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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지리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십삼관(十三關)

by 중은우시 2019. 10. 4.

글: 낭자일매(浪子一枚)


"장성을 가보지 않으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 장성은 만리장성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호거용반(虎踞龍盤)의 장성은 중국 고대에 국경을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하려는 군사공정이었다. 오늘날 장성의 최우선적이었던 군사방어기능은 점점 역사무대에서 퇴출되었지만, 이에 대체하여 각지의 관광객들을 끌어모아 남승회고(攬勝懷古)하게 하는 관광명승지가 되었다.


만리장성의 길이는 얼마나 될까?


장성의 길이는 마치 거대한 용이 중국북방에 가로놓인 것과 같다. 국가문물국이 공표한 <중국장성보호보고서>에는 처음으로 장성의 길이를 언급했다. 현종하는 총 길이는 21,196.18킬로미터라고 한다. 각 시대의 장성은 북경, 하북, 산서등 15개 성(자치구,직할시)와 404개 현(시,구)을 지난다.


장성이 얼마나 긴지는 이제 알았다. 그렇다면 장성의 십삼관은 도대체 어느 열세 개의 관을 말하는 것일까/


제일관(第一關) 산해관(山海關)




산해관은 "유관(楡關)"이라고도 부른다.

위치는 하북성 진황도시 동북 15킬로미터 지점이다.

1381년 명태조 주원장의 명령하에 이 관을 건축한다.

이곳은 동북을 막기 위하여 만들어 졌고,

화북의 인후에 위치한 군사요새이다.

의산금해(依山襟海)하고 있기 때문에 산해관이라고 불리웠다.

산해관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명칭도 얻고 있다.

"천하제일관" 편액은 명나라때의 유명한 서예가인 소현(蕭顯)이 쓴 것이다.


제이관(第二關) 황애관(黃崖關)



황애관은 "소안문관(小雁門關)"이라고도 불린다.

진문십경(津門十景)의 하나인 계북(薊北)의 웅관(雄關)이다.

위치는 계현의 최북단 30킬로미터지점의 동산 위에 있다.

북제(北齊)때 건설되었으며,

명나라때의 명장 척계광(戚繼光)이 계진총병으로 있을 때,

새로 설계하여 크게 보수한다.

황애관의 동쪽에 있는 산애(山崖)의 암석은 황갈색이 많다.

저녁에 석양이 비치면 금빛이 휘황하다.

그래서 "만조황애(晩照黃崖)"라는 말이 있다.

이 주변에는 "황애석조(黃崖夕照)", "이룡희주(二龍戱珠)"와 "운해연파(雲海煙波)"의 3대기관(奇觀)이 있다.

웅(雄), 험(險), 수(秀), 고(古)의 사대특색이 있다.


제삼관(第三關) 거용관(居庸關)



거용관은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는 명칭이 있다.

북경시 창평구에 있고 이름은 진(秦)나라때부터 이어져 내려온다.

남북에 두 개의 관구(關口)가 있으며 남쪽은 "남구(南口)" 북쪽은 "거용관(居庸關)"이라고 부른다.

연(燕)나라때부터 이미 군사요새가 되었다.

한나라때는 이미 상당한 규모를 갖춘다.

그후 당, 요, 금, 원의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거용협곡에는 관성(關城)이 건설되어 있었다.

징기스칸이 금나라를 멸망시킬 때도 이 관으로 들어온다.

현존하는 관구는 명나라 홍무(洪武)연간에 건설되었다.


제사관(第四關) 자형관(紫荊關)



자형관은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 성의 서북 45킬로미터 지점의 자형령에 위치하고 있다.

성의 동쪽은 만인산(萬仞山)이고, 성의 서족은 서우산(犀牛山)이다.

성의 북쪽은 거마하(拒馬河)이고, 성의 남쪽은 황토령(黃土嶺)이다.

지금까지 기남제일웅관(畿南第一雄關)으로 불려왔다.

남쪽은 십팔반도(十八盤道)의 험준함이 막고 있고, 

북쪽은 부도애구(浮圖隘口)를 문호로 한다.

