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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의학

중국고대에는 전염병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by 중은우시 2020. 2. 4.

글: 장금(張嶔)


과학기술과 의료조건이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중국고대에, 전염병재난에 관한 기록이 어떤 때는 역사서내에서 겨우 몇마디로 언급되어 있다. 다만, 발발의 빈번함과 파괴력은 수재나 가뭄등 자연재해 심지어 전쟁보다도 훨씬 컸다. 사료의 간단한 기재 배후에는 항상 생명과 재산의 놀라울 정도의 사망과 손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영웅배출'로 얘기되는 삼국시대에 파란만장했던 전쟁의 배후에는 바로 빈빌하는 대규모 전염병이 있었다. 동한 한영제연간에서 서진의 진무제연간까지, 중국에서는 대규모 전염병이 20여차례이상 발생한다. 삼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경제가 가장 강대했던 위(魏)나라는 '인중지손(人衆之損), 만유일존(萬有一存)"(사람들이 죽어서 만명에 한명이 남았을 정도이다) 그리고 '십주지지(十州之地)'의 인구는 '불여왕석일주지민(不如往昔一州之民)' 즉, 십주의 인구가 옛날 한주의 인구만도 못하게 되었다. 심지어 삼국시대가 끝나기 전날의 서진 함녕원년(276년), 서진에서는 대규모 전염병이 발발하는데, 도성 낙양만 하더라도 사망자가 10만명이상이었다.


만일 삼국시대의 전염병이라면, 난세의 '외인(外因)'이라는 이유를 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송, 명, 청의 태평성대에도 전염병은 마찬가지였다. 북송의 168년동안 대규모 전염병이 59차례 발생했고, 남송은 구석진 도성 임안에 있었는데, 152년동안 15차례의 대규모 전염병이 발생한다. 명나라는 주원장이 칭제한 때로부터 숭정제가 목을 맬때까지 277년동안 모두 75차례의 대규모 전염병이 발발했다. 심지어 1년안에 여러번 전염병이 발발한 참상도 있었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들어온 후 아편전쟁이 발발하기까지 196년동안 78건의 대규모 전염병이 발발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전염병에 대한 대처는 특별히 전염상황을 통제하는데, 중국역대왕조의 집정자들에게 모두 국가민족의 생사존망의 위기였다. 이런 위기에 처하여 설마 과학기술과 의료역량이 모두 제한적인 상황하에서 중국의 고인들은 완강하게 통상적인 수단을 강구했고, 매번 전염병의 사망률을 최저한도로 낮추었다.


먼저, 하나의 중요한 전염병방역아이디어는 바로 전염원을 차단하는 것이다.


의료조건이 낙후된 중국고대에 많은 참혹한 전염병비극이 있었다. 이는 모두 전염병의 병원(病源)을 막는데 불리하다. 그리하여 여러차례의 교훈을 얻은 후, "전염원을 차단"하는 것이 매번 대규모전염병이 발발할 때마다 집정자들의 중요한 조치가 된다. 


예를 들어, 송신종 연간의 건주(虔州) 전염병은 바로 장마때 상류의 수원지가 오염되어 발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염원'을 차단할 수가 없어서 전염병이 매년 반복되었다. 신임지주 유이(劉彛)가 부임한 후 과감한 조치를 취하는데, '우오분리(雨汚分離)'의 아이디어로 현지의 도시 수거(水渠)를 개조하고, 저명한 '복수구(福壽溝)'를 건설한다. 이를 통해 오수는 도시생활지역을 우회하여 흐르도록 한다. 이리하여 현지를 여러해동안 휩쓸던 전염병이 마침내 그치게 된다.


그리고 명말청초때 지속된 천화(天花)는 청나라가 산해관을 들어오기 전부터 고도로 긴장하게 만든다. 청태종 홍타이시가 재위할 때, 청왕조는 '사두관(査痘官)'을 설치하여 '천연두가 나타나기만 하면 즉시 격리조치를 취했다' 모든 허위보고는 사형의 중죄로 처리했다.


전염원을 차단하는 것과 관련된 것은 전염지역 및 환자에 대한 격리조치가 있다.


