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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청나라군대는 5회나 명나라 경내로 진입하였는데 왜 북경을 함락시키지 못했을까?

by 중은우시 2019. 9. 12.

글: 천지사화(天地史話)


명나라와 청(후금)간의 전쟁은 1618년(만력46년) 청태조 누르하치가 거병하여 무순, 청하 일대를 기습한 때로부터 계산하면, 섭정왕 도르곤이 팔기철기를 이끌고 산해관으로 진입하여 북경성을 성공적으로 점령할 때까지 전후로 26년의 시간동안 이어졌다. 이 26년간, 쌍방간에는 크고 작은 전투가 수십차례 벌어졌고, 개별적인 전투에서는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여 각각 손실을 입었지만, 전체 명청간의 전쟁의 국면으로 보면, 기본적으로 명나라의 패배, 청나라의 승리가 주요 경향이다. 예를 들어 저명한 "사르후(薩爾滸) 전투"와 "송금대전(松錦大戰)"의 결과가 바로 그러하다. 글을 시작하면서, 여기에서 필자는 먼저 여러분들에게 이 두 개의 전투를 간단히 분석해 보고자 한다.


왜 이 두 개의 전투를 가지고 분석하는가? 왜냐하면 다른 전투와 비교했을 때, 이 두 전투는 평범하지 않은 전투였기 때문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전투는 유사점이 있다. 즉 교전쌍방중 어느 한쪽에 있어서 이는 생사에 관련된 일전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르후전투 당시 후금(청)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전체 여진인의 운명을 건 일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만일 패배한다면, 누르하치의 최후는 분명 예전의 왕고(王杲)와 같았을 것이다. 여진인은 분명 대명제국으로부터의 멸정지재(滅頂之災)를 당했을 것이다. 수십년 혹은 백년이상 절대로 고개를 들고 살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비록 명나라가 사르후전투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이는 생사를 건 일전까지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요동전쟁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는 정도이고, 금후 여진세력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난이도를 어느 정도 높여주었다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다만 쌍방이 송금대전이후 직면한 상황은 완전히 거꾸로였다. 이 전투이후, 명나라는 마지막 정예부대가 모조리 전멸했고, 패전후는 거의 전체 요동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애서 보자면 송금대전은 명나라에 있어서 확실히 생사를 건 일전이었던 것이다.



그 외에, 아주 중요한 몇 개의 전투가 있다. 예를 들어 청군이 다섯 차례나 명나라의 경내로 장거리기습을 하여 벌인 전투들이다. 이 다섯번의 전투의 발생시간은 각각 1629년(천총3년), 1634년(천총8년), 1636년(숭덕원년), 1638년(숭덕3년), 1642년(숭덕7년)이다. 이들 전투의 유사점이라면 모두 장거리기습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 산해관을 우회하는 전략을 택해서, 북쪽의 장성구(長城口)를 통해 명나라 경내로 진입한다. 돌연기습하는 방식으로 명나라 경내의 각 중진(重鎭)들에 군사적 타격을 가한다. 그중 가장 심각했던 것은 바로 1629년에 발생한 광거문(廣渠門) 전투이다. 이 전투는 홍타이시(청태종)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수개의 진(鎭)을 연파하며 마지막에는 북경성 아래에 이른다. 당시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은 숭정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전투였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청군은 이 5번의 장거리기습전에서 모두 싸우고 나면 물러났다. 바로 북경성을 함락시키는 전략을 쓰지 않았다. 당시 홍타이시의 실력이라면, 북경성을 취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 이슈에 대하여, 필자는 여기에서 심도있게 검토해보고자 한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여진인은 요동지구를 차지하기 전에 주로 수렵채집로 살아온 민족이다. 그런데 누르하치가 요양으로 천도하기로 결정한 그 해부터, 여진인들의 이런 생활습관은 분명하게 바뀌게 된다.


1621년(천명6년) 칠월, "계정수전령(計丁授田令)"은 누르하치의 선포로 후금국가의 기본"국책"으로 정식 채택된다. 이 제도의 반포는 여진인들의 생활습관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만들었다. 경제모델이 원시적인 수렵채집경제에서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농경경제로 전환되는 것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 과도(過度)는 역사발전의 필연적 결과이다. 여진인에 있어서는 시대적 의미가 있는 한걸음이다.


