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삼갑제사(三甲第四)
먼저 얘기할 것은 이 글은 동탁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탁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바로 "권경조야(權傾朝野)", "전횡발호(專橫跋扈)", "흉포잔인(凶暴殘忍)", "도행역시(倒行逆施)", "죄악영천(罪惡盈天)", "악관만영(惡貫滿盈)"으로 표현한다. 그렇다. 동탁의 일생을 살펴보면, 확실히 군벌로 성공하여, 전란을 이용하여 동한의 권력 정점에 오르고, 황제를 1명 폐위시키고, 황제를 1명 새로 세운다. 장안으로 천도하고, 낙양을 불태웠으며, 재물을 거두기 위하여 함부로 사람을 죽였다. 미오(鶥塢)를 지었고, 여색을 탐했다. 그러다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는 인육을 먹었다는 공포스러운 기록도 남겼다.
역대에 동탁에 대한 평가는 왕왕 욕하는 쪽이다. 필자는 그저 조금 다른 동탁을 보여주고 싶다.
동탁(?-192년 5월 22일) 자는 중영(仲穎), 농서 임도(臨洮)(지금의 감숙성 민현) 사람이다. <후한서>에는 그에 대하여 성격이 거칠고 용맹하며 모략이 있다. 어려서 강족의 사이에서 자란다. 호걸들과 교분을 가졌고, 나중에는 돌아가 농사를 지었다. 여러 호걸들이 와서 그를 따랐다. 동탁은 그들을 위하여 농사짓는 소를 잡아서 같이 즐겼다. 호걸들은 감격하여 여러 가축 천여마리를 그에게 보내주었다. 이를 통해 건협(健俠)으로 이름을 얻는다." 이것은 두 가지를 설명한다. 하나는 동탁이 어렸을 때 용맹하고 모략이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탁이 어렸을 때부터 의기충만했다는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동한시기의 서경에는 강(羌)족이 대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이들 소수민족은 당시에 아직 문화를 접하지 못한 미개한 족속이었다. 한두마디 말이 거칠어지면 바로 칼을 쥐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의기를 보여주어 목숨을 걸고 충성하게 만들었다. 동탁은 이 곳에서 아주 잘 지냈고, 잘 살았다. 이것은 그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뿐아니라 동탁의 승진은 그의 전공과 관련이 있다. <후한서>에는 북쪽의 강족이 반란을 일으켜, 금성사람 변장(邊章), 한수(韓遂)를 장군으로 옹립했다. 동탁은 병력을 이끌고 나가 반란을 평정한다. '반란군을 대파하고, 수급 수천급을 얻는다." 나중에 많은 장수들과 공동으로 출격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패퇴하였는데 오로지 동탁만 전군을 이끌고 귀환했다."
시대가 효웅을 만들다.
동한말기, 동한왕조는 쇠퇴의 조짐을 보인다. 십상시(十常侍)가 권력을 농단하고, 외척대장군 하진(何進)과 권력다툼을 벌인다. 189년, 한영제가 붕어하고, 대장군 하진이 권력을 독점한다. 그리고 이미 태후가 된 여동생 하씨에게 비밀리에 주청하여 십상시를 주살하고자 하나, 하태후가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자 하진은 독단적으로 걸정하여 병주목으로 나가 있던 동탁을 경성으로 불러 근왕하도록 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비밀이 새어나가, 하진이 오히려 십상시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리하여 동탁은 경성으로 들어와 반란을 평정하기 전에 이미 경성은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반란을 평정한 공신이 오히려 황제를 폐위시킨 역신이 되어 버렸다. 동탁은 할 말이 있어도 할 수가 없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경성이 대란에 빠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진다. 동탁이 반란을 평정하고 안정을 되찾은 것은 당연히 공로이다. 다만, 이때의 동탁이 한 가지 일을 하는데, 그의 이미지를 철저히 뒤집어엎었을 뿐아니라, 철저하게 역신적자가 되고, 천추에 욕을 먹게 된다. 바로 동탁폐제사건이다.
