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해관 26

청나라군대는 5회나 명나라 경내로 진입하였는데 왜 북경을 함락시키지 못했을까?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명나라와 청(후금)간의 전쟁은 1618년(만력46년) 청태조 누르하치가 거병하여 무순, 청하 일대를 기습한 때로부터 계산하면, 섭정왕 도르곤이 팔기철기를 이끌고 산해관으로 진입하여 북경성을 성공적으로 점령할 때까지 전후로 26년의 시간동안 이어졌다. 이 26년..

이자성(李自成)과 청왕조(淸王朝) 누가 누구의 덕을 보았는가?

글: 군무차위면(軍武次位面) 1644년 봄, 이자성은 대순군을 이끌고 북경으로 진입하여, 명왕조가 멸망한다. 그러나 겨우 1개월여만에, 이자성은 산해관전투에서 청군에 격패당하여 황급히 북경에서 도망치게 된다. 북경성은 다시 청왕조의 천하로 바뀐다.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하여, 많은 ..

이자성(李自成)은 면전에서 들이받는 유종민(劉宗敏)을 왜 죽이지 않았을까?

글: 금일생활시각(今日生活視角) 유종민은 이자성 휘하여 최고용장이다. 용맹스럽고 싸움을 잘했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이자성을 따라다녔으며, 이자성이 북경을 취하고, 대명왕조를 무너뜨리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러나, 유종민은 자주 이자성의 명령을 듣지 않았고, 심지어 여러번..

이자성은 북경의 실패후 왜 남경으로 가지 않았는가?

글:천애간점(天涯看點) 1644년, 이자성은 산해관에서 패배한 후 북경에서 퇴각한다. 1년도 되지 않아, 이자성의 근거지인 섬서는 청군에 의해 남북에서 협공을 받는다. 이자성은 할 수 없이 대순군을 이끌고 대본영 서안에서 퇴각한다. 처음에 이자성의 생각은 하남을 거쳐 남경으로 가는 ..

완대성(阮大鋮): '통재(通才)'와 '간신(奸臣)'을 겸한 소인(小人)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추사여방초(秋思如芳草) 춘래일일생(春來日日生) 이것은 어렸을 때 외웠던 몇 개의 시중 하나이다. 당시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여겨져서 아주 좋아했었다. 그러나 이 시의 작자를 얘기하려면 약간 쑥스러워진다. 그는 완대성이라는 사람인데, 역사상 유명한 간신..

강희제는 왜 제정러시아에 영토를 양보하면서까지 전쟁을 회피했을까

글: 역사상적나점사아(歷史上的那點事兒) 청나라 268년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의 특이한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강희제건 아니면 나중의 건륭제이건 차라리 영토를 떼어주고 배상금을 물지언정, 시종 서방열강과 끝까지 혈전을 벌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중에서 염..

청나라는 왜 한인(漢人)이 동북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는가?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대청왕조는 동북의 여진인들이 건립하였고, 당시 동북은 황무지였으며, 개발을 해야 했다. 대청이 중원으로 들어와 자리잡은 후, 만주족도 중원으로 들어와서 통치를 공고히 했다. 그러다보니, 당시의 동북은 천리무인연(千里無人煙)의 곳이 되어버린다. 다만,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