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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십상시(十常侍)의 수수께끼.

by 중은우시 2015. 1. 15.

글: 우후양광(雨後陽光)

 

<삼국연의> 제1회의 첫페이지에 소위 "십상시"가 등장한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당시에 환관 조절(曹節)등이 권력을 농단해서, 두무(竇武), 진번(陳蕃)이 그들을 주살하려고 모의했다. 그러나, 기밀이 누설되어 오히려 피살을 당한다. 환관들은 이때부터 더욱 횡행한다....나중에 장양(張讓), 조충(趙忠), 봉서(封諝), 단규(段珪), 조절(曹節), 후람(侯覽), 건석(蹇碩), 정광(程曠), 하운(夏惲), 곽승(郭勝)의 10명이 서로 결탁하여 나쁜 짓을 많이 한다. 그래서, "십상시"라고 불렀다. 한영제는 장양을 아주 총애하여 "아부(阿父)"라고 불렀다. 조정은 날이갈수록 어지러워지고, 천하의 인심이 혼란스러워진다. 그리하여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난다."

 

이전에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아무런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 여러번 읽다보니 문제가 나타난다: 자세히 십상시의 최후를 살펴보다보니, 두 사람의 행방이 불명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봉서, 황건적과 친분을 가진 것으로 참수된다. 시간은 중평원년 즉 184년이다.

건석, 대장군 하진을 죽인 죄로 중상시 곽승에 의하여 피살된다. 시간은 중평6년 여름사월이며, 189년이다.

다른 6명은 모두 중평6년(189년) 여름 육월 궁정내란때 사망한다: 조충, 정광, 하운, 곽승의 4명은 취화루 앞으로 끌려가서 살을 베어내어 다져지는 죽음을 당한다; 장양, 단규, 조절, 후람은 태후 및 태자와 진류왕을 붙잡아 내성으로 간다. 그리고 뒷길로 북궁으로 간다. 장양은 사태가 긴박한 것을 보고 강에 몸을 던져 죽고; 단규는 민공(悶貢)에게 피살된다.그런데, 나머지 두 사람 조절, 후람은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1. "당시에 환관 조절(曹節)등이 권력을 농단해서, 두무(竇武), 진번(陳蕃)이 그들을 주살하려고 모의했다. 그러나, 기밀이 누설되어 오히려 피살을 당한다. 환관들은 이때부터 더욱 횡행한다"는 사실은 확실히 존재했다. 시간은 한영제 건녕원년(168년) 팔,구월같이다. 이전인 167년 12월, 한환제가 붕어하고, 자식이 없었다. 성문교위 두무등이 해독정후 유굉을 황상으로 옹립한다. 당시 유굉은 12살이었다. 12살된 유굉은 번왕에서 황위에 즉위한 후, 두무를 대장군에 봉하고, 진번을 태부에 봉한다. 중상시 조절은 안향후가 된다. 황제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당시 중상시인 조절, 후람, 관패(官覇), 소강(蘇康), 공승흔(公乘昕), 왕보(王甫), 정삽(鄭颯 및 한영제의 유모인 조부인(趙夫人)등이 조정을 독단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진다. 대장군 두무, 태부 진번은 이들 득세한 십상시, 소황문을 모조리 죽여버리고자 밀모한다. 그리고 그해 8월 중상시 관패와 소강을 처결한다. 그들이 다음 행동에 나서려 할 때, 조절,왕보등을 우두머리로 한 중상시는 신변에 있던 어린 황제와 황태후를 붙잡아두고, 9월에 돌연 기습을 한다. 일거에 두무, 진번을 죽여버린다. 조정의 일문일무의 양대중신이 이렇게 환관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관이 기세를 얻어 더욱 기고만장한다. 사대부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기운이 약해진다. 그러므로, 환관은 득세하여 더욱 발호하고, 사대부들은 하나같이 기운을 잃고 고개를 숙인다. 조정대권은 이때부터 환관의 손에 넘어간다.