웅장한 관이 그 중간에 있으니 여러 험준함이 날개처럼 바깥에 펼쳐져 있다.

산골짜기는 기구하여 수비하기 좋다.

그래서 "일부당관(一夫當關), 만부막전(萬夫莫前)"의 험준함이 있다.

역사상 자형관에서는 모두 140여차례의 전쟁이 일어났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213년 징기스칸이 거용관을 공격하다가 함락시키지 못하자, 

병력을 나누어 자형관의 금나라군대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것이다.

그후 다시 안팎에서 거용관을 협공하여 결국 거용관을 함락시킨다.

명나라 정통14년 토목보의 변이 일어난 후

몽골 오이라트군이 자형관을 격파하고 북경으로 접근한 바 있다.


제오관(第五關) 도마관(倒馬關)



중국 하북성 당현(唐縣) 서북 60킬로미터 지점의 도마촌(倒馬村)에 위치하고 이싿.

하북평원에서 태행산으로 진입하는 요도(要道)의 하나이다.

산길이 험준하여, 전마(戰馬)가 이곳에 이르면 자조 쓰러졌기 때문이 '도마관'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명나라이후에는 도마관으로 통칭되었다.

현존하는 도마관은 명나라 경태(景泰)연간에 건설되었고,

거용관, 자형관과 함께 내삼관(內三關)이라고 불린다.

도마관의 성의 동문, 서문은 이미 도로공사로 철거되었다.

북문도 일찌기 철거되었고, 성벽은 서쪽의 성벽만 겨우 잔존하고 있다.

바깥쪽은 청전(靑磚)을 쌓아서 만들었고, 안쪽은 난석(卵石)으로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머지 ㅏㅁ면은 모두 철거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만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제육관(第六關) 평형관(平型關)



평형관은 산서성 대동시 영구현(靈丘縣) 백애대향(白崖臺鄕)에 위치하고 있으며,

명나라 정덕연간에 건축되었다.

장성이 평형령(平型嶺)을 지나갈 때, 형평령의 위에 관루(關樓)를 건설했다.

평형관은 평형령의 남록에 세워져있고,

옛 명칭은 병형채(甁形寨)인데, 주위의 지형이 병과 같다고 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

금나라때는 병형진(甁形鎭)이며, 명, 청때는 평형령관으로 불리웠고, 나중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진다.

역사상 이곳은 수비군이 머무는 곳이다.

주위는 900여장이고 남북동에 각각 문이 하나씩 만들어져있다.

평형관은 유명한 평형관전투로 더욱 이름을 날린다.

1937년 9월 25일, 일본 최정예의 이타가키(板垣)사단의 주력이 평형관에서 임표 원수가 이끄는 팔로군의 공격을 당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근 천명이 전사하고, 자동차 100량, 트럭 200량을 파괴시키고,

소총 1000여개, 경기관총 20여정, 전마 53필과 기타 전리품을 획득한다.


제칠관(第七關) 편두관(偏頭關)



편두관은 역사가 유구하다.

황하가 산서남부로 굽어 흐르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역대이래로 병가에서 쟁탈하고자 하는 중지이다.

위치는 편관현(偏關縣) 황하 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무관(寧武關), 안문관(雁門關)과 함께 "외삼관(外三關)"이라고 부른다.

지세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현존하는 건축은 명나라 홍무연간에 만들어 졌다.

명나라때, 편두관은 진북(晋北, 산서북부)의 문호이고,

진북과 내몽고의 호시(互市)가 열렸던 통상구(通商口)이다.


제팔관(第八關) 안문관(雁門關)



안문관은 "험(險)"으로 유명하여, "중화제일관(中華第一關)"이라고 불린다.

"천하구새(天下九塞), 안문위수(雁門爲首)"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산서성 흔주시(忻州市) 대현(代縣) 현성의 북쪽 약 20킬로미터 지점의 안문산(雁門山) 안에 있다.

이는 장성의 중요한 관애(關隘)이고, 영무관, 편두관과 합쳐서 '외삼관'으로 불린다.

안문에는 동문, 서문의 두 개의 문이 있다.

