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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26

이자성은 북경의 실패후 왜 남경으로 가지 않았는가? 글:천애간점(天涯看點) 1644년, 이자성은 산해관에서 패배한 후 북경에서 퇴각한다. 1년도 되지 않아, 이자성의 근거지인 섬서는 청군에 의해 남북에서 협공을 받는다. 이자성은 할 수 없이 대순군을 이끌고 대본영 서안에서 퇴각한다. 처음에 이자성의 생각은 하남을 거쳐 남경으로 가는 .. 2019. 1. 7.
완대성(阮大鋮): '통재(通才)'와 '간신(奸臣)'을 겸한 소인(小人)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추사여방초(秋思如芳草) 춘래일일생(春來日日生) 이것은 어렸을 때 외웠던 몇 개의 시중 하나이다. 당시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여겨져서 아주 좋아했었다. 그러나 이 시의 작자를 얘기하려면 약간 쑥스러워진다. 그는 완대성이라는 사람인데, 역사상 유명한 간신.. 2018. 12. 28.
강희제는 왜 제정러시아에 영토를 양보하면서까지 전쟁을 회피했을까 글: 역사상적나점사아(歷史上的那點事兒) 청나라 268년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의 특이한 사항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강희제건 아니면 나중의 건륭제이건 차라리 영토를 떼어주고 배상금을 물지언정, 시종 서방열강과 끝까지 혈전을 벌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중에서 염.. 2018. 7. 10.
청나라는 왜 한인(漢人)이 동북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는가?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대청왕조는 동북의 여진인들이 건립하였고, 당시 동북은 황무지였으며, 개발을 해야 했다. 대청이 중원으로 들어와 자리잡은 후, 만주족도 중원으로 들어와서 통치를 공고히 했다. 그러다보니, 당시의 동북은 천리무인연(千里無人煙)의 곳이 되어버린다. 다만, 만.. 2018. 1. 10.
주자환(朱慈煥): 중국의 마지막 한족(漢族) 황자(皇子) 글: 역사산인(歷史山人) 강희제는 청나라의 입관(산해관을 들어와 북경을 수도로 삼은 것) 이후 두번째 황제로 8살에 등극하여 일생동안 문치무공을 이루어 역사학자들에게 청나라때 가장 뛰어난 황제로 칭송받는 황제이다. 당시 '반청복명'의 사상이 민간에서 시시때때로 일어났고, 그.. 2017. 11. 3.
청나라의 "동북삼성(만주)"에 대한 봉금(封禁)과 치금(馳禁) 글: 뇌동(磊東) 청나라가 입관(入關, 산해관을 들어와 북경을 차지함)이후, 동북지구는 이전에 이십여년간 건주여진과 명왕조간의 군사대항이 있어, 요동의 농업경제기초는 이미 파괴되었고, 농경이 중단되고 토지는 황폐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실정을 보고, 순치10년(1653년), 청나라정부.. 2015.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