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문재봉(文裁縫)
고대인들은 사후의 묘를 쓰는 것을 아주 중시하였다. 백성의 집안들도 그러했으니, 황실귀족은 더욱 그러했다. 이치대로라면, 황제의 묘는 설사 금벽휘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신경써야 할 것이다. 다만, 한소제가 죽은 후, 그저 아무렇게나 환관의 묘에 묻어버린다. 이는 역사상 유일무이한 경우이고, 후세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일대제왕의 장례가 어찌 이렇게 형편업을 수 있었을까?
한소제 유변(劉辯)은 한영제 유굉(劉宏)의 아들이다. 모친은 남양군 완현에서 온 궁녀 하씨(何氏)이다. 유변이 출생한 후, 하씨는 아들을 낳아서 귀인(貴人)이 된다.
유변이 태어나기 전에, 한영제의 황자들은 속속 요절하였다. 그래서 유변이 출생한 후, 한영제는 그를 황궁에서 기르지 않았고, 도인 사자묘(史子眇)의 집에서 기르게 한다. 전해지는 바로는 도인 사자묘는 도술에 능통했다고 한다. 그래서 하씨는 그의 도술을 빌어 아들을 보호하려 했다. 그리고 잘 기르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본명 유변을 부르지 못하고, 그를 "사후(史侯)"라고 부른다.
한영제는 이 황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엄격한 궁정의 예의와 교육을 받지 않아서, 예절과 기질에서 왕미인 소생의 황자 유협(劉協)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신하들이 한영제에게 황태자를 세우자고 건의했을 때, 한영제는 유변에 대하여 행동이 경박하고, 제왕의 위엄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황제가 되는데 적절하지 않다고 보고, 유협을 태자로 삼고자 한다. 다만, 하황후의 궁중에서의 지위가 보통이 아니고 게다가 하황후의 오빠인 하진(何進)이 조정내에서 권세와 지위가 높았다. 그래서, 태자를 세우는 일은 계속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영제가 붕어한 후에도 태자의 자리는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씨일족의 세력이 점차 강대해지면서, 조정에서 유변을 태자로 세우자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래서, 유변은 마침내 외숙부 하진의 세력을 일어 황제에 옹립된다. 유협은 발해왕이 되고, 나중에 진류왕으로 고쳐진다.
유변이 즉위한 후, 동한황실의 내부에는 암류가 흐른다.
하진은 권세가 조야를 뒤흔들었고, 한손으로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 조정은 한영제때보다 더욱 몰락했다. 한 무리의 환관과 대신들은 선제가 유변을 황제로 적합하지 않았다고 보았다는 이유를 들어 발해왕 유협을 옹립하고자 한다. 하진은 당연히 이런 자들이 그의 지위를 흔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조리 주살한다. 주범을 모조리 죽인 후, 하진은 칼날을 다른 환관에게 돌린다. 모든 환관을 도살할 피비린내나는 사건을 일으켜 환관세력을 숙청할 준비를 한다.
다만, 하진이 손을 쓰기 전에 소식이 흘러나갔다. 환관 장양, 단규등은 먼저 손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하진이 궁에 있을 때 비밀리에 그를 암살한다. 하진의 부하인 원소등은 하진이 피살된 것을 보고, 군대를 이끌고 궁으로 들어와서 복수를 한다. 환관은 보는대로 죽여서, 모조리 이천여명의 환관이 죽는다.
장양등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유변, 유협을 납치하여 황궁을 벗어난다. 얼마 후, 장양, 단규는 노식의 추격병에 참살당한다. 나머지 환관들은 우두머리가 없어지자, 속속 강에 몸을 던저 자결한다.
도망하는 기간동안, 유변은 풍찬노숙하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부족하여, 온갖 고생을 겪는다. 다만 그의 액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때 동탁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동탁은 비록 성격이 거친 무부이지만, 정치적인 후각은 아주 민감했다. 투기의식도 아주 강했다. 동탁은 하진이 환관세력을 주살할 때 불러온 장수이다. 도중에 궁에서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유변이 납치되었다는 말을 듣고 즉시 그를 모시러 한다. 이를 통하여 향후 조정에서 입지를 굳힐 자본으로 삼고자 했다.
