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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102

싼샤댐 건설자가 알려주지 않은 사실은...... 글: 양자립(楊子立) 금년, 충칭에서 사상유례없는 물난리가 나고, 장강유역이 홍수피해를 입으면서, 사람들은 다시 한번 싼샤공정의 가치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하게 된다. 실제로 중국정부게 조직한 싼샤공정의 타당성검토보고서에서 열거한 '홍수방지, 발전, 통항, 부빈(扶貧)등'의 이점중 발전이 실현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타당성검토보고서에서 해결가능하다고 말했던 진흙모래퇴적, 생태보호, 환경안전, 댐지구이민, 투자과대등의 문제는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정부의 선전부서에서 여전히 싼샤댐은 유용하다는 논조를 취하는 외에, 과학계의 보편적인 태도는 부정적이다. 다만, 1980년대 중국과 외국의 관계가 우호적일 때, 캐나다, 미국의 많은 설계, 연구, 건축.. 2020. 10. 14.
해군부사령관 도용(陶勇) '투정자살(投井自殺)'의 수수께끼 글: 왕우군(王友群) 중공 원수 진의(陳毅)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머리를 자른다고 해도, 나는 도용이 자살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중공 대장 속유(粟裕)는 이런 말을 했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유감스러운 일은 살아 있을 때 도용이 살해당한 진상을 밝혀내지 못한 것이라고. 진의와 속유는 모두 도용의 옛 상사들이다. 도용 "투정자살" 1967년 1월 21일, 당시 남경군구 부사령원, 해군 부사령원, 동해함대 사령원으로 있던 중장 도용은 '투정자살'한다. 장소는 상해시 동해함대 제4초대소 후화원의 우물 안이다. 그날 오전 도용은 상해경비구사령원 요정국(廖政國)과 함께 타도당한 전 상해시위제1서기 진비현(陳丕顯)을 구해내는 일을 얘기했다. 정오에 도용은 요정국과 함께 식사를 하고, 마오타이주도 .. 2020. 10. 14.
"사인방"의 상해잔당에 대한 재판: 마천수(馬天水), 서경현(徐景賢), 왕수진(王秀珍) 글: 왕문정(王文正), 심국범(沈國凡) 마천수 강청반혁명집단의 상해잔당중 핵심분자로 당시에 이름이 열거된 사람은 모두 사십여명이다. 그중 제1차로 재판을 받게 된 사람은 모두 9명이다. 그들은 전중공상해시위서기, 시혁명위원회부주임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여), 그리고 진아대(陳阿大), 섭창명(葉昌明), 황금해(黃金海), 대립청(戴立淸), 마진룡(馬振龍), 주영가(朱永嘉)이다. 이들은 '문화대혁명'때 상해에서 앞장선 인물들이다. 마천수가 원래 상해시위에서 지도자의 직위에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조반파로 관직에 올랐다. 그런데, 당시 재판후의 판결문에는 오직 8명밖에 없고, 이들 잔당중 우두머리인 마천수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왜그럴까? 마천수에 대하여 왜 재판이 진행되지 않았는지를 말하기.. 2020. 10. 11.
왕치산은 제2의 임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제2의 등소평이 될 것인가? 글: 방위관찰(方位觀察) 중국대륙에서 소식이 하나 전해져 왔다. 중공중앙기율검사위 부부장급 순시원 동홍이 조사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궤이한 현상은 동홍이 조사받은다는 소식은 선포되었지만, 동홍의 이력은 공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대륙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검색엔진 바이두에서 '동홍'을 치면 '미안합니다. 당신이 방문하려는 웹페이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는 글만 나온다. 금방, '동홍이 조사받는다'는 소식도 마찬가지로 검색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동홍이라는 사람은 이제 중국대륙의 인터넷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었다. 동홍은 1953년 랴오닝 하이청에서 태어났다. 1983년 중국인민대학을 졸업했고, '중앙고문위원회'에 배치된다. 그리고 중앙고문위원회 상무부주임 보이보의 비서가 된다. 그때, '.. 2020. 10. 11.
왕치산의 내력: 부친은 국민당 장교였다. 글: 정중원(鄭中原) 이전에 사람들은 모두 왕치산(王岐山)을 중공 태자당에 속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왕치산은 중공원로 야오이린(姚依林)의 딸 야오밍산(姚明珊)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역대이래로 '근정묘홍(根正苗紅)'을 중시하는 중공의 권력귀족층에서 고의로 왕치산의 진정한 출신은 언급하지 않아왔다. 그는 국민당 장교의 아들인 것이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왕치산의 부친 왕더정(王德政)은 1907년생(광서33년)이다.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려져있지 않다. 왕더정은 청화대학 제5기 졸업생으로 중화민국의 국국 상위(上尉)를 지낸다. 대륙의 위챗 계정 "청화대학토목공정과및건설관리계" 2018년 3월 19일 발표한 "5기선배 왕더정 - 한 보통 청화인의 경력"이라는 글에서 왕더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하.. 2020. 9. 4.
