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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삼국)

황건적의 난 이후의 5년 (3): 흔들리는 한영제와 떠오르는 영웅들

by 중은우시 2014. 12. 12.

한영제는 역사적으로 혼군(昏君)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 점에 관하여 얘기한 사람은 너무 많다.

동탁마저도 한 마디를 했다: "매번 한영제를 생각하면, 분독(憤毒)하게 된다"(<후한서.원소열전>)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 한영제에 대하여 개관논정(蓋棺論定)한 사람으로 가장 뛰어난 사람은 범엽(范曄)이다.

"연즉영제지위영야우재(然則靈帝之爲靈也優哉)"(<후한서.효령제기>)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필자가 이해하기로는 한영제가 이리저리 흔들리며 중심을 잡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상당히 자주 흔들렸다.

 

한영제의 마지막 5년은 격렬하게 흔들리면서 지나갔다. 최종적으로 동한왕조는 한 무더기의 폐허가 되었다.

"황건적의 난"이 폭발했을 때, 한영제는 "태관에게 명하여 식사시의 요리를 줄이고, 말은 제사용을 쓰지 않고 모조리 군대에 보냈다" 그러나, 황건적의 난이 막 평정되고 전투의 포연이 아직 가시기도 전에 그는 궁전을 대거 새로 짓는다. 이를 위하여 세금을 더욱 많이 거두자, 거록태수는 약을 먹고 자결한다. 그제서야 한영제는 궁전을 짓는 것을 잠시 멈춘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그는 다시 서원에 만금당을 짓고, 옥당전을 새로 짓고, 동인 넷, 황종 넷, 천록, 하마를 주조하고, 사출문전을 주조한다."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 전후모순되고 좌우충돌하는 행위는 한영제의 집정생애에서 수도 없이 많이 나타났다.

흔들리고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은 한영제의 기본특징이다.

예를 들어, 그와 환관의 관계이다.

한영제와 환관의 관계는 유비와 제갈량보다 더 사이가 좋았다.

이에 대하여 그는 유명한 말을 한 마디 남겼다:

"장상시는 나의 부친이고, 조상시는 나의 모친이다"(<후한서.환자열전>)

장상지는 장양이고, 조상시는 조충이다. 그들은 모두 당시의 환관들중 우두머리이다.

이런 말을 일반인은 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도 안면을 바꿀 때가 있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기 전날, 조정에서는 밀고를 받았다. 황건적이 궁내의 환관인 봉서, 서봉과 결탁하였다는 것이다. 한영제는 이를 알고 난 후, 환관의 최고위층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항상 당인들이 불궤하니 모조리 금고하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더니, 지금 당인들은 더욱 나라에 쓸모가 있는데, 너희는 오리혀 장각과 내통하다니 참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모두 고개를 조아리며 말한다: "그것은 왕보, 후람이 한 짓입니다." 

이것은 원래 환관집단을 숙청해서 정리해야할 일이다. 그러나 낭중 장균이 황건적의 난은 근원이 십상시 때문이니, 십상시를 참해야 마땅하다고 주청하자, 한영제는 먼저 장균의 상소글을 장양에게 보여준다. 장양등은 모두 관을 벗고, 맨발로 머리를 숙이며 스스로 낙양의 감옥에 들어가겠으며, 가산을 모조리 내어 군비로 쓰겠다고 애걸한다. 그러자 한영제는 모두 신발을 신고 모자를 쓰게 하고 예전처럼 대해주었다. 그리고 돌연 장균에게 크게 화를 낸다.

"이자는 정말 미치광리로구나. 십상시중 좋은사람이 1명도 없단 말인가?" 결국 장균은 감옥에서 죽는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한영제는 환관에 대하여 원래 거짓으로 욕을 하지만, 속으로는 사랑했다는 것이다.

이 말이 다 맞는 것은 아니다. 한영제도 환관을 무정하게 버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후람의 자살, 왕보 부자가 옥에서 죽은 것(같이 죽은 사람으로는 저명한 변방장수 단영이 있는데 역시 환관집단의 중요구성원이다). 그리고 여강의 자살은 한영제가 환관에 대하여 모종의 선택적인 포기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례교위 양구가 기회를 틈타 계속 공격하여 왕보와 거의 한몸처럼 움직이던 환관두령 조절(曹節)도 죽음에 몰아넣으려 하자, 한영제가 나서서 제지하고 조절은 편안히 죽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한영제는 환관에 대하여도 한 가지 면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환관에게 그러했고 조정대신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황건적의 난"의 발발을 전후하여, 특히 그 후에는 비록 일찌감치 텅텅 비어버린 조정이지만 여전히 충간을 계속하는 인사가 몇몇 있었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서로 달랐다.