다만, 이런 동탁이 그를 찾아온 뜻을 알지 못하였다. 대군이 밀려오자 공포에 젖어 놀라서 눈물콧물을 다 흘린다. 그는 동탁의 앞에서 전혀 황제의 위엄을 보이지 못한다. 말을 할 때도 더듬거리고, 말의 앞뒤도 맞지 않았다. 유협은 담담하고, 생각도 조리가 있었다. 일거일동이 황제의 풍모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동탁은 유변을 폐위시키고 유협을 세울 생각을 품게 된다.
궁으로 돌아온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유변은 연호를 소녕으로 가꾸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이런 거동도 동탁이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전혀 바꾸지 못한다. 동탁은 하진의 부대를 성공적으로 거두어 들인 후, 그의 원래의 서량병과 합한다. 이를 통하여 그는 실력에 배로 늘어난다. 특히 대장 여포를 휘하로 거둔 후, 더욱 득의만면하고, 내심으로 더욱 광망자대한다.
유협이 연호를 바꾼 다음 해, 동탁은 더 이상 가디라지 못하고 새로운 행동을 시작한다. 그는 먼저 군신대회를 주재하여, 명확하게 유변은 나이가 어리고 능력이 부족하여 일국의 군주직을 맡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어서, 하태후를 핍박하여 유변을 홍농왕으로 삼고 유협을 황제로 세우는 조서를 내리게 한다.
동탁이 이렇게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로 세운 원인은 아주 명확했다. 첫째, 유변은 생부조차도 '성격이 경박하고 위엄이 없다"고 했으니 그 자신에게도 원인이 있는 것이다. 위엄도 없고 능력도 없다. 유변은 전란중에 동탁에게 이러한 인상을 준다. 둘째, 유협은 당시의 나이가 겨우 9살이었다. 유변보다도 어렸다. 그래서 동탁은 유협이 통제하기 더 쉽다고 보았다. 셋째, 동탁이 처음 궁정에 들어와서 아직 뿌리가 튼튼하지 못했다. 여러 신하들은 불복하고 있었다.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로 세우면서 자신의 명망을 높이려 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조야를 뒤흔들고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려 했다.
유변이 폐위된 후, 동탁은 함부로 황제를 폐위시키고, 나라와 정치를 어지럽힌 것에다가 함부로 망녕되게 행동한 것때문에, 천하호걸들의 반발을 사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동탁은 이런 형세에 공황을 느낀다. 군웅이 폐제 유변을 복위시킨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토벌할 것을 걱정한다. 그리하여, 동탁은 유변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려고 한다. 그리하여 동탁은 사람을 보내어 유변에게 독주를 주어 그에게 강제로 마시게 한다. 유변은 스스로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고 보고, 눈물을 머금고 처자식과 작별한다. 일찌기 명목상 동한제국의 최고통치자였던 폐제는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끝마친다. 나이 겨우 15살때이다.
유변이 죽은 후, 그의 장례가 아주 큰 문제로 떠오른다. 신황제 유협은 나이가 어렸다 그래서 동탁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물며 유협과 유변은 마음의 상처가 있었다. 왕미인이 유협을 임신했을 때, 하황후는 아들 유변의 지위가 위협을 받지 않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왕미인의 낙태하도록 핍박했다. 왕미인은 황후를 두려워하여 낙태약을 먹는다. 그러나 태기는 안정되었고, 낙태에는 이르지 않았다. 나중에 왕미인은 유협을 순조롭게 낳는다. 하황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녀를 독살한다. 그리하여 유협은 어려서부터 모친이 없었다.
바로 이런 일부 요소로 인하여 유협은 유변의 장례를 잘 치러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하여, 유협은 유변을 이 죽은 환관 조충이 생전에 만든 묘에 묻도록 조서를 내린다. 조충은 한영제시기의 저명한 '십상시'중 한 명이다. 나중에, 조충은 궁중정변에서 원소에게 주살되어 시신이 버려진다. 그래서 그의 묘도 비어 있었다. 이 빈 묘가 결국은 유변에게 돌아간 것이다.
유변을 조충의 묘에 묻도록 한 것은 유협의 형에 대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 예전의 황제가 환관의 묘에 묻히리라고는 유변 자신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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