일은 이렇게 시작한다. <후한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중상시 단규(段珪)등이 소제(少帝)와 진류왕(陳留王)을 납치하여 소평진으로 간다...소제가 북망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맞이하려 한다. 소제는 동탁이 병졸을 이끌고 오는 것을 보자 공포에 질려 눈물콧물을 흘린다. 동탁이 말을 했지만 대답하지 못한다. 진류왕에게 말을 하여 화란의 일을 얘기하다. 동탁은 진류왕이 현명하다고 여기고, 여기에 동태후가 길러서 스스로 동태후와 동족으로 여겨 소제를 폐위시키고 진류왕을 세울 생각을 했다.
우리는 알고 있다. 권신이 군주를 폐위시키고 새로 세우는 것은 만일 사심에 기한 것이라면 분명히 "폐장입유(廢長立幼)"이거나, "폐평입암(廢明立暗)", 아니면, "폐소입친(廢疏立親)"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통제하기 쉬운 사람을 세우는 것이다. 만일 공심이라면 "폐혼입현(廢昏立賢)"이다. 목적은 천하태평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동탁이 황제를 폐위하고 새로 세운 것은 어떤 것에 속할까?
사료를 보면, 동탁이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로 세운 목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진류왕이 현명했고, 다른 하나는 진류왕은 동태후가 길렀고, 동탁은 스스로 동태후와 동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번째 목적을 보면, 동탁은 천하태평을 위한 마음에서이다. 그래서 폐립의 대죄를 떠안으면서까지 이런 일을 했다. 그러나 두번째 이유를 보면 동탁은 사심도 있었다. "폐소입친" 즉 자기와 먼 사람을 끌어내리고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올린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분석해봐야 한다. 동탁은 동태후와 동종으로 여겼다고 되어 있다. 동종은 일가를 말한다. 그렇다면 동탁과 동태후가 일가인가?
<후한서>에는 동탁이 농서 임도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동태후는 하간(河間, 지금의 하북성) 사람이다. 서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동탁이 어찌 이렇게 먼 곳에 사는 사람을 성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동종이라 여긴단 말인가. 이를 보면 이 사료는 정확하지 않다.
동탁이 황제를 폐위시킨 목적은 앞의 것으로 봐야 한다. 천하태평을 위하여서이지, 한실강산을 빼앗기 위한 것은 아니다.
기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동탁의 처음 목적은 이윤(伊尹)이나 곽광(霍光)을 본받아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것이었다고. 그러나 일은 생각했던 것처럼 진행되지 않았고, 그는 역적이 되어 버린다. 여기에도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폐립황제는 봉건제도하에서 최대의 금기였다. 무수한 투쟁을 불러오게 되고, 무수한 이익분쟁이 벌어지게 된다. 너야 스스로 충성심에서 그랬다고 하지만 누가 그것을 진심이라 믿겠는가. 이윤이라고 하더라도 후세에는 심기가 많고 권모술수를 부렸다으며, 태갑에게 권력을 돌려준 것도 연로하여 부득이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명성을 보전하고 드높이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또 다른 폐립의 권신 곽광은 결국 멸족당했다. 이들 기득이익권자들이 어찌 지방세력자 한 명이 와서 권력을 빼앗아가는 것을 눈뜨고 보고 있겠는가. 그래서 동탁은 이들 대신들에 의하여 역적으로 욕을 먹게 된다. "동탁은 무도하고 왕실을 능멸하고, 태후에게 화를 미치게했으며....결국 호걸들이 분노하여 들고 일어났다"
동탁은 한때 선비들을 예의로 대했다.
동탁의 또 다른 죄명은 중앙관료를 임의로 도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처음에 동탁은 그들과 어울리고자 했고, '예현하사(禮賢下士)"했다.
