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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이자성(李自成)과 청왕조(淸王朝) 누가 누구의 덕을 보았는가?

by 중은우시 2019. 6. 3.

글: 군무차위면(軍武次位面)


1644년 봄, 이자성은 대순군을 이끌고 북경으로 진입하여, 명왕조가 멸망한다. 그러나 겨우 1개월여만에, 이자성은 산해관전투에서 청군에 격패당하여 황급히 북경에서 도망치게 된다. 북경성은 다시 청왕조의 천하로 바뀐다.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하여, 많은 역사애호가들은 탄식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청왕조는 명왕조와 이자성의 내전을 이용하여 중원을 차지할 수 있었다. 명청교체의 역사에서 굴러들어온 떡을 집어먹게 되는 것이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고성(顧誠)은 더욱 분연하여 질책한다: "만주가 명말 농민전쟁의 과실을 따먹었다." 이렇게 되다보니 청왕조가 이자성의 복숭아를 따먹었다는 것이 마치 정설처럼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이 맞는 말일까? 역사적 사실의 검증을 버텨낼 수 있을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 대답은 No이다. 만일 우리가 관찰의 시야를 1644년에서 30년가량의 시간을 옮겨보면, 완전히 다른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 문제를 고찰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시간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명왕조와 후금의 전쟁은 언제 시작하였을까? 명말농민전쟁은 또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1616년(명 만력44년),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여진 각부를 통일하고, 정식으로 "황의칭짐(黃衣稱朕)"한다. 즉, 노란색의 곤룡포를 입고, 짐을 칭하며, 허투아라에서 후금을 건국한다. 이때의 이자성은 섬북 농가의 10살짜리 아이였다. 1618년(명만력46년) 여름, 누르하치는 "칠대한(七大恨)"을 내세우며 명나라에 반기를 든다.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619년(명만력47년) 봄, 십만의 명군이 분진합격(分進合擊)의 전법으로 병력을 넷으로 나누어 허투아라로 진격한다. 그 결과 누르하치의 각개격파전술에 대패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살이호(사르후)전투이다. 그후 전략적인 주도권은 후금쪽이 확실히 장악하게 된다.


1627년(명천계7년) 봄,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은 이미 10년째로 접어들었다. 명말농민반란의 서막이 섬북 징성현에서 열린다. 다만 반란의 최초 2년은 기본적으로 배고픈 농민들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골 부호를 강탈하는 수준이었다. 엄밀한 조직도 없고, 그럴듯한 무기도 갖지 못했다. 그러니 명나라통치에 위협이랄 것도 없었다. 농민반란군은 현성(縣城)도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다. 명나라관병이 오기만 하면 기본적으로 이들 농민들은 뿔뿔이 도망쳤다. 명말 농민반란군의 전투력이 크게 향상된 것은 바로 후금때문이다. 1629년(명숭정2년), 홍타이시는 영금(寧錦)방어선을 우회하여 고북구(古北口)에서 장성을 뚫고 진입한다. 역사에서 "기사의 변(己巳之變)"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명나라조정은 긴급히 각지의 군대를 부러모아 북경성을 방어하도록 한다. 그러나, 군자금을 제때 공급해주지 않고, 군량을 중간에서 떼어먹어 각지의 군대는 오히려 반기를 드는 경우까지 나타난다. 이들 정규군인 명군의 가입으로 농민군의 전투력은 신속히 제고된다. 다음해 봄, 농민군은 섬북에서 황하를 건너 산서로 들어간다.명말농민반란군이 만연되는 추세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 단계의 농민군은 단지 현성과 일부 작은 주성(州城)을 포위공격하는 수준이었다. 명나라의 대규모 군대의 토벌을 만나면, 여전히 도망쳤다. 예를 들어, 진사출신인 홍승주(洪承疇)는 반란군을 진압하는 전투에서 연이어 공을 세워, 연수순무(延綏巡撫)로 승진한다. 그와 그가 지휘하는 진군(秦軍, 섬서변방군)은 그후 농민군을 가장 괴롭히는 군대가 된다. 농민군을 괴롭히는 또 한 명인 노상승(盧象升)도 바로 이 시기의 전투에서 신속히 굴기한다. 그는 대명부지부(大名府知府)의 신분으로, 대명부 현지의 장정을 군대로 모집하여, 농민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한다. 이자성, 장헌충은 모두 그에게 패배한 바 있다. 그의 위명은 거의 농민군이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노상승과 그의 '천웅군(天雄軍)'(대명부는 당나라때 천웅진이라고 불렸다)은 이때부터 중원에 위명을 떨친다. 이들은 명왕조의 강력한 군대가 된다.