마르크스주의역사학자 전백찬(翦伯贊)은 문혁때 왜 자살했을까? 글: 왕우군(王友群) 1968년 12월 19일 심야, 북풍은 사납게 불고, 차가움은 뼈를 찔렀다. 일찌기 중공에서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역사학자"라고 불렸던 전백찬은 처 대숙완(戴淑婉)과 옷을 정갈하게 갈아입고 나란히 자신들의 침대에 누워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여 자살했다. 다음 날, 사람들은 전백찬이 윗옷 오른쪽 주머니에서 종이조각을 발견한다. 그 위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나는 실로 말할 수 없다. 이런 막다른 길로 가게 되었다. 내가 이 막다른 길로 간 것을 두사부(杜師傅)는 전혀 모른다." 두사부는 전백찬 부부의 감시감독을 책임지고 있던 은퇴노동자이다. 그리고 전백찬의 윗옷 왼쪽 주머니에서는 또 다른 종이조각이 발견되는데, 거기에는 "모주석만세. 모주석만세. 모주석만세"라고 쓰여져 있었다. 전백.. 2020. 8. 25.
호적(胡適)의 천년일탄(千年一嘆) 글: 사상(史翔)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저 결과만 있을 뿐이다. 지금 70년전 장개석의 '창구학인계획(搶救學人計劃)'을 되돌아보면, 확실히 중공의 호구에서 '학인을 구해낸 것'이다. 대륙이 중공에 점령되기 전에 대륙을 떠난 지식인 호적, 부사년(傅斯年), 전목(錢穆)은 여전히 자유사회에서 자유사상을 전승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대륙에 남았던 걸출한 지식인들은 '반우' 문혁'으로 거의 모두 박해를 당했고, 환상을 깨지고, 악몽만 남게 되었다. 1948년 회해전역(淮海戰役)이 시작되었을 때, 국민당군대는 전투에서 불리했다. 장개석은 좋지 못하다고 예감하고, '창구학인계획'을 제정하기 시작한다. 명단에는 모두 국내에서 탁월한 성취를 거둔 걸출한 지식인들이었다. 그 때는 그들 주에 대다수는 의식하지 못했었다.. 2020. 8. 16.
모국의 독재체제는 중국기업 국제화의 원죄인가? 글: 응탁(應濯) 중국하이테크기업 화웨이가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등 국가의 제제와 사용금지, 제한을 당한 후, 또 다른 중국의 인터넷기업인 바이트댄스 산하의 단편동영상앱인 TikTok도 해외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둔 후, 최근 미국정부로부터 금지를 당했다. 화웨이와 마찬가지로 TikTok이 금지된 주요원인은 미국의 국가안전을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최근 들어 미중관계는 계속 나빠지고 있고, '중국위협론'이 성행하는 배경하에서, 화웨이와 TikTok의 처지는 개별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더 많은 중국기업들이 유사한 곤경에 처할 수 있다. 미국정부가 화웨이와 TikTok이 국가안전과 개인정보안전을 위협한다는 주장은 모두 합리적인 논리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화웨이 TikTok은 많은.. 2020. 8. 12.
중국의 반도체산업은 왜 낙후되었을까? 글: 왕혁(王赫) 대륙의 반도체칩산업이 세계선진수준에 낙후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왜 낙후되었는지를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이 문제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대륙반도체칩산업에 발생한 비극과 사태는 불가피하게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필자는 부족하기는 하지만1 3가지 견해를 얘기해보기로 한다. 1. '일궁이백(一窮二白)'은 거짓말이다. 대륙의 칩산업은 시작이 늦지 않았었다. 1949년 신중국이 성립된다. 그후 중화민족의 역사적 성취를 모조리 말살하고서는, 스스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신중국을 건설했다고 말한다. 이는 완전히 거짓말이고, 민중들을 70년간 속여왔다. 사실상, 첫째, 현대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면에서 중화민국은 역사적인.. 2020. 8. 10.
중국의 욕설외교(漫罵外交)는 효과를 볼 수 있을까? 글: 서졸(舒炪) 최근 들어, 중국정부는 관영선전매체를 이용하여 미국의 국무장관 폼페이오에 대하여 계속 욕설을 내뱉고 있다. 욕설은 비판과 다르다. 후자는 논리와 증거가 있지만, 전자는 그저 문명과 적대적인 후안무치와 깡패근성만 있으면 할 수 있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때로는 IQ가 필요하다. 그러나, 욕설은 그저 목소리만 크면 된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사도뢰등(司徒雷登, John Leighton Stuart)는 대륙에서 거의 삼척동자도 아는 인물이었다. 이는 모택동이 1949년 팔구월에 연이어 5편의 미국정부를 공격하는 글을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그중 한편의 제목이, "안녕, 사도뢰등"이었다. 모주석은 이 5편의 신화사 사설속에 당시의 미국 주중화민국대사 사도뢰등등에 대하여 '군단대사(滾.. 2020. 5. 7.