 

2. 후람, 조절의 행방에 대하여

 

중상시 후람은 한환제 연희2년(159년) 겸백(縑帛) 오천필을 바쳤고, 한환제는 그를 관내후로 봉했다. 그리고 일찌기 양기를 주살하는 밀모에 참가하였으므로 다시 고향후(高鄕侯)에 봉해진다. 그 이후, 후람은 교만하고 발호하게 되며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 그의 천척들은 많은 사람들이 고위관직에 오르고, 지방에서 횡행하며,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며 많은 뇌물을 챙겨서 명성이 아주 나빴다. 마침내 한영제 희평원년(172년) 오월 누군가 그의 죄를 고발하자 자살하고 만다.

 

중상시 조절은 한영제를 옹립하는데 공을 세워 장안향후(長安鄕侯)에 봉한다. 나중에 두무, 진번을 주살하는데 공을 세워 장위위(長樂衛尉)에 오르고, 육양후(育陽侯)에 봉해진다. 부모형제자식조카들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사, 군수를 지낸다. 지위가 높고 권력이 커서 후람, 왕보등 중상시와 함께 결탁하여 온갖 비위를 저지른다. 조절은 수단이 아주 독랄하고, 또한 아주 교활하였다. 후람, 왕보등의 사건이 발생하여 차례로 처결당할 때, 조절은 매번 교묘하게 화를 피한다. 나중에 거기장군, 상서령, 대장추(大長秋)등의 관직에 오른다. 조정의 많은 정직한 대신은 그의 손에 죽었다. 조절은 한영제 광화4년(181년) 병사한다.

 

그러므로 정사의 기록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소위 중평6년(189년) "장양, 단규, 조절, 후람등이 태후, 태자 및 진류왕을 붙잡아 내성으로 가고 다시 뒷길로 북궁으로 갔다"는 말은 허황된 이야기앋. 이때는 조절이 죽은지 이미 8년이 지난 때이고, 후람이 죽은지는 이미 17년이 지난 때였다. 나관중으로서는 이런 모순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예 이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는 언급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3. 여러 대장군이 중상시의 손에 죽다.

 

대장군은 황상 이외에 최고군사장관이다. 동한말기 중상시는 왕왕 황상의 힘을 이용하여 대장군을 제거했다. 이를 보면 환관세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비교적 유명한 중상시의 손에 죽은 대장군은 3명이다:

 

(1) 한환제 연희2년(159년), 대장군 양기는 중상시 단조(單操)등에 의하여 피살된다;

(2) 한영제 건녕원년(168년), 대장군 두무는 중상시 조절등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

(3) 한영제 중평6년(189년), 대장군 하진은 중상시 장양등에 의하여 피살된다.

 

4. 장양이 장양을 존경하고 믿어서 "아부(阿父)"라고 불렀다는데 대하여.

 

<자치통감>에는 이런 묘사가 있다: 한영제는 자주 말했다. 장상시(장양)은 나의 부친이고, 조상시(조충)은 나의 모친이다.

 

5. 십상시는 도대체 누구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한영제 중평원년(184년), 낭중 장균은 황상에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한다: "십상시(당시의 조충, 장양, 하운, 곽승등 12인)를 마땅히 참해서, 수급을 남쪽교외에 걸어두어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원래 소위 십상시는 황상의 곁에 있던 12명의 중상시(中常侍)를 가리킨다. 위에서 열거한 4명 외에 건석, 정광, 단규, 송전(宋典), 여강(呂强)등이다. 나머지 3명은 이름을 알지 못한다. 여강은 아주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정직한 환관이다. 여러번 한영제에 이렇게 진언한다: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하십시오. 연회와 음악을 적게 하고 백성들이 힘들어하는 일을 줄여주십시오." 그는 조충등의 배척을 받고, 모함을 받아 자살한다. 이는 바로 중상시라고 하여 모두 나쁜 사람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중간에 이런 충신도 있었던 것이다.

