 문재봉(文載縫) 동한 후기 하진(何進)은 여동생과 후궁태감의 관계를 이용하여 대장군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그는 대권을 장악한 후,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무고하고 선량한 태감들을 해친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사서에는 함부로 적었다. 이것은 모두 태감들이 횡행불법을 저질.. 2012. 9. 19.
장양(張讓): 황제가 '아버지'라고 부른 환관 글: 이치아(李治亞) 태감은 몸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역사상 적지 않은 일을 했다. 어떤 사람은 황제를 끼고 명령을 내렸으며, 어떤 사람은 여러 신하들을 압도했다. 어떤 때는 모든 사람에게 허리를 굽히지만, 일단 득세하면 왕왕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횡한다. 처자식이 없기.. 2012. 6. 3.
한영제(漢靈帝): 부자가 되고 싶었던 황제 글: 섭지추(葉之秋) 한영제를 얘기하자면 많은 사람들은 제갈량의 <출사표>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릴 것이다: "선제(유비)께서는 한환제, 한영제에 대해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先帝未嘗不嘆息於桓靈也)". 제갈량이 보기에, 그리고 많은 역사학자들이 보기에, 한나라가 쇠망한 것.. 2012. 3.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