<후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첫째, 진번, 두무등 당고의 화를 입은 현사들을 추봉해준다. 둘째, 황완, 양표등 원래 한조정의 중앙대신들을 중용한다. 셋째, 자신의 직계인 서량(西凉) 인마를 억제했다.
중용된 자들을 보면 이부성서 한양 주필, 시중 여남 오경이 나중에 동탁에게 피살된다. 그러나 원인은 이 두 사람이 많은 지방관을 추천하는데, 결국 이들 지방자사들이 대다수 반동탁연맹에 가담한다. 동탁이 대노하여 그들 둘이 자신을 배반했다고 여긴다. 그리고 여기서 지적할 것은 동탁이 두 사람을 살해한 후 즉시 후회했다는 것이다. <후한서>에 '바로 후회했다'고 적혀 있다.
동탁이 예현하사한 전형적인 사례는 바로 동탁과 채옹의 관계이다. 채옹은 천하의 현사이다. 그러나 환관의 시기로 망명객이 되었다. 나중에 동탁이 경성에 들어온 후에 갖은 방법으로 그를 불러들인다. 채옹이 경성으로 돌아온 후 동탁이 그를 아주 신임한다. 그가 간언하는 것은 모두 들어준다. 일찌기 세번 동탁에게 하지말라고 간언하는데, 첫째는 한소제 유변을 폐위시키고, 한헌제 유협을 세우라는 것이다. 고관 노식이 간언했을 때 동탁이 죽이려 하였는데, 채옹도 동탁에게 권한 것이다. 둘째는 동탁이 스스로 '상보(尙父)'라 칭하려 할 때이다. 채옹은 그에게 관동을 아직 안정시키지 못했으니 함부로 그런 명칭을 쓸 수 없다고 말한다. 셋째는 동탁이 청개거(靑蓋車)를 탔을 때다 채옹은 지진의 건을 들어 그에게 하지말 것을 권한다. 세번 모두 동탁은 들어준다.
동탁의 이런 은혜에 채옹은 감격한다. 동탁이 이미 살해되었는데도, 채옹은 공개적으로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러다가 결국 왕윤에게 피살당한다. 만일 동탁이 예현하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채옹이 어찌 그에 대하여 이렇게 감격할 수 있었겠는가
동탁이 후비를 간음하고, 인육을 먹었다고?
역사상 동탁은 몇 가지 세상사람들에게 욕먹을 짓을 했다. 하나는 후궁을 간음한 것이고, 하나는 인육을 먹은 것이다.
먼저 후궁간음에 대하여 말해보자. <후한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동탁...은 공주를 간음하고, 궁인을 겁탈했다.." 여기서 동탁이 공주를 간음했다는 것을 보자. 동탁의 권력이 아무리 커야 신하이다. 신하의 신분으로 공주를 간음한다면 대죄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도대체 어느 공주를 간음했단 말인가? 사서에 아무런 설명이 없다. 한번 연구해보기로 하자. 동한말기 황제의 생육능력은 아주 떨어져 있었고, 낳은 자식이래야 몇명 되지 않았다.
한환제는 자식이 없고, 딸만 셋이 있다. 장녀 유화는 연희원년(158년)에 양안장공주가 된다. 불기후 보국장군 복완에게 시집간다; 차녀 유견은 연희7년 영음장공주가 된다. 삼녀 유수는 연희7년(164년) 양적장공주가 된다. 이 세 딸중 가장 나이어린 유수도 동탁이 경성에 들어왔을 때 이미 44살이다. 동탁이 이렇게 나이든 공주를 간음했을 리는 없을 것같다.
한영제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한영제 광화3년(180년)에 만년공주에 봉해진다. 그녀는 한영제의 장공주이나, 출생년도가 정확하지 않다. 한령제가 156년에 태어나서 189년에 죽었고, 만년공주가 180년경에 책봉되었다. 즉 한영제는 공주책봉 9년후에 붕어한다.