"사도 진탐(陳耽), 간의대부 유도(劉陶)가 직언을 하다가 하옥되어 죽었다."

"시중 향익(向栩), 장균과 같이 환관에 대하여 간언한 사람들이 하옥되어 죽었다."

그러나, 한영제는 관용대도(寬容大度)하고 종선여류(從善如流)하는 일면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부섭과 개훈(蓋勛)에 대하여 그러했다.

부섭과 개훈은 한영제 말기에 얼마 남지않은 충성스러운 인물이다.

부섭은 "평소에 환관을 미워했고" 일찌기 황건적의 난의 근원으로 환관을 지목한 바 있다. 환관들 중에서 간사한 자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화란은 갈수록 심해지고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부섭이 환관들에게 무고를 당하자, "한영제는 부섭의 말을 인정하고 죄를 더하지 않았다. 그러나 작위를 봉하지 않았고 안정도위를 삼았다."

나중에 북궁백옥, 변장등의 반란때, 부섭은 조정회의에서 대노하여 양주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최열을 통박한다. "사도를 참하여야 천하가 안정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어떤 상서는 부섭이 '대신을 조정에서 욕보였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한영제는 그저 담담하게 부설에게 자신의 이유와 견해를 말하라고 하고는 최종적으로 황제는 "부섭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때의 영제는 혼군이라고 부르기는 곤란한 것처럼 보인다.

 

만일 부섭이 공격한 것이 환관과 대신이라고 한다면, 개훈이 공격한 것은 환관과 한영제 본인이었다.

한영제가 개훈을 불러 묻는다. "천하가 왜 이렇게 반란이 많은가?" 개훈이 대답한다. "행신(幸臣, 총애받는 신하)의 자제들이 교란시켜서입니다" 당시 환관으로 상군교위로 있던 건석(蹇碩)이 자리에 있었다. 황제가 건석을 돌어보며 묻자, 건석을 두려워하며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랐다. 이때부터 그는 개훈을 미워하게 된다. 황제가 다시 개훈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군대를 평락관에 펼쳐두었다. 보관해두었던 재물을 많이 내놓아서 선비들을 나오게 하면 어떻겠는가?" 개훈이 대답한다: "신이 듣기로 '선왕은 덕을 밝혔고 병사를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도적은 멀리 있는데 가까이 군대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서는 우리의 용감함을 그들이 알게 할 수는 없고, 그저 무력을 과시하는 것뿐입니다." 황제가 말하기를 "좋다. 그대를 늦게 만난 것이 한스럽다. 여러 신하들은 이런 옳은 말을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처음에 장균이 환관이 나라를 망친다고 얘기했을 때는 한영제가 그를 죽음에 몰아넣었다. 지금 개훈은 환관뿐아니라 황제 자신까지 함께 몰아서 질책하고 면박주었지만, 한영제는 그를 칭찬하였다. 둘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이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게 만든다.

안정성과 명확성이 없다는 것이 한영제 정치이 기본특징이다.

 

이 점을 가장 잘 증명하는 것은 한영제 재위기간동안 매년 시행된 대사면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삼공'등 고위층이 주마등처럼 빈번하게 교체되었다.

황건적의 난 이후, 한영제의 이런 오락가락하는 성격은 더욱 심하게 드러난다. 결국은 동한왕조의 모든 것을 날려버릴 수 있는 거대한 폭탄을 매설해둔 것과 같게 된다.

한영제는 말끝마다 '장상시는 나의 아버지이고, 조상시는 나의 어머니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권력과 신임을 장양과 조충에게 넘겨주지 않고, 소황문 건석에게 넘겨준다.

소황문은 중상시보다 한단계 낮은 환관 직위이다.

한영제가 이렇게 한 것은 황후가족과 관련이 있다.

당시 하황후는 투기로 한영제가 사랑하는 왕미인을 독살한다. 그리하여 한영제의 대노를 샀다. 하황후를 폐위시키려 하였는데, 장양과 조충등이 이를 막았다.

장양은 하황후 가족과 개인적으로 인척관계에 있다.