고대인의 인구유동은 현대처럼 밀집되어 있지 않았다. 전랃때 왕왕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는 것은 전란때 난민이 증가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인구유동이 빈번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고대의 태평한 시대에는 전염병이 발발하면 '전염지역격리'가 아주 중요했다. 청나라때의 법률에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천화(천연두) 환자가 발견되기만 하면, 반드시 그를 격리시켜 그를 성에서 20리 떨어진 곳에 거주하게 명한다. 해외에서 중국으로 오는 선박도 엄격하게 '출두자(천연두를 앓는 자)'를 검사하고, 일체의 수입통로를 막아버린다.


진염구역의 위생방역도 마찬가지로 아주 중요하다. 예를 들어, 명말학자 사조제(謝肇淛)는 일찌기 분노하여 명나라말기에 전염병이 빈발한 원인을 들춰낸다. 즉 도시위생여건이 너무나 형편없었던 것이다. 특히 천자의 발아래 있는 북경성이 장기간의 관리혼란으로 '시장에도 분뇨가 많다' 그래서 학질 전염병이 아직도 끊이지 않는다' 북경의 백성들에게 전염병을 피할 좋은 방법이 있을까? 그것은 단지 '유정좌간출(唯靜坐簡出)' 죽, 가만히 집안에 앉아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삼가한다,


당연히 단순하게 피하는 것이 방법은 아니다. 전염국역의 위생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명말 이런 행정혼란의 연대외에 대다수의 기시에 역대왕조는 이를 아주 중시했다. 명나라때 경태5년의 사천전염병, 현지의 순무는 십여개의 재해구역을 나누어서 구역에 안치한다. 매일 위생을 청결히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만명을 살렸다.


일찌기 송나라때, '피역(避疫)'제도가 있었다. 즉 전염구역안의 민중을 특정비방으로 이주시켜 안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송진종연간의 하북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송왕조는 현지백성들에게 남으로 이주하여 '피역'하도록 명한다. 그리고 의관원(醫官院)에서 약품과 식량을 공급한다.


의료지도도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홍주(洪州)전염병때, 지주인 유이(劉彛)는 전염원을 차단하는 외에, 특별히 의료수책 <정속방(正俗方)>을 인쇄하여 발행한다. 3700여명의 평소에 사람들을 속이던 무의(巫醫)를 붙잡아 와서 이 책을 읽도록 한다.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자들은 일률적으로 처벌한다. 청왕조때도 인력, 물력을 모아서 <온열서역전서(溫熱暑疫全書)>등 의료수책을 인쇄발행하여 각지관리백성등에게 나누어준다. 그리하여 백성구제에 큰 효과를 낸다.


이런 조치들과 비교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역대왕조가 전염병을 대할 때, 국가경제와 의료역량을 동원하고 투입하는 것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적시에 의료투입을 이루는 것이 방역을 성공시키는 관건이다. 북송연간때, 조정에는 '방역전관(防疫專款)'을 두었다. 이는 서남각주의 위생방역에 쓰는 자금이다. 매 주마다 이백관의 '전관(전용자금)'을 두었다. 매번 전염병이 발생하면 전염구역의 세금을 감면했고, 식품양식을 나누어주어 구제했고, 의사를 보내어 치료를 했다 이는 모두 모든 왕조의 '통상적인 동작'이었다.


예를 들어, 만력15년 북경전염병때 명왕조는 태의원(太醫院)의 의사를 보내어 북경의 오성(五城) 범위내에서 무료로 병을 치료해주었다. 그리고 재해를 입은 가정에 무상으로 약품과 돈을 나누어 주었다. 정통14년의 회양(淮陽) 전염병때, 명왕조는 더더욱 40여명의 의원을 동원하여 모든 의원에게 담당구역을 정해주고, 약물과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게 했다. 그리하여 200여만명의 백성들이 전염병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 송나라때부터, 각지의 '약국'은 더더욱 구재방역의 주력이 된다. 특히 송나라때부터 각지의 혜민약국(惠民藥局)을 설치한다. 수백년동안 방역의 중임을 맡게 한다. 송원명청의 몇개 왕조의 '방역'에 모두 중요한 작용을 한다.


당연히,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고대의 의료조건하에서, 매번 전염병의 사망자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왕왕 놀라울 정도의 숫자이다. 약간의 방역경험은 더더욱 이전 사람들의 고귀한 생명을 댓가로 얻어낸 것이다. 진염병은 의료기술을 시험하는 것일 뿐아니라, 더더욱 왕조의 조직능력도 시험한다. 이렇게 얻어낸 약간의 경험과 교훈은 지금까지도 깊이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