한영제는 168년에 즉위하고 나이가 12살이었다. 한영제의 아들 유변(홍농왕)은 176년에 태어난다. 유변이 출생하기 전에, 한영제의 황자들은 이미 요절했다. 그래서 황자 유변이 출생한 후 황궁에서 기르지 않고, 도인 사사묘의 집에서 기른다. 그리고 그의 본명 유변을 감히 부르지도 못하고, 그를 '사후(史侯)'라 불렀다. 유변의 형들은 모두 죽었다. 개략 172-175년 사이의 일이다. 장공주 만년공주도 개략 이 시기에 태어났을 것이다. 이를 통해 추리해보면, 한영제가 죽었을 때, 만년공주는 개략 14살-17살이다. 그러나 한왕조의 규정에 따르면, 공주는 14,5세가 되면 시집간다. 그래서 이때 만년공주가 궁중에 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한헌제에 이르러는 결혼하기도 전이므로 자녀는 아예 없다. 그래서 필자는 동탁이 궁인들을 겁탈하기는 했겠지만, 공주를 간음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동탁이 인육을 먹은 것에 대하여, 사서는 크게 써놓고 있다. 그러나 지적할 것은 동탁은 서량에서 살았고, 그때 서량의 강족은 인육을 먹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인육을 먹었다고 해도 그게 인도에 반한다기 보다는 정상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동탁이 야만적인 습속을 지닌 오랑캐의 땅에서 문화가 흥성하던 동한의 중심으로 들어온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다.
동탁이 황제가 되려고 했을까? 기록이 없다.
<삼국연의>는 동탁을 철저히 몰락시키기 위하여, 동탁이 황제가 되려 했다고 썼다. 그래서 미오에서 장안으로 돌아오고 결국 여포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숙이 십수기를 이끌고 미오로 간다. 보고하기를 천자께서 조서를 내렸다고 한다....동탁이 말하기를, 천자가 무슨 조서를 내렸는가. 이숙이 말하기를, 천자의 병이 나아서 문무백관을 미앙전에 모아서, 태사에게 선양하는 건을 논의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 조서를 내렸습니다. 동탁이 크게 기뻐한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동탁이 정말 황제가 되려 했을까? <후한서>를 보자:
"삼년 사월, 황제의 병이 새로 나았다. 미앙전에 대신이 모였고, 동탁은 조복을 입고 수레에 올랐다.....동탁이 도착한다...이숙이 극으로 그를 찔렀고, 동탁의 갑옷에 막혀 들어가지 않는다. 팔에 상처를 입고 수레에서 떨어진다. 돌아보며 크게 소리친다; 여포는 어디 있는가 여포가 말한다; 조서에서 적신을 토벌하라고 했다. 동탁이 크게 욕하며 말한다;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여포가 모를 가지고 동탁을 찔러간다. 병사들이 그를 참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무슨 선양에 관한 말이 없다는 것이다. 동탁이 황제가 되려 했다는 것은 불공자파(不攻自破)한다.
여기까지 얘기했으니 결론을 말하기로 하자. 필자가 다시 강조하는 것은 동탁의 명예를 회복시킬 생각은 없다. 동탁이 인육을 먹은 것은 어째 보더라도 야만적이고 낙후된 것이다. 동탁이 천도하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낙양의 부호를 함부로 죽여서 그들의 재산을 국고에 넣은 것이나, 미오에 엄청난 재물을 모은 것은 모두 동탁의 죄악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쓴 목적은 동탁을 보다 전면적으로 이해하고자 해서이다. 비록 잔인하지만 교활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의 실패는 스스로에게 원인이 있다. 상대보다 실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악독함으로 화를 불렀다고 할 수는 있지만, 교활함이 형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 한나라는 사백년강산에서 가장 악독하고 가장 교활한 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동탁의 잘못을 다시 범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조아만(曹阿瞞, 조조)이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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