그러나, 수렵채집에 능한 민족이 돌연 중원지역과 다를 바 없는 농경민족으로 변신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이 과정은 반드시 장기간의 적응단계가 요구된다. 이 기간동안, 이들 여진인들의 농경생산성은 자연히 크게 낮아질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으로, 원래의 요동한인은 계정수전령에서 파생되어나온 제도의 압박하에 후금통치자를 위하여 봉사하는 '기기'로 전락한다. 이런 압박을 피하기 위해, 일부 한인은 후금정권의 통치범위를 빠져나가기도 했다. 또 다른 일부분은 빠져나갈 수 없었지만, 생산적극성은 전혀 발휘되지 않는다. 노동력과 하층백성의 생산적극성이 하락하면서 결국 국가의 전체적인 생산효율저하를 가져오게 된다. 이렇게 여진인과 요동한인의 생산성이 모두 낮은 상황하에서 다시 열악한 환경적 요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후금내부에서는 양식부족의 사회적 위기가 나타난다. 이런 사회적 위기는 홍타이시시기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소위 홍타이시시기의 "사농칭궤(司農稱匱), 창무적속(倉無積粟)"현상이 나타난다. 농사담당관리는 식량이 부족하다고 하고, 창고에는 쌓아둔 곡식이 없다.


이런 형세하에서, 후금내부에서는 반드시 어떤 수단에 의존하여 스스로의 식량부족현상으로 인한 사회적 위기를 해결해야 했다. 당시의 상황에 기하여 후금이 단기간내에 자신의 생산효율을 높여서 사회적 위기를 해소시킨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그래서 유일한 방법이 전쟁을 통하여 약탈하는 것이다. 그것이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그 중 3차례의 대규모 기습전을 살펴보자:


1636년(숭덕원년), 이번 기습전은 아지거(阿濟格)가 지휘한다. 팔월 십이일 출발하여, 장성으로 진격한다. 보정부(保定府)를 지나 안주(安州)에 이르며 모두 12개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포로로 잡은 사람과 가축은 모두 179,820구에 달하였다. 양식과 베등은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1638년(숭덕3년), 이번 기습전은 반년여동안 지속된다. 청나라가 북경성을 차지하기 전에 최대의 입관기습전이었다. 이번 전투는 도르곤이 총사령관이었고, 하오거, 아바타이등이 부사령관이었다. 군대를 이끌고 각각 장자령(墻子嶺)과 청산관(靑山關)을 통해 명나라 경내로 진입한다. 이번에 포획한 자원은 사람 204,423구, 황금 4,309냥, 은 977,406냥, 아머지 잡다한 물품은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1642년(숭덕7년), 청군이 다시 대거 침입한다. 이번에 획득한 자원은 사람 369,000구,  황금 12,250냥, 은 225,270냥, 비단 52,230필등등이다(이상의 수치는 청태종실록에 근거함)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청군의 이 몇번의 기습전에서 획득한 재물, 양식, 가축, 인구등 각종 자원은 기본적으로 백만단위이다. 이렇게 방대한 자원은 순식간에 청나라로 하여금 내부의 노동력위기와 재정경제위기, 그리고 팔기사병의 생계문제를 모조리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어떤 각도에서 보자면, 자원획득이야말로 후금측에서 이 여러번의 기습전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당연히 자원약탈을 통하여 자신의 위기를 완화시키려는 목적을 제외하고도, 홍타이시는 이런 장거리기습전을 통하여 일부 다른 목적도 달성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명나라는 농민반란군의 세력에 잠식되고 있었는데, 출병을 하게 되면 명나라는 국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고, 두 개의 전선에서 모두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리하여 작전효율을 저하시킬 수 있었다. 이는 홍타이시의 큰 나무를 베려면 반드시 옆에서 조금씩 찍어나가야 한다는 방침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대규모 기습전은 청나라의 명나라에 대한 총체적결전에서 빠질 수 없는 구성부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