모두 거대한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고, 편액에는 "천험(天險)"과 "지리(地利)"라고 써놓았다.

안문관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즉시 송나라때의 양가장(楊家將)을 떠올린다.

나라를 위하여 일가족이 목숨을 연이어 바친 이야기이다.

안문관의 동서 두 문에는 일찌기 성루가 건축되어 있었다.

높이 솟아 있으며 안에는 양가장의 조상이 있다.

그리고 동성문 밖에는 이목(李牧)의 사당과 비석이 있다.

아쉽게도 성루와 이목사당은 일본군의 침략으로 불에 타버렸다.


제구관(第九關) 낭자관(娘子關)



낭자관은 중국 만리장성의 유명한 관애이다.

산서성 평정현 동북의 면산(綿山) 산록, 태행산맥의 서쪽 하북성 정형현(井陘縣)의 서쪽입구에 있다.

낭자관의 원래 이름은 "위택관(葦澤關)"이다.

당나라때의 평양공주(平陽公主)가 일찌기 이곳에 병력을 이끌고 주둔한 바 있다.

평양공주의 부대는 당시 사람들이 '낭자군'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낭자관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현존하는 관성은 명나라때 건축되었다.

만리장성 제구관이며 역대이래로 병가의 필쟁지지이다.


제십관(第十關) 살호구관(殺虎口關)



명왕조때 병력이 장성을 나가서 전투를 할 때면 대부분 살호구관으로 출입했다.

위치는 산서와 내몽고가 만나는 곳에 있다.

안북 외장성에서 가장 중요한 관애의 하나이다.

진북산지와 내몽고고원의 변연지구이다.

또한 내몽고초원에서 산서중부의 분지로 남하하거나 태행산으로 내려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다.

명나라때는 "살호구(殺胡口)"라고 불렀다.

나중에 점점 현재의 "살호구(殺虎口)"로 바뀌게 된다.

명나라때 몽골귀족이 장성을 남침하면

이곳을 돌파구로 삼은 적이 많았다.


제십일관(第十一關) 가욕관(嘉峪關)



가욕관은 감숙성 가욕관시 서쪽 5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명나라때 장성중 서단(西端)의 가장 중요한 관이다.

또한 고대 비단길의 교통요충지이다.

명나라때 만리장성 서단의 기점이기도 하다.

명나라 홍무5년에 건축되었다.

전후로 168년의 시간을 들여 완공된다.

만리장성의 연선에 가장 장관인 관성(關城)이다.

가욕관은 지세가 가장 높은 가욕산 위에 있다.

성관의 양날개의 성벽은 고비사막을 뚫고 지나간다.

자고이래로 하서(河西) 제일애구(隘口)였다.


제십이관(第十二關) 양관(陽關)



양관은 중국고대 육로대외교통의 인후지지이다.

비단길 남로에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관애이다.

감숙성 돈황시 서남의 고동탄(古董灘) 부근에 있다.

서한때 관을 두었고, 옥문관의 남쪽에 있고, 옥문관과 함께 당시 서역교통의 문호가 된다.

양관은 한나라 원봉4년에 건축되고, 한나라때부터 당나라때까지, 계속하여 비단길 남로의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애이다.


제십삼관(第十三關) 옥문관(玉門關)



옥문관을 얘기하자면, 모두 인구에 회자되는 당시를 떠올릴 것이다.

그것은 왕지환(王之渙)의 <양주사(凉州詞)>이다


황하원상백운간(黃河遠上白雲間), 일편고성만인산(一片孤城萬仞山)

강적하수원양류(羌笛何須怨楊柳), 춘풍부도옥문관(春風不到玉門關)


시 속의 비장하고 처량한 정서는 우리의 이 오래돤 관새에 대한 그리움을 이끌어 낸다.

옥문관은 한무제때 서역통로를 개통하기 위하여 만들어 졌다.

하서서군을 설치할 때,

서역에서 옥석(玉石)을 수입하였으므로 이 이름을 얻게 된다.

또한 소방반성(小方盤城)이라 칭하는데, 관성은 네모형이다.

사방의 성벽은 잘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