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풍장안량(風長眼量)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청나라때 8대총독(總督)은 지위도 높고 권력도 큰 봉강대리(封疆大吏)라는 것을. 1개 성 혹은 수개 성의 군정대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청나라의 오대장군은 또 무슨 관직이었을까?
원나라에서 창조적으로 행성제도(行省制度)를 행정구역으로 운용했고, 명,청이 이를 이어받아, 지방의 1급 행정구역이 된다. 청나라는 대체로 명나라의 성급구획을 이어받았고, 이를 기초로 약간의 조정을 한다. 예를 들어, 명나라때 면적도 넓고 부유했던 남직예(南直隸)를 강남성(江南省)으로 바꾸고, 그 후에 다시 강소성(江蘇省)과 안휘성(安徽省)으로 분할했다. 전체적인 틀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지방장관의 설치, 예를 들어, 총독, 순무 등. 약간 다른 점이라면, 청나라에는 오대장군, 주장대신(駐藏大臣), 청해판사대신(靑海辦事大臣)등 특수한 관직이 있었다는 것이다.
총독, 순무는 우리가 비교적 잘 알고 있다. 다만 청나라때의 오대장군은 아마도 비교적 낯설 것이다. 성경장군(盛京將軍), 길림장군(吉林將軍), 흑룡강장군(黑龍江將軍), 오리아소대장군(烏里雅蘇臺將軍), 이리장군(伊犁將軍). 이들 장군의 관할구역은 어디였을까? 오대장군의 이름을 보면 그들의 대체적인 관할구역이 어디인지 알 수가 있다. 길림장군, 흑룡강장군, 이리장군은 쉽게 알것이다. 성경장군과 오리아소대장군은 아마 약간 낯설텐데, 우리는 먼저 동북부터 얘기해보자.
산해관이 있으므로, 동북(東北)을 청나라때는 습관적으로 관외(關外)라고 불렀다. 이곳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지리단위였다. 요서주랑의 좁은 연해통로를 통해 화북평원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동북은 청나라 귀족의 발상지이고, 그래서 청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된 후에, 유조변(柳條邊)을 설치하여 관내의 주민이 유입되는 것을 금지했다. 동북은 비록 광대한 평원이고, 비옥한 흑대지이지만, 당시에는 인구가 희소했고, 개발정도가 비교적 낮았다. 그래서 다른 지역처럼 성을 설치하지 않았다. 동북에서 채택한 것은 '군부제(軍府制)'이다. 3개장군을 설치하여 관할구역을 관할했다.
1. 성경장군
성경장군은 초기에 정1품 무관이었다. 건륭때는 종1품으로 낮춘다. 주둔지는 성경이다. 성경은 지금의 요녕성 심양인데, 청나라가 북경으로 천도하기 전에는 도성이었다. 천도후에는 계속하여 유도(留都)로 존재했다. 처음에 동북지방은 성경장군이 전체 동북지역의 군민사무를 책임졌었다. 당시의 명칭은 "성경앙방장경(盛京昻紡章京)"이었다. '장경'은 만주어를 음역한 것으로 '장군'이라는 뜻이다. '앙방'은 직급이다. 만주팔기의 무관 '장경'의 직급은 앙방, 매륵(梅勒), 갑라(甲喇), 우록(牛祿)이 있다. 나중에 영고탑장군(寧古塔將軍)을 설치한 후, 성경장군의 주요 관할지역은 봉천지구(지금의 요녕성 대부분과 내몽고 일부분)가 된다.
2. 길림장군
동북은 지역이 너무 넓어서 관리의 편의를 위해 1653년 순치제때, 유조변 바깥의 흑룡강, 송화강과 우수리강유역을 단독의 행정구역으로 하여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紡章京)을 설치하고, 주둔지는 구영고탑성(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 서해림하 남안의 구도시)이다. 즉 대체로 유조변을 경계로 하여, 성경장군은 유조변내를 관할하고, 영고탑장군은 유조변외를 관할한다.
1662년, 한문화를 숭상하는 강희제가 등극한 후, 성경앙방장군을 요동장군(遼東將軍)으로 고친다. 전칭은 "진수요동등처지방장군(鎭守遼東等處地方將軍)"이다. 나중에 다시 봉천장군(奉天將軍)으로 고친다; 영고탑앙방장경은 영고탑장구능로 고친다. 진칭은 "진수영고탑등처지방장군(鎭守寧古塔等處地方將軍)"이다.