 

[주석]

 

중상시: 서한때 황제의 근신. 중상시는 허함(虛銜)의 가관(加官)이었다. 즉 실권이 부여되지 않고 부가적인 관직이었다. 서한 전기에는 상시(常侍), 혹은 상시랑(常侍郞)이라는 명칭만 있었고, 낭관(郎官)의 하나였다. 이 칭호를 얻는 자는 대부분 황제가 총애하는 신하였다. 한무제때 동박삭이 상시랑을 지낸 바 있다. 중상시라는 명칭은 서한후기에 나타난다. 한원제때 중상시 허가(許嘉)가 있었다. 동한때 중상시는 이미 더 이상 가관(加官)이 아니게 된다. 구체적인 직무가 있는 관직으로 바뀐 것이다. 질(秩)은 천석(千石)이었다. 나중에는 이천석으로 올라간다. 원래 정원은 없었다. 한명제때는 4명이었다. 동한초기에는 서한제도를 바꾸어 환관이 이 직책을 맡게 된다. 예를 들어, 한장제, 한화제때 정중, 채륜이 모두 소황문에서 중상시가 된다. 한안제때 화희등황후가 임조(臨朝)한다. 중상시는 모두 환관으로 임용하고 중임을 맡긴다. 이후, 이 관직에 오른 환관은 권력이 커지게 된다. 정원은 4명에서 10명으로 증가된다. 동한말기에는 다시 12명으로 증가된다. 이 관직은 동한말 중앙정권이 쇠락하는데 비교적 큰 영향을 미친다.

 

대장군: 중국고대 각 광조에서 자주 설치한 무관의 직위명칭이다. 그 실제직권은 변화가 컸다. 다만 많은 경우 군사지휘관 내지 군사최고지휘관이었다.

 

태부(太傅): 중국고대의 관직명. 처음에는 춘추시기 진(晋)나라에서 시작하고, 국왕의 보좌대신이었다(보필관으로 국왕이 어리거나 자리를 비웠을 때, 그들이 대신 국가를 관리했다). 예법의 제정과 반포시행을 맡았고, 삼공(三公)의 하나이다. 전국시대 제(齊)나라와 초(楚)나라에도 태부를 둔다. 진(秦)왕조때 폐지된다. 서한때 두 번 잠시 이 직위가 부활된 바 이싿. 그러나 동한때는 장기간 설치되었다. 동한에 태부, 태위, 사공을 삼공이라 불렀고, 직위도 높고 권한도 컸다. 태부는 또한 삼공의 우두머리이다.

 

소황문(小黃門): 한나라때 황문시랑보다 1급이 낮은 환관. 나중에는 널리 환관을 지칭하는 말이 된다.

 

겸백: 겸백은 일종의 매끈매끈하고 깨끗하며 가늘고 얇은 비단을 말한다. 고대에 중요문건을 여기에 썼다.

 

향후(鄕侯): 한나라때의 열후(列侯). 식현을 후국이라 한다. 공이 큰 자는 식현(食縣)을 받고 적은 자는 식향(食鄕)을 받는다. 동한후기에는 현후(縣侯), 향후(鄕侯), 정후(亭侯)등 작위를 둔다.

 

위위(衛尉): 진나라때부터 나타났으며 구경(九卿)의 하나이다. 한나라때는 진나라제도를 그대로 썼고, 위사를 이끌고 궁궐을 호위하는 관직이다. 수나라이후에는 군기(軍器), 의장(儀仗)등을 관장하는 관직으로 바뀐다. 진시황때 위위갈(衛尉竭)이 있었다. 한경제때는 한때 중대부령(中大夫令)으로 바꾸었으나, 나중에 다시 원래 명칭으로 돌아간다. 신망(왕망의 신왕조)시기에 대위(大衛)로 고친다. 동한때는 여전히 위위라 창힌다. 위위는 즉, 위장군(衛將軍)이다.

 

거기장군(車騎將軍): 한나라때 대장군, 표기장군에 바로 다음가는 군직. 금인자수(金印紫綬)로 지위가 상경(上卿)에 상당한다.

 

상서령(尙書令): 관명, 진나라때 시작하여 서한때 계속하여 설치된다. 원래는 소부(少府)의 속관(屬官)이다. 한경제중6년(기원전144년) 대장추로 고쳐진다. <한서.백관공경표>의 안사고(顔師古) 주석에 따르면: "추라는 것은 가을걷이를 마친 때를 가리키고, 장이라는 것은 항구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황후를 위한 관명이었다." 서한때는 환관에 쓰기도 하고 사인(士人)에 쓰기도 했다. 동한때는 환관에 쓴다. 황후의 명을 전달하고 장추궁(황후가 거처하는 궁)을 관리한다. 질은 이천석이다. 역대에 계속하여 설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