이것이 아마도 한영제가 권력을 장양, 조충에게 넘겨주지 않은 원인의 하나일 것이다.

한영제는 권력을 최종적으로 황후가족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황건적의 난'이 막 발발했을 때, 한영제는 황후의 오빠인 하진을 대장군에 임명했다. 동한의 평화시기에 대장군은 황후의 부친이나 오빠가 맡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다만 대다수는 '임조칭제'의 황태후의 의지에 의해서였다. 오로지 양상(梁商) 부자와 하진만이 황제본인의 결정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외척의 신분으로 대장군에 오르게 되면 외견상으로는 군사직위이지만, 실제로는 보정(輔政)의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하진이 나중에 한 행동을 보면, 그는 정치적 소양이 결핍되어 있고, 군사적 재능도 모자란 것같다. 한영제가 그를 임명한 것은 완전히 황후와의 관계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영제는 하진과 황후가족에 대하여 포기하는 자태를 보인다.

 

중평5년(188년), 한영제는 서원 팔교위를 둔다.

그 때, 서원팔교위를 두면서 소황문 건석이 상군교위가 된다. 황제는 건석이 건장하고 무략이 있다고 하여 특별히 그를 임명하여 원수로 삼아 사례교위 이하를 모두 관장하게 했다. 비록 대장군이라 하더라도 영속(領屬)되었다.

마지막 '영속'의 의미에 대하여는 모호한 점이 있다. 어떤 사람은 대장군 하진도 건석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최소한, 이것은 건석에 적어도 하진과 대항할만한 군사지휘권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석이 얻은 것은 군사지휘권만이 아니다.

 

황후의 장남이 황태자에 오르는 것은 원래 당연한 일이다. 다만 한영제는 적장자인 유변(劉辯)이 '경박하고 위엄이 없어, 군주의 자리에 오를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하황후에게 독살당한 왕미인의 아들인 유협(劉協. 나중의 한헌제. 동탁은 한영제를 도와 그의 유언을 실행한다)에 뜻을 둔다. "그러나 황후가 유변을 총애하고, 하진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어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중병으로 병석에 누웠을 때, 한영제는 유협을 건석에게 부탁한다.

"육년, 황제의 병이 심해졌다. 유협을 건석에게 맡긴다."

주목할 점이 있다. '탁고(托孤)'가 바로 그를 황태자에 세운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한헌제의 일을 질질끄는 고질병은 최종적으로 이 일도 흐지부지한 방식으로 끝냈다. 

그래서 한영제가 붕어하자, 하진은 건석과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후에 경도해랑(驚濤駭浪)같은 '하진의 난'과 '동탁의 난'이 일어나는 것이다. 

황제(한영제)는 붕어하고 황자는 어렸다. 그리고 황태자는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두 태후는 갈라져서 싸운다. 외척과 환관은 동귀어진한다; 여기에 이전의 관료집단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그 후에 동탁이 입경한다. 황제는 바뀌고, 황태후는 독살당한다. 이런 큰 동란을 겪으면서 동한정권은 유명무실하게 된다. 달리 진행될 가능성이 있었겠는가?

 

'황건적의 난' 이전에 스스로 명호를 내세운 자들이 계속하여 나타났다.

황건적의 난 이후에는 황제를 칭하라고 권하는 자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염충(閻忠)은 황보숭(皇甫嵩)에게 황제가 되라고 권하고; 장현(張玄)은 장온(張溫)에게 황제가 되라고 권하고; 왕분(王芬)은 조조와 연합하여 한영제를 폐위시키고, 합비후(合肥侯)를 황제에 옹립하고자 했으며; 장순(張純)은 장거(張擧)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천자를 칭한다'; 그리고 이휴(李休)는 장로(張魯)에게 황제을 칭하라고 권한다; 종실인 유언(劉焉)도 황제를 칭할 마음을 품는다. 자사를 주목으로 바꾼 것은 바로 유언이 건의한 것이다. 그 후에 그는 술사 동부(董扶)의 말인 '경사에 난이 일어나고, 익주 평야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는 말을 듣고 사천으로 간다.

그러나 마지막에 황제에 오른 것은 조비, 유비와 손권이다.

 

조비가 황제에 오른 것은 완전히 앉아서 그저 먹은 것이다. 손권은 조비와 비슷하기도 하지만 크게 다르기도 하다.

위, 촉, 오의 세 나라는 조조, 손견과 유비가 진정한 창업자이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비는 아직 출생하지 않았고, 손권은 2살, 손책은 9살이었다.