영고탑장군은 나중에 강희제에 의해 길림 우라(烏拉, 지금의 길림시)로 주둔지를 옮긴다. 건륭제때, 봉천장군은 성경장군으로 고치고, 전칭은 '진수성경등처장군"이 된다. 영고탑장군은 길림장군으로 고치고, 전칭은 "진수길림우라등처장군"이다.
3. 흑룡강장군
흑룡강장군은 조금 늦게 설치된다. 동북지방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제정러시아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강희22년 즉 1683년, 다시 흑룡강장군을 증설한다. 전칭은 "진수흑룡강등처지방장군"이다. 관할지역은 원 영고탑장군의 관할구역의 서북지방이다. 북으로는 외흥안령 러시아와의 국경선까지이고 서로는 체첸칸(車臣汗)의 국경과 경계가 되고, 남으로는 송화강일대에 이른다. 2년후, 즉 1685년, 강희제는 제정러시아의 침입을 몰아내고 영토를 수복하는 야크사전투를 벌인다.
흑룡강장군의 주둔지는 처음에 흑룡강 동안의 아이훈(愛琿, 舊城)이었는데, 다음 해에 흑룡강서안의 아이훈신성(지금의 흑룡강성으로 옮기고, 나중에는 1699년 치치하얼로 옮긴 다음 다시 옮기지 않았다.
동북3대장군의 관할구역은 고정불변이 아니었다. 청나라때는 시기에 따라 약간씩 변화가 있었다. 예를 들어, 나중의 성경장군의 관할구역도 유조변 바깥가지 확대된다. 다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변화가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4. 오리아소대장군
오리아소대장군의 전칭은 "오리아소대정변좌부장군(烏里雅蘇臺定邊左副將軍)"이다. 주둔지는 오리아소대성(지금의 몽골국 자부하성 자부하랑트) 1733년, 옹정제가 준가르부를 정벌하기 위하여 설치한 무관 관직이다. 카르카몽골의 각 부대병력을 지휘한다.
정변좌부장군은 원래 전쟁을 위하여 설치했는데, 건륭제가 몇 번의 정벌을 거쳐 준가르를 평정했지만, 이 직위는 보류시킨다. 준가르일부토지 및 외몽골지역, 카르카몽골각부, 당노오량해(唐努烏梁海), 과포다(科布多)등지를 포함하여 지켰다. 주둔지가 오리아소대성에 있기 때문에 '오리아소대장군'이라고 불렸다. 오리아소대장군의 관할지역은 아주 넓다. 대체로 지금의 몽골국대부분지역, 러시아의 투바공화국, 알타이공화국, 카자흐스탄동부지역, 그리고 현재의 신강 알타이지구의 북부를 포함한다.을 포함한다.
5. 이리장군
준가르부와 대소화탁(和卓)의 난을 평정한 후, 건륭제는 1762년 신강지역에 이리장군을 설치한다. 전칭은 "총통이리등처장군(總統伊犁等處將軍)"이다. 이리장군의 주둔지는 혜원성(惠遠城, 지금의 신강 곽성 동남)이고, 신강의 남북양로를 통할한다. 여기에는 바르카스호 동쪽, 남쪽, 어얼치스강 상류, 천산남북양로에서 파미르등지가 포함된다. 이리장군은 상시의 신강지역 토황제라고 할 수 있다.
이리장군을 처음 설치했을 때, 적합한 주둔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리강 북안에 혜원성을 만들어, 장군의 주둔지로 삼았다. 그리고 주위에 영원(지금의 이닝), 수정, 혜녕, 탑륵기, 첨덕, 광인, 공신(拱宸), 희춘등 8개의 위성성(衛星城)을 만든다. 혜원성과 합쳐서 "이리구성"이라고 불린다. 혜원성은 일약 신강의 정치, 군사중심이 된다. 나중에 혜원성은 제정러시아침략자들에게 짓밟힌다. 좌종당이 1881년 이리를 수복한 후, 원래의 성 북쪽에 혜원성을 재건한다. 다만 혜원성은 이미 옛날의 영광을 되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2년후 신강성이 만들어지고, 성부는 이리가 아니라 적화(迪化, 지금의 우루무치)에 두게 되기 때문이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청 초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나라때 황마괘(黃馬褂)는 누가 입었는가? (0) | 2019.02.07 |
---|---|
"만한불통혼(滿漢不通婚)" (2) | 2019.02.01 |
청나라때 친왕(親王)은 모두 몇명인가? (0) | 2019.01.09 |
영고탑(寧古塔): 청나라의 유배지 (0) | 2019.01.08 |
순치제,옹정제가 친딸이 있으면서 양녀를 많이 들인 이유는...? (0) | 2018.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