이 시기의 농민군은 시종 유동작전을 했다. 근본적으로 명나라의 야전군과 대적할 수 없었다. 비록 그들은 숭정8년 봉양을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어 정치적으로 명왕조에 큰 타격을 주기는 했지만, 군사적으로 그들은 시종 열세였다. 숭정7년이후, 관와의 홍타이시는 차하르부의 린단칸을 정벌하고, 조선을 정벌하고, 동강군(東江軍)을 소멸시키느라 바빠서, 잠시 명왕조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늦추고 있었다. 이는 명왕조에 비교적 여유있게 농민군을 상대하도록 해준다. 그리하여 농민군에게는 재난이 닥친다. 숭정9년(1636년), 틈왕 고영상이 홍승주에게 패배하고, 포로로 잡힌 후 북경으로 압송되어 처형당한다. 장헌충,나여재도 연속으로 패배하여, 부득이 각각 곡성과 방현에서 명군에 투항해서 초무(招撫)를 받아들인다. 고걸, 유국능, 왕씨형제등 농민군의 중요한 우두머리들은 모두 명군에 투항했다. 이자성은 그러나 부대를 이끌고 사천으로 갔고, 사천의 재동에서 천군(川軍)에 대패한다. '수천이 참수당하고, 거의 섬멸된다' 그리하여 다시 도망다녀야 했다. 사천서부, 청해, 감숙, 영하를 거쳐 섬서로 돌아간다. 그 결과 숭정11년(1638년) 가을 다시 동관의 남원에서 홍승주와 손전정에게 포위섬멸당하여, '이자성은 병사들이 다 죽고, 혼자서 유종민, 전견수등 18기와 포위망을 뚫고 상,락의 산 속으로 도망친다." 이때의 이자성은 곤란이 극에 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러 장수들은 효산, 함곡관의 속에 이자성을 가둬놓고, 중요 길목을 막고, 엄밀하게 포위하여, 앉아서 죽임을 당하게 생겼다."


그러나, 바로 이때, 이자성의 '구성(救星)'이 나타난다. 바로 청군이 이해 겨울 제4차 입관전투를 일으킨 것이다. 홍승주는 숭정제가 긴급히 호출하여 섬서전선에서 청나라와의 전투현장으로 불려갔다. 홍승주는 계료총독(薊遼總督)에 임명되고, 손전정은 보정총독(保定總督, 나중에 주유검에 대들었다가 감옥에 갇힌다). 이 두 명의 장수가 떠나자, 이자성에게는 의외의 기쁨이 된다. 청군의 이번 입관은 홍승주를 전출시켰을 뿐아니라, 노상승도 없앨 수 있었다. 노상승은 당시 선대총독(宣大總督)인데, 청병이 입관한 후 급히 북경으로 가서 황제를 호위하려다가 거록에서 청병의 포위공격을 받는다. 농민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며 사방에 위세를 떨치던 천웅군은 고전끝에 청군에게 완전히 섬멸당하고, 노상승도 전사한다.


숭정13년(1640년) 겨울에 이르러, 이자성은 돌연 하남으로 들어간다. 하남은 기근에 시달리고 있어서, 많은 농민들이 이자성의 군대에 가입한다. 그리하여 인원이 급속히 확대된다. 그후 짧은 몇달동안, 이자성의 부대는 중원을 휩쓴다. 숭정15년(1642년) 여름, 이자성은 주선진에서 명군을 대파한다. 좌량옥의 부대를 크게 무너뜨리고, 정계예를 궤멸시키는 휘황한 승리를 거둔다. 과거 필자는 이 과거역사를 읽을 때마가 의혹을 품었다. 그것은 바로, 왜 2년전에 명군에 패배하여 곳곳을 도망다니던 대순군이 이렇게 짧은 시간내에 이렇게 강대하게 바뀌게 되었을까라는 것이다. 설마 이자성이 정말 무슨 '점금지술(點金之術)'이라도 지녔단 말인가? 이렇게 짧은 시간내에 굷주린 농민을 정예군인으로 훈련시킬 수 있는...왜 그랬을까. 그것은 바로 송금대전(松錦大戰)때문이다.