손견은 한영제와 나이가 같다. 생졸년이 거의 비슷하다. '황건적의 난'이 발발할 때 손견은 이미 30살이었다. 이는 남자로서 생명력이 가장 왕성한 연령이다. 특히 한나라때는 그러했다. '황건적의 난'에서 손견이 피살될 때까지의 기간은 겨우 7년이다. 다만 이 짧은 7년동안, 나중의 손씨강산에 개창적인,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을 한다.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기 전에 손견은 단지 고향 부춘의 현리(縣吏)에 불과했다. 소년의 용맹함에 의존하여, 그는 먼저 가위(假尉)로 발탁되고, 그 후에 회계 허생에 대한 정벌을 통하여 다른 곳의 현승(縣丞)으로 발탁된다.

다른 곳이라 함은 <삼국지>에서 말하는 "염독(鹽瀆), 우이(盱眙)와 하비(下邳)"이다. 이 세 곳의 지명은 그냥 쉽게 보아넘겨서는 안된다. 그들은 오늘날 강소북부 회하유역 부근이다. 손견은 이 곳에서 7년간 지낸다. 나중에 손씨의 굴기에 이 시간과 공간은 무시할 수 없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손견의 혼인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그것도 손씨의 굴기에서 마찬가지로 관건적인 작용을 한다.

한나라말기에 태어나서, 군웅이 들고 일어날 때, 손견은 혁혁한 집안 배경도 없고, 개인도 거효렴과 같은 정상적인 기회는 얻지 못했다. 만일 '황건적의 난'이 아니면, 손견의 일생은 아마도 무슨 큰 일을 해내지못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이 점에서 그가 소북에서 지낸 7년동안은 거의 기록할 만한 일이 없었다.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면서 이 출신이 비교적 편벽된 나이든 청년은 중원을 축록할 기회를 갖게 되고 그에게 절호의 역사무대가 주어진다.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면서 조정은 황보숭, 주준등을 임명하여 병력을 이끌고 토벌하도록 한다. 주준은 즉시 손견을 좌군사마로 추천한다. 이는 손견의 일생에서 핵심적인 발탁이다. '황건군'과의 전투과정에서, 손견은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황건적과의 전투에서 손견은 죽어라 싸웠다. '황건적'이 평정될 때 손견이 신분은 이미 별부사마가 된다. 이것은 손견이 자신의 독립적인 번호와 인마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인마는 바로 나중에 손책이 원술의 손에서 빼앗아온 그 주체 유산이다.

 

나중에 변장, 한수의 난(황중의종반란)은 손견에게 종심으로 발전할 기회를 부여한다. 이는 손견의 군사재능과 견식을 충분히 드러내게 해준다. 얼마 후, 그는 조정의랑으로 임명된다. 이것은 손견이 이미 중앙정부에 진출하여 고위층의 정치적 신분을 취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후 계속 소동이 끊이지 않던 장사로 파견되어 장사태수가 된다. 그리고 군공으로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진다. 

손견의 일생과 신분은 한걸음 한걸음 빛이 나고 풍만해진다.

한영제가 죽은 후, 군웅이 동탁을 토벌한다. 손견은 다시 일마당선(一馬當先)의 자세로 특이한 빛을 발산한다. 그러나, 1,2년동안 한 자루의 차가운 화살은 계속 앞으로 나가던 인생을 37살로 멈추게 만든다.

표면적으로 보면, 손견은 황조의 병볼이 쏜 화살에 죽었다. 그리고 아들 손책에게 무슨 실제적인 유산을 남겨주지도 못했다. 손책은 자신의 손과 발로 종횡하면서, 영토를 개척하여 손씨강동의 기반을 이룬 것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손책의 창업과 손견의 분투 사이에는 긴밀한 전승관계가 있다.

그중 관건중의 관건이라면 우리가 앞에서 말한 강회이다.

"손견은 주준이 표를 올려 좌군이 된다. 가족은 수춘에 남아 있다"(<삼국지.손파로토역전제일>의 배송지주인<강표전>)

이 한 마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말이 손씨굴기의 요점을 보여준다. 수춘(壽春)은 자고이래로 회하유역의 요지이다. 손견은 가족을 수춘에 남겼다. 이는 그의 소북회하유역의 생활과 혼인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주준이 당시에 토벌하라고 임명한 것은 먼저 하남의 '황건'이라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바로 이런 단서때문에, 나중에 고향이 원래 절강 오군인 손책이 강회지구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삼국지>에 기록된 손책의 발전과정에서, 우리는 수시로 이 강회배경과 손견의 그림자의 존재를 엿볼 수 있다. 

