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살사(薩沙)
허유는 삼국시대 중전기의 핵심인물이다. 관고지전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그는 재능이 있으나 탐욕이 많았던 소인이다. 최종적으로 자신의 독특한 성격으로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는 원래 원수 휘하의 참모였다. 그리고 원소를 위하여 적지 않은 기책묘계를 올린 바 있다. 관도지전의 가장 긴장돤 대치순간에, 허유는 가족의 범법으로 체포되고 원소에게 원한을 품는다. 그리하여 밤을 틈타 조조에로 가서 투항한다. 그리고 오소의 군량과 원소군대의 구령(口令)등 핵심정보를 넘겨준다. 이렇게 하여 조조가 오소를 기습하는데 성공하고 원소를 격패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러나, 주인을 배신하고 영화를 누린 허유에게 좋은 시기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조조가 기주를 평정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허유는 자신의 공이 크다고 광망하게 굴다가 누군가의 고발로 결국 처형당하고 만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조조의 강을 건너자 다리를 철거한 것 혹은 곡식을 다 갈고 나자 나귀를 죽인 것이라고 말한다. 조조에게는 사람을 받아들일 도량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몇 마디 광망한 말을 했다는 것을 가지고 목숨을 거두다니, 그가 세운 이전의 공로는 전혀 생각해주지도 않는 것인가? 기실, 조조가 정말 속이 좁아서 허유를 죽인 것일까? 조조는 일대의 위인이다. 흉금이나 도량이 넓기로는 삼국시대에 첫손 꼽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도 중국을 통일하는 위업은 달성하지 못했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장수와 같이 먼저 투항했다가 다시 배신하고, 조씨집안과 혈채(血債)가 있는 인물까지도 조조는 전혀 예전의 일을 묻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허유가 몇 마디 광망한 말을 내뱉었다고 조조가 용납하지 못했을까? 기실 허유의 죽음은 정치상의 요소를 고려한 것도 있고, 허유 자신의 원인도 있다. 단지 그가 공을 세운 것을 믿고 오만하게 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료 기재에 따르면, 허유의 자는 자원(子遠)이고, 어렸을 때 동한의 관직을 맡는다. 원소, 조조등과도 교분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정치활동에 차여한다. 동탁의 난이 끝난 후, 허유는 원소를 따라 기주로 가서 그의 모사가 된다. 원소와 공손찬이 전투를 벌이던 기간동안 원소에게 조조와 동맹을 맺도록 권하여, 앞뒤로 적을 맞이해야하는 상황을 피하게 해주었다; 나중에 원소와 조조의 양군이 관도에서 대치할 때, 다시 경기병으로 허창을 기습하여 조조의 퇴로를 차단하라는 건의도 한다. 이런 석만 보더라도 허유라는 사람은 상당한 재능이 있다. 그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았고, 형세판단이 정확했다. 그리고 모략의 수준도 상당했다. 그러나, 허유의 재능은 여기에 그친다. 그는 정치적인 안목이나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이 없엇다. 그가 한 모든 일은 자신의 이익에서 출발했고, 인품도 별로였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만, 기실 한영제 중평원년, 즉 184년, 허유는 동탁의 "환황제(換皇帝)"와 유사한 일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는 기주자사(冀州刺史) 왕분(王芬), 패국공(沛國公) 주정(周旌)등과 함께 한영제를 폐위시키고, 합비후(合肥侯)를 황제에 옹립하려 했다. 그리고 조조에게도 참여를 권했다(조조는 동의하지 않았다). 일이 발갇된 후, 왕분등은 자살하고, 허유는 모반의 죄명을 뒤집어 쓰고 강호로 숨어들어 조정의 추적을 피한다. 나중에 한영제가 죽고, 하진이 소제를 세워서 섭정을 하고, 십상시의 난이 일어나고 동탁이 입경하여....동한조정은 무슨 연극무대처럼 한 편이 끝나면 또 한 편이 이어지곤 했으며 각 세력이 권력과 이익을 다툰다. 이런 시기에 어찌 허유같은 망명객에게 신경을 쓰겠는가? 허유는 이를 기회삼아 자신의 '조정흠범(朝廷欽犯)'의 모자를 벗겨내고, 원소의 휘하로 들어가 모사가 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는 평생 그 모자를 쓰고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기실 원소의 휘하에, 허유는 비교적 중용받았다. 지위는 저수, 전풍, 봉기등과 비슷했다. 즉 최고의사결정층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오소의 양식보관 장소와 수비상황을 허유는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원소집단의 최고군사기밀인 것이다. 이는 그가 확실히 집단내부의 최고핵심사무에 참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허유는 원소에게서 봉급을 받는 동시에, 가족을 종용하여 원소의 영지에서 법을 어긴다. 재물을 착복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채운 것이다. 가족의 불법행위가 철면무사의 심배(審配)에 의하여 밝혀지고 가족이 체포된 후에 허유는 마음 속으로 원한을 품는다. 동료가 자신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고 여긴 것이다. 게다가 그가 올린 게책도 원소가 채택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허유는 자신이 이미 원소에게 총애를 잃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는 원수군대에서 알고 있는 정보를 가지고 급히 조조에 투항한다. 조조의 휘하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려 한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허유가 한 모든 행위는 투기(投機)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확실히 제대로 사람을 찾았다. 허유가 오자 조조는 신발을 거꾸로 신고 맞이해준다. 그가 가져온 정보는 조조가 관도대치에서 불리한 지위에 놓여 있던 것을 일거에 뒤집어 버린다. 오소의 군량을 불태운 후, 원래 군사력과 물자조달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던 원소대군은 신속히 궤멸된다. 황급히 기주로 도망친다. 