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유비)

유비치촉계시록(劉備治蜀啓示錄)

중은우시 2023. 3. 22. 12:31

글: 현야(玄野)

 

유비(劉備)의 촉한(蜀漢)은 삼국난세에서 마지막으로 정족(鼎足)을 이룬 일족(一足)이다. 북으로 한중(漢中)을 취하고, 여러번 북벌(北伐)하였으며, 중국역대정통사회에서는 도통(道統)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실로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유비가 한나라 황실종친이라는 것이 핵심이라고 여기겠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그의 신분은 비교적 덜 중요한 원인이고, 진정한 원인은 마땅히 유비가 인재를 아끼고, 인재를 보살피고, 인재를 잘 기용했다는데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당연히 조조(曹操)와 손권(孫權)도 마찬가지이다. 그럴 능력이 없었던 원술(袁術), 여포(呂布)같은 자들은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그 방면의 능력이 약간 부족했던 원소(袁紹)도 결국 신속히 패망하는 최후를 피할 수 없었다. 조조, 손권과 비교하면, 유비가 촉을 다스리는데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면, "임관이현(任官以賢), 불문친소(不問親疏)"(관직에 임명하는데 현명함을 기준으로 하였고, 자신과 가까운지 아닌지를 가리지 않았다), "봉작이공(封爵以功), 불순사정(不徇私情)"(작위를 봉하는데 있어서 공로를 기준으로 하였고, 사적인 정에 구애받지 않았다)이라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유비가 가장 의지했던 몇몇 문무대신에 대한 대우를 분석해보기로 하자.

 

법정(法正)

 

유비가 촉한의 기업을 닦는데 보좌의 공이 가장 큰 사람을 꼽는다면 마땅히 제갈량(諸葛亮)일 것이다. 두번째로 공이 많은 사람은 아마도 삼국연의를 많이 읽은 사람들에게는 예상외이겠지만, 법정이다. 법정은 전략적으로 시국을 통찰하고, 전술적으로도 방안이 엄밀했다. 한중전투의 주요 의사결정자와 전투지휘자는 바로 법정이었다. 양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조조는 촉한군대의 진형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소리친다: 현덕(玄德, 유비)이 고인의 가르침을 받았구나. 그가 이전에는 이렇게 병사를 이끌지 못했었다. 한중전투에서 유비는 대승을 거둔다. 장비(張飛)의 와관구(瓦關口), 황충(黃忠)의 정군산(定軍山), 심지어 조운(趙雲)의 공성계(空城計)까지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법정의 전략은 가장 핵심역할을 했다. 불행한 것은 법정이 젊은 나이로 죽었다는 것이다. 유비는 이를 애통해 마지 않았고, 시호를 익후(益侯)로 내린다. 그는 유비가 살아있을 때 유일하게 시호를 받았던 인물이다. 유비가 죽기 전에 사망한 관우(關羽), 장비조차도 유비는 시호를 내리지 않았다. 이 일을 가지고 유비가 두 결의동생을 멀리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장비가 뛰어들어가 둘째형의 복수를 할 것인지 물어보았을 때, 유비가 결연하게 손권과 죽기살기로 싸우려 결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현명한 인사를 기용하여 적절한 직위를 주는데 있어서 개인감정과 국가봉작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작위와 관직은 국가정체(政體)의 일부분이다. 황제 개인의 감정으로 다루어야할 것이 아니다. 다만 어쨌든 사람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의사결정에서는 감정화되었다. 성야관장(成也關張), 패야관장(敗也關張)이라 할 수 있다.

 

황충(黃忠)

 

황충이 유비에게 온 것은 적벽대전이후이다. 그때 그는 이미 나이가 많았다. 가맹관(葭萌關)에서 회군했을 때부터 직접 병사를 이끌고, 남들보다 용감하게 나서서, 서천(西川)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나중에 한중전투에서 조조가 아끼는 장수인 하후연(夏侯淵)을 칼로 베어, 한중을 탈취하는데 꿈같은 초반을 만들어낸다. 그후 유비는 황충을 관우, 장비, 마초(馬超)와 같은 급의 대장으로 삼는다. 제갈량이 이렇게 이견을 제기한다: 비록 장비, 마초는 노장군의 영웅개세를 목격했지만, 멀리 형주(荊州)에 떨어져 있는 관우는 스스로 청고하다고 여기니 반드시 기분나빠할 것이다. 그러자 유비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풀 것이다!" 여전히 황충을 관우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작위인 관내후(關內侯)를 내린다. 관직과 작위를 나누어주는 방면에서, 유비는 자신의 내심의 감정요소를 제거했을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이미 받아들인 감정방면의 묵인된 치우침까지도 스스로 시정했다. 사람들의 명망을 얻었다는 이유로 개인감정을 내세워 국가행정을 왜곡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위연(魏延)

