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삼국연의127

역사의 3대 거짓말 글: 심도지국(深度知局)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 역사는 바로 중국의 종교라고. 인류역사상, 그 어느 국가나 민족도 중국처럼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가진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가장 중시하지만, 또한 역사에 의해 가장 심하게 눈이 가려져 있다.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는 역사는 사람을 오리무중에 빠지게 만들고, 진상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일부 인구에 회자되는 역사격언은 더더구나 미혹성이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잘못된 가치관념을 갖게 만든다. 그러므로, 역사의 3대 거짓말을 분명히 아는 것의 의미가 날이갈수록 커지고 있다. 거짓말 하나: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 고대제왕이 천하를 얻을 때 항상 위로는 천명을 받고, 아래로는 인심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 2024. 1. 30.
진실한 조조(曹操)를 찾아서... 글: 이자제(李子霽) 는 명나라때 세상에 나타난 이래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다. 그 안에는 지혜, 용맹, 충의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와 풍류인물에 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설전군유(舌戰群儒)"에서 "칠금맹획(七擒孟獲)", "화소적벽(火燒赤壁)"에서 "화소연영(火燒連營)"까지, "도원삼결의(桃園三結義)"에서 "주마천제갈(走馬薦諸葛)"까지, "맹덕헌보도(孟德獻寶刀)"에서 "자주논영웅(煮酒論英雄)"까지. 하나하나의 장면들은 1994년 TV드라마 가 방영된 이래, 다시 한번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졌고, 중국인들에게 다시 "삼국"에 대한 미련(迷戀)을 환기시켰다. 이는 전체 중국문화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가 오늘날 함께 "삼국"을 이야기할 수 있고.. 2023. 6. 20.
유비치촉계시록(劉備治蜀啓示錄) 글: 현야(玄野) 유비(劉備)의 촉한(蜀漢)은 삼국난세에서 마지막으로 정족(鼎足)을 이룬 일족(一足)이다. 북으로 한중(漢中)을 취하고, 여러번 북벌(北伐)하였으며, 중국역대정통사회에서는 도통(道統)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실로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유비가 한나라 황실종친이라는 것이 핵심이라고 여기겠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그의 신분은 비교적 덜 중요한 원인이고, 진정한 원인은 마땅히 유비가 인재를 아끼고, 인재를 보살피고, 인재를 잘 기용했다는데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당연히 조조(曹操)와 손권(孫權)도 마찬가지이다. 그럴 능력이 없었던 원술(袁術), 여포(呂布)같은 자들은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그 방면의 능력이 약간 부족했던 원소(袁紹)도 결국 신속히 패망하는 최후를 피할.. 2023. 3. 22.
명나라말기의 농민군은 "삼국연의(三國演義), 수호전(水滸傳)"을 병법서로 활용했다. 글: 역사D학당(歷史D學堂) 명나라말기에 중국의 대지는 풍운변환(風雲變幻)하여 전쟁이 지속되었다. 정규교육을 받은 관료들과는 달리, 농민반란군의 지도자들은 반란군을 지휘하여 싸울 때, 그들의 머리맡에 놓아두고 참고한 병법서는 대체로 , 등의 소설이었다. 청나라사람들은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장헌충(張獻忠), 이자성(李自成)등의 무리는 "처음에는 모두 오합지졸이었고, 기율이 없었다" 그라나 나중에 성을 점령하고 지역을 차지하면서 점차 세력이 커진다. 그들이 '점점 지혜를 갖게 된' 원인은 바로 "듣기로 모두 의 전투사례는 그들이 전투할 때 유일하게 참고하는 비본(秘本)이었다." 을 쉽게 풀어쓴 것으로서, 과 는 실용성과 재미를 모두 갖추고 있다. 그래서 농민군들은 이 소설을 보배처럼 여긴 것이다. 멀리 .. 2023. 3. 12.
장로(張魯): "조조의 종이 될지언정, 유비의 귀빈은 되지 않겠다!" 글: 소한신시야(笑寒新視野) 삼국의 이야기와 인물은 중국에서 삼척동자도 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진실한 삼국시대는 겨우 몇십년에 불과했지만, 그 영향은 아주 컸다. 식사자리에서의 얘기거리가 될 뿐아니라, 그 속의 선악을 통해 민간문화의 형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보급교육을 했다. 민간문화이므로,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지게 되고, 인물의 성격을 선명하게 그리게 된다. 그러다보니 검보화(臉譜化)하게 된다. 어쨌든 복잡한 인물로 그리면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유비,조조처럼 한명은 충신, 한명은 간신, 한명은 좋은 사람, 한명은 나쁜 사람. 이렇게 해야 사람들이 기억하기 쉽다. 삼국의 이야기는 송나라때부터 시작하여 선악의 구분이 생기게 된다. 유비는 점점 정통으로 되고 좋은 사람으로 그려지는데 반하여 조조.. 2022. 8. 6.