숭정13년 봄부터 청군은 금주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장기적인 포위고사전술을 쓴다. 금주의 수비군을 고사시키겠다는 것이다. 숭정제는 금주를 구원하기 위하여, 홍승주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구변의 변방군중 정예를 추려서 뽑은 야전군으로 13만을 조직하여 금주로 가서 청군의 포위를 풀어주고자 한다. 숭정14년(1641년) 가을, 홍타이시는 기회를 잡아 이 13만을 궤멸시킨다. 명군의 사망자는 5만5천에 달하고, 부상을 입은 자나 포로로 잡힌 자가 수만이었다. 숭정15년 봄, 청군은 다시 송산을 함락시킨다. 홍승주는 포로로 잡혔다가 청나라에 투항한다. 금주의 수비장수인 조대수(祖大壽)도 어쩔 수 없이 투항한다. 이제, 2년에 걸친 송금대전이 끝났다. 명나라의 최정예부대인 관녕군은 기본적으로 없어졌다. 겨우 남은 3만의 잔병이 외로운 성 영원(寧遠)을 지키고 있었다. 명나라가 온 힘을 끌어모아서 만든 정예야전군이 이번 전투에서 기본적으로 섬멸되어 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명나라는 더 이상 강대한 야전군군단을 보유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송금대전의 시간이 바로 이자성이 하남을 공격하여 신속히 발전한 기간이라는 것이다. 명나라의 정예야전군은 거의 모두 관외로 불려가서 금주의 포위망을 풀어주는 전투에 투입된다. 그리하여 내지에 남은 것은 2,3류의 명군이다. 이들이 농민군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명군은 군량이나 군수물자의 보급이 항상 부족하여 사기도 낮고, 무기도 부족했고, 갑옷도 낡았다. 훈련도 엉망진창이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명군이 농민군과 싸우다보니 바로 궤멸되고 일패도지 한 것도 이해가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청군이 송금대전에서 휘황한 승리를 거두어 명나라의 가장 주요한 군사역량을 소멸시켜 주었기 때문에, 이자성은 짧은 기간내에 신속히 발전할 수 있었고, 명나라와 천하를 쟁탈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후기에 손전정이 다시 나왔을 때는 이미 쓸만한 병사가 없었다. 부득이 새로 군대를 모집했고, 결국 이자성의 공격에 패배하여 전사하게 된다.


바로 이자성이 손전정을 격패시키는 과정에서, 숭정15년 가을, 홍타이시는 동생 아바타이에게 대군을 이끌고 제5차 입관작전을 벌이게 하여 명나라를 공략한다. 청군의 이번 행동은 숭정16년(1643년) 여름에 요동으로 돌아갈 때까지 지속되었다. 청군은 화북 일대에서 무인지경으로 돌아다닌다. 이러한 사실은 청군이 북경을 빼앗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라는 것을 말해준다. 단지 역사는 이때 장난을 친다. 이미 17년간의 노력을 거쳐 청나라가 북경성으로 진입하는데 장애물을 거의 제거한 홍타이시가 돌연 사망한 것이다. 청나라통치집단의 내부는 황위계승을 둘러싸고 투쟁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입관의 시기가 잠시 늦추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서안에서 막 나라를 건국한 이자성은 후방이 안정되기도 전에, 조급히 숭정17년(1644년) 대군을 이끌고 황하를 건넌다. 북경을 향한 진군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숭정제가 유일하게 희망을 걸었던 것은 관외 영원고성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의 관녕잔여군이다. 다만 관녕군이 북경으로 들어와 막는다면, 그것은 관위의 청군을 막는 방어선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숭정제는 청군의 거대한 압력에 시종 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이자성의 대군이 선부, 대동을 함락시키고나서야 숭정제는 영원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오삼계에게 북경으로 와서 지키라고 말한다. 다만 그는 이미 시간이 없었다. 오삼계의 군대가 막 산해관으로 들어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자성은 북경성을 함락시킨다. 숭정제는 매산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고, 명나라는 멸망한다. 이 역사적 순간에 청왕조는 부지불식간에 이자성에게 큰 도움을 준 셈이다. 결국 이자성은 잠시나마 황제의 꿈을 실현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빚진 것은 결국 갚아야 하는 법이다. 청왕조가 이자성을 위하여 명나라의 주요 정예야전군을 없애주었고, 이자성을 위하여 명나라북방의 인력, 물력, 재력을 탕진시켰고, 이자성을 위하여 노상승을 없애고, 홍승주를 포로로 잡았다...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자성이 북경으로 가는 길을 닦아준 것이라고. 당연히 이때 복숭아를 심은 청왕조는 더 이상 이자성이 자신들이 심은 복숭아를 따먹게 놔둘 수가 없었다. 도르곤이 팔기군을 이끌고 산해관의 아래에 나타났을 때, 복숭아는 자연스럽게 심은 사람에게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