손견의 '황건적의 난'이후의 분투는 직접적으로 향후 손씨 동오의 근원이 된다. 진수는 <삼국지> 그리고 배송지의 주인 <손성>에서의 말을 통해서 손책이야말로 강동에 기업을 개창한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단견이라고 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황건적의 난'이후의 5년이 조조에게 가지는 의미는 손견처럼 관건적이거나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이 점은 그들 둘의 집안배경과 관련이 있다.

조조는 손견과 같은 해에 출생한 사람이다. 다만 조조의 집안배경은 부춘의 손견이 바라볼 수 없을 정도이다. 조조의 부친 조숭은 일찌기 태위를 역임했다. 비록 돈을 주고 산 것이지만, 관직을 샀다는 것이 직접적으로 조숭이 전혀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조숭의 부친 조등은 한안제때부터 궁중에서 지위와 명망을 지닌 환관두령이다. 심지어 종숭같은 명신능리도 가슴에서 우러나는 찬탄을 했을 정도이다. 비록 환관의 집안이어서, 일반적인 사족가정과는 구별되지만 역시 명문대족에 속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점에서 조조는 어려서부터 일종의 남다른 일처리와 성격을 드러낸다. 더욱 주요한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순조롭게 관료생활을 지삭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의 개국인물 조조, 유비와 손견 중에서, 조조는 유일하게 정상적인 길을 걸었다. 즉 거효렴을 통해서 관직에 나아갔다. 효렴으로 랑(郞)이 되었는데, 손견이 힘든 과정을 거쳐서 의랑(議郞)이 된 것을 그는 그냥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후 수도 낙양의 북부위가 되고, 그 후에 둔구령이 되는데 명백하게 시작점도 높았고, 오르는 것도 빨랐다.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조조는 기도위에 임명되고, 황보숭을 도와서 전공을 세운 후에 제남상(濟南相)에 임명된다.

 

변장,한수의 반란이후 한영제가 서원팔교위를 만들 때 조조는 그 중의 전군교위가 된다.

조조와 손견은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이지만, 그들 둘의 초기 인생은 차이가 났다. 이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한 사람은 전쟁터에서 피를 뒤집어 쓰면서 싸워서 올라갔고, 한 사람은 순조롭게 올라간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일찌기 한영제가 붕어하기 전의 세월에서, 조조의 그림자는 시종 중상층에서 움직였고, 그는 관직을 버리고 '취임하지 않는'등의 시원시원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우리는 볼 수 있다. 심지어 '황건적의 난'이 가장 극심했을 때도 조조는 '사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성밖에 집을 짓고, 봄여름은 책을 읽고, 가을 겨울에는 사냥을 하면서 스스로 즐겼다.'. 이렇게 여유있을 수 있는 것은 손견이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자면, '황건적의 난'이후의 5년동안 조조는 손견처럼 남들이 탄복할만한 성취를 이루지 못한다. 진정 조조에게 속한 시간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조조가 '황건적의 난'과 관계가 손견보다 훨씬 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황건적의 난'은 조조에 있어서 아주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단지 어떤 의미에서, 시간적으로 말하면, 조조의 시대는 한영제가 죽은 후에 진정으로 시작되고 드러난다는 것이다. 청주의 '황건' 삼십만을 거두어 무리가 백만에 이른 외에, 조조는 '황건'과 종교적인 관련성이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집안을 따지자면, 유비는 세 사람중 가장 높다. 그는 한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후대이다. 그러나 이런 소위 황실혈맥은 유비가 어렸을 때 이미 완전히 무너져내린 모습을 보인다. 만일 '황건적의 난'이 아니라면, 이 소위 집안배경은 유비의 인생전망에서 손견과 마찬가지로, 별로 기댈 것이 없었고, 더더구나 황위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황건적의 난이 유비에게 준 의미는 원래 손견보다는 조조와 더욱 비슷하다. 다만 '황건적의 난'이후의 5년간의 실제상황을 보면, 유비의 수확은 손견만 훨씬 못하고, 오히려 조조에 더욱 비슷하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아마도 유비와 조조는 더욱 정치형 인물에 가까워졌다. 이것은 그들이 군사재능을 갖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조는 저명한 군사가이다. 손견은 더욱 순수한 본색의 군사장군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군사적으로 더욱 쉽게 '일전공성'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더욱 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이는 장거리달리기로 볼 수 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하자면, <삼국지>의 정문에 진수는 유비가 '황건'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배송지이 주인 <전략>에는 유비가 '장순'을 토벌하는데 참여했다고 한다. 즉 어양의 '이장'을 토벌했다는 것이다. '황건적의 난 이후의 오년'동안 유비의 유일하게 기술된 구체적인 업적은 바로 독우를 때린 것뿐이고 다른 것은 없다. 