촉한(蜀漢) 오호상장(五虎上將)의 부인은...? 글: 천애간점역사호(天涯看點歷史號) 에 이런 문구가 있다: "자룡일신도시담(子龍一身都是膽), 갱유인심병의간(更有仁心幷義肝)" 조운의 자는 자룡이고, 오호상장중 하나이다. 유비에 대하여 충성심을 가졌고, 유비가 조조의 오천 호표기(虎豹騎)에 쫓기느라 처자식을 돌볼 겨를이 없어, 처자식을 전진에 놔두고 혼자서 도망쳤다. 유비는 자신의 처자식을 버린 것이다. 그러나, 조운은 부하로서의 직책을 잊지 않고 장판파에서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유비가 버리고간 미부인(糜夫人)과 유선(劉禪)을 찾아다녔다. 조운은 이처럼 협의로운 인물이다. 여자들은 모두 그에게 시집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에 그의 처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렇다면 조운의 처는 도대체 누구일까? 오호상장은 모두 결혼을 했고, 부인이 있다. 비록 에는 .. 2021. 7. 13.
마초(馬超): 유비에게 온 이후 활약하지 못한 이유는...?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은창종횡지(銀槍縱橫志), 북망진루천(北望盡淚泉) 광위안(廣元)에서 수십년간 살다보니, 이곳의 산수는 아주 친근하게 여겨진다. 광위안은 관광자원도 풍부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삼국문화이다. 광위안은 양평관(陽平關)과 검문관(劍門關)의 사이에 위치한다. 그 가운데 있는 소화고성(昭化古城)은 삼국시대때 가맹관(葭萌關)이라 불렸다. 이곳은 나관중이 에서 멋진 장면을 쓴 곳이기도 하다. 즉 장비가 마초와 싸운 곳이다. 그래서 광위안의 사람들은 마초에 대하여 얘기하기를 즐긴다. 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인물이다. 비록 이 장면은 나관중이 창작한 것이지만. 의 정수는 전반부이다. 마초도 그 정수중의 하나이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인상은 돌연 나타나서는, 일단 유비에게 의탁한 이후 전혀 활.. 2021. 2. 15.
유비, 관우, 장비는 어떻게 생겼을까? 글: 문재봉(文裁縫) 를 보면,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용모는 모두 선명한 특색이 있다. 너무나 선명하여 수천수만명 속에 있어도 바로 찾아낼 수 있고, 한번 보면 잊지 않을만한 그런 용모이다. 먼저 유비를 보자. "키는 칠척오촌,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뜨려지고, 두 팔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간다. 눈으로 자신의 귀를 돌아볼 수 있고, 얼굴은 관옥(冠玉)같고, 입술은 분을 바른 것같다." 다음으로 관우를 보자: "키는 구척, 수염은 2척이다; 얼굴은 대추같고, 입술은 분을 바른 것같다; 단봉안(丹鳳眼), 와잠미(臥蠶眉)이다. 용모는 당당하며 위풍이 늠름하다." 장비는 또 어떨까?: 키는 팔척, 표두환안(豹頭環眼, 표범같은 머리에 동그란 눈), 연액호수(燕頷虎鬚, 큰 턱과 호랑이수염), 목소리는 큰 우.. 2020. 11. 20.
촉(蜀)이 멸망한 후 관우의 후손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장비의 후손은 살아남았던 이유는...? 글: 원재예(袁載譽) 에서 주유(周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유비는 효웅의 모습이고, 관우, 장비와 같은 곰,호랑이같은 장수를 가지고 있어, 절대로 오랫동안 남의 밑에 있지 않을 것이다." 관우와 장비는 유비의 결의형제이다. 형님인 유비를 도와 강산을 취할 때, 관우는 적인 오나라군에 의해 살해당한다. 유비가 죽은 후, 관우의 처와 자식은 모조리 원수의 아들인 방회(龐會)에게 살해당하고, 멸문당한다. 그러나 장비는 건안24년에 죽었고, 둘째형인 관우가 죽은후 그리 오래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그의 후손은 관우처럼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같은 지위, 같은 처지인데 왜 그의 가족들은 무사할 수 있었을까? 관우는 용맹하고 싸움을 잘했던 인물이다. 큰형 유비도 그를 중용했다. 촉의 대업을 위.. 2020. 6. 17.
유비(劉備)가 건립한 정권은 분명 "한(漢)"인데, 왜 "촉(蜀)"이라 부르는 것일까? 글: 장생전(張生全) 유비가 황제를 칭할 때, 국호로 선정한 것은 "한(漢)"이었다. 다만 후세에 이르러 우리는 기본적으로 유비가 건립한 이 국가를 '촉(蜀)'이라 부르거나, '촉국(蜀國)'이라 부른다. 기껏해야 '촉한(蜀漢)'으로 불러준다. 결국 유비가 당초 건국할 떄 정한 국호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때문일까? 만일, 이렇게 부른다면 목적은 한왕조의 '한'과 구분하기 위해서일 것인데, 그것도 아닌 것같다. 역사상 건국때 '한'으로 지은 왕조는 아주 많다. 그러나 후인들은 그들이 취한 국명과 한왕조의 '한'이 중복된다고 여겨서 '한'이라는 국명을 빼버리지는 않았다. 양한(兩漢, 서한과 동한)의 사이에 유현(劉玄)이 건립한 '한'이 있는데, 구분을 위하여 우리는 "현한(玄漢)"이라 부른다... 2020. 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