 

만일 유비가 황충을 중용하고 발탁한 것은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친 것이라고 한다면, 위연의 임명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위연과 황충은 같은 시기에 유비에게 거두어졌다. 서로 다른 점이라면 황충은 유표(劉表)의 아래에서 이미 일군(一郡)을 맡는 장수였지만, 위연은 당시에 단지 사인부곡(私人部曲)이었다. 촉을 차지하는 전투과정에서 용맹하기 그지없었으며, 전공을 무수히 세운다. 그래서 유비가 중용한 것이다. 한중전투에서 조조를 대패시킨 후, 군대내에서는 대장 한명을 골라서 한중을 지키게 해야 했다. 그래야 유비는 군정요원들을 이끌고 성도(成都)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장비는 지위가 가장 높고, 전공도 가장 두드러졌으며, 경험도 가장 풍부했다. 일시에 전군의 상하에서는 모두 장비가 맡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유비는 위연으로 하여금 한중을 지키도록 명했고, 전군이 깜짝 놀란다. 이 직위의 중요성은 형주를 지키는 관우에 바로 다음간다고 할 수 있다. 유비가 이렇게 위연을 기용한 것은 엄청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유비는 장비를 잘 알았다. 두 사람은 감정적으로 아주 가까웠고, 사리로도 장비는 유비의 말을 잘 따르기 때문에, 그에게 한중을 지키는 임무를 맡기지 않았지만, 장비는 전혀 유비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비는 장비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술에 취하여 일을 그르쳐서 서주(徐州)와 처를 여포에게 빼앗긴 적이 있다. 그후 단기로 당양교에서 조조의 오천 호표기(虎豹騎)를 막아내고, 엄안(嚴顔)을 붙잡고, 장합(張郃)을 대파한다. 용맹하게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능력을 뛰어나지만, 한 지방을 지키는데는 성격적인 결함이 있었다. 실제로 장비를 제외하고도 마초, 황충, 조운등의 경력이나 명망이 모두 위연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마초는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황충은 나이가 많아, 장기간 북쪽을 지키는데는 적절한 후보가 아니다. 조운은 당시 위연보다는 위라고 할 수 있지만, 유비는 완전히 개인적인 감정을 뛰어넘었고, 부하들에 대한 신뢰도도 뛰어넘었다. 단지 개인의 자질이 그 자리에 적합한지 여부만을 따져서 결정했다. 소위 "용인불의(用人不疑), 의인불용(疑人不用)"(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나는 사람은 쓰지 말라)이다. 조운은 원래 이상적인 후보이지만, 그의 전투전략에서는 위연보다 약간 부족했다.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시대에 조운은 더 잘나갔다. 위연은 너무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다가 결국은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 현명한 군주가 살아 있을 때 오호상장은 모두 실력을 드러냈고, 각로의 대장들은 자신의 실력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소위 성극이쇠(盛極而衰)이다. 촉한은 한중에서 대승을 거둔 후 1,2년내에 법정, 관우, 장비, 황충과 마초를 차례로 잃는다. 그후 위연이 이미 대장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 수완이나 사람을 대하는 방면에서는 국가의 대정방침의 의사결정권자가 되기에 부족하여, 난감한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 제갈량은 자신의 군사계획하에서 위연의 능력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유비와 같이 일체의 규칙을 타파하고 신의 손으로 위연에게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해주지 못했다. 제갈량은 삼국시기의 정치천재이다. 그러나 용인술에서는 유비와 큰 차이가 있다.

 

유비의 이런 집정사상은 촉한정권에서 철저히 관철된다. 그리하여 제갈량이 집권하던 시기와 포스트제갈량시기에 이런 집정사상은 아주 공고해진다. 그래서, 촉한정권의 여러 사람들은 비록 구주각지에서 왔지만, 한마음으로 힘을 합칠 수 있었다. 후세에 촉한을 도통으로 삼은 것은 절대로 성씨혈통으로 보아야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삼국연의 소설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의 형제간의 정을 아주 멋지게 그려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유비의 사람을 기용하는 방면에서의 절묘한 수법은 드러나지 않게 된다. 옛일을 보살펴 오늘날에 적용할 수 있다. 유비의 정치적 지혜를 깊이 이해하여, 현대에 본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