 

황건적의난이 유비에게 가져다준 직접적인 수확은 얼마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는 그의 나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유비는 조조와 손견보다 6살이 어리다. 6살은 그다지 큰 나이차이는 아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시대환경을 놓고 보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황건적의 난'이 발발했을 때, 유비는 겨우 이십여세의 시골청년에 불과했었다는 것이다. 세 사람 중에서, 유비가 의지할 수 있는 사회자원 및 그 축적과정을 보면, 가장 모자랐고 가장 힘들었다. 비록 유비가 조조에게 영웅취급을 받았지만, '아무리 뛰어난 며느리도 쌀이 없으면 밥을 지을 수 없다' 영웅에게 힘을 쓸 곳이 없었다. 적벽지전에 이르기까지 유비는 그저 사방을 떠돌면서 이곳저곳에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5년동안이 행위를 보면, 손견이 가장 착실했고, 조조가 가장 여유있었으며, 유비가 가장 궁박했다.

 

어떤 각도에서 보자면, 조조, 유비, 손견의 세 집안은 모두 승리자이다. 원씨형제, 공손찬, 도겸, 유표, 유언부자, 장로, 그리고 여포등등은 모두 순식간에 지나간 유성이고, 마지막에 피안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렇게 '순식간에 빛난' 인물들 중에 한 사람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를 피하고는 한왕조의 붕괴를 논할 수가 없다. 마치 오래되고 낡아서 수선을 하지 않은 집이 신속히 무너진 것처럼.

그는 바로 동탁이다.

만일 '황건적의 난'에서 한영제의 붕어까지의 5년도안 누구를 가장 평가해야할지를 꼽는다면 바로 동탁이다.

동탁이 굴기한 인생은 손견과 많이 닮았다. 모두 변방지구나 하층사회에서 올라왔다. 둘 다 무력에 의지하였다. 한 사람은 동남에서, 한 사람은 서북에서. 모두 전란중에 두각을 드러낸 다크호스들이다. 두 사람은 모두 파로장군을 지냈다. 다만 동탁의 상승기세는 손견보다 더욱 빨랐다. 이는 당시 서북의 관농이 지닌 지리적 위치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동탁의 배후에 있는 강족의 역량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동탁이 처음에 하북의 '황건적' 진압에 참여할 때, 승리하지 못했고, '패배하여 죄를 받았다'. 다만 이것이 동탁에게 큰 영향을 미치진 않앗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중에 북궁백옥, 변장의 반란때 조정이 즉시 동탁을 중랑장에 임명하여 황보숭의 부장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황보숭이 면직된 후, 조정은 장온을 거기장군으로 파견하여 게속하여 변장등을 토벌한다. 동시에 동탁을 파로장군에 임명하여, 장온을 보좌하게 한다. 바로 변장, 한수와의 교전과정에서, 동탁을 한번의 관건적인 승리를 거둔다. 그후에 선령강과의 교전에서 계책을 써서 전군을 후퇴시켰다. 한영제가 붕어하기 두 달 전에, 동탁은 황보숭과 손을 잡고 변장, 한수, 왕국의 소란을 대파한다. 바로 이 몇차례의 전공, 전투를 가지고, 동탁은 한영제가 죽기 전에, 한걸음 한걸음 자신의 군사실력과 명망을 건립한다. 한영제가 임종하기 전날, 일찌기 두 개의 조서를 연이어 내려서, 동탁에게 병권을 황보숭에게 넘기고, 입경하여 직위를 받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동탁은 이미 형세를 잘 보고 있었고 두번이나 항명하고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부대를 낙양을 멀리 바라볼 수 있는 하동에 주둔시키고 호시탐탐 노린다. 그는 대장군 하진이 황궁의 깊은 곳에서 그 건곤을 뒤집을 진경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