이때 허유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가장 총명한 방법은 조조의 휘하에서 성실하게 일하면서 그를 위하여 계책을 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이 지닌 북방에서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조조가 북방4주를 복속시키는 일을 도왔어야 했다. 동시에 허유는 반드시 겸허한 태도와 원만한 일처리를 했어야 했다. 어쨌든 하북인사들이 보기에, 그에게는 '반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록 면전에서 주인을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욕하지는 못하지만, 뒤에서는 분명히 그를 심하게 욕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허유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공로가 높은 것을 믿고 자만했다. 조조가 원소를 격패시키고 기주를 차지한 것은 모두 그 한 사람의 공로라고 생각했다. 그의 안중에 '겸허'라는 두 글자는 없다. 오히려 갈수록 광망하고 오만해졌다. 주공 조조에 대하여도 허유는 자신의 태도를 점혀 감추려 하지 않았다. 자주 공적인 자리에서 그의 아명을 불렀다. 조조는 이에 대하여 불쾌하다고 여기기는 했지만, 그를 제거해야할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 허유는 그저 광망한 말을 하는 유생 정도로 여긴 것이고, 이전의 공로를 생각해서 따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허유는 계속하여 가족의 범법행위를 종용하고, 자신의 가족이 재물을 챙기는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가족세력의 범위내에서 지방권력을 차지하고, 심지어 병력까지도 거느렸다. 이점은 조조가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렇다. 조조는 이미 허유에 살심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현신을 죽였다"라든지, "공신을 죽였다"는 악명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일은 조조로서도 처리하기 곤란했다. 조조는 계속하여 기회와 이유를 기다렸다. 마침내 누군가 허유를 고발한 것이다. 이는 조조에게 구실을 준 것이다. 전혀 미련을 두지 않고 허유를 죽여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투기로 일어선 허유는 결국 자신의 투기적인 행동으로 죽었다. 기실 투기라는 두 글자는 나쁜 뜻만은 아니다. 삼국시대에 약간이라도 유명한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투기를 해봤다고 할 수 있다. 관건은 투기도 형세에 대한 판단과 장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끝장이다. 그런데 허유는 바로 이 점을 잘 몰랐었다. 관도지전에서 대치할 때, 허유의 이용가치는 엄청나게 컸다. 그러나 관도지전이 끝난 후, 그의 가치는 분명히 낮아졌다. 이때 허유는 자신은 너무 높이 평가했고, 자신과 조조의 옛날 친분을 너무 높이 평가했고, 자신의 조조휘하에서의 역할을 너무 높이 평가했고, 자신의 이전의 공적을 너무 높이 평가했다. 정치가에 있어서, 네가 이전에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네가 나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가치를 창조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단, 네가 조성한 위험이 네가 창조할 가치보다 높다면, 그렇다면 당연히 너를 제거해야 한다. 아쉽게도 죽음이 임박한 허유는 이런 이해관계를 파악하지 못했고, 그는 당초 그가 그렇게 큰 공로를 세우고, 조조가 그렇게 그를 환영했고, 심지어 역사에 "도리상영(倒履相迎, 신발을 거꾸로 신고 맞이하다)"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지만, 최후의 결말은 이렇게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관도지전 이전에 순욱은 원소 휘하의 여러 모사를 평가한 적이 있다. 그중 허유에게는 이런 평가를 내렸다: "탐이부지(貪而不知)" 대체적인 의미는 허유가 이익을 탐하면서 비록 일정한 재능이 있지만, 일처리가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발생한 일들을 보면, 이 네 글자는 그를 아주 잘 형용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허유는 정말 공을 탐하고, 명성을 탐하고, 재물을 탐했으며, 약간의 재능을 가지고 잇으면서 일처리에서는 분촌(分寸)을 몰랐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허유는 투기에 열중했지만, 성공한 투기자는 아니었다. 이런 사람에게는 신수이처(身首異處)가 필연적인 결과이다. 문제는 시기가 빠르냐 늦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참고: <삼국연의>에서는 허유가 조조의 수석호위 허저와 충돌하여 허저가 분노하여 죽였다고 되어 있다. 당연히 이는 소설의 스토리이다. <삼국지>에서는 그저 누군가 허유의 행위를 고발했다고만 하고, 누군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책에서 허유가 말한: "우리는 천번 만번 생사를 넘나들며, 피를 뒤집어쓰는 전투를 거쳐서, 성을 빼앗았다. 네가 어찌 감히 자랑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은 조조군중의 상하(조조본인 포함)의 허유라는 '공을 내세워 오만한 자'에 대하여 얼마나 참아왔는지, 그리고 그 인내는 이미 극한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삼국연의에서 조조는 허유가 피살된 것을 들은 후에도 허저를 처벌하지 않고, 그저 구두로 "심히 질책"하는 것으로 끝낸다. 이는 완전히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아는 태도이다. 그후에 조조는 공후의 예로 허유를 후장하고, 허유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옛정을 얘기한다. 이를 통하여 관도지전에서 그가 세운 공로를 잊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했다...당연히 조조의 목적은 이 기회를 빌어 천하인의 앞에서 한번 쇼를 한 것이다. 자신이 현명한 인재를 잃은 것에 대한 유감을 표시하여, 인심을 회유하려 한 것이다. 이는 그저